110화 사냥의 진수 (3)
타악!
높다란 담벽을 훌쩍 넘은 에일이 바닥에 착지했다.
용꼬리 숲의 중심부, 리자드맨들의 촌락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고, 에일은 그 사이에 들키지 않고 들어서고 있었다.
최대한 리자드맨들의 눈을 피하며 깊숙이까지 진입한 에일은 그림자 속에서 지도를 펼쳐 들었다.
‘여기도 아니고……. 그렇다면 남은 건 이곳 정도뿐인데.’
지도를 그으며 표시한 에일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그동안 사냥터의 구조와 리자드맨들이 배치된 위치를 고려할 때, 가장 수상쩍은 곳들을 위주로 돌아다녀 봤다.
하나 아직까지는 결사단원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고, 이제 첫 예상 지역 중에서 남은 건 한 곳뿐이었다.
‘이번이 맞길 바라야지.’
동족들이 살해된 모습을 본 탓인지 리자드맨들의 반응이 점점 격해졌다.
본인이 저지른 짓이긴 해도 어쨌든 서둘러 끝내고 나가는 편이 좋아 보였고, 다시 의심 위치를 짚어가며 내곽 지역을 한 바퀴 돌고 싶지는 않았다.
가까운 위치에 자리 잡은 마지막 포인트.
덜컥!
보초들의 눈을 피해 이동한 에일은 낡아 보이는 리자드맨의 건축물 안으로 몰래 들어섰다.
“네놈은……?”
허름한 로브를 입은 정체불명의 괴한이 에일을 돌아봤다.
상당히 나이 든 목소리를 가진 그는 지팡이를 삐딱하게 쥔 채, 다소 기괴한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결사단의 일원인 이단마법사, 대처였다.
“왕국이 보낸 추적자인가?”
“아니.”
화륵!
에일의 장검에 하얀 불꽃이 일었다.
로브에 그려진 결사단의 인장을 본 이상, 어물쩍거릴 필요는 없었다.
“아, 교단의 이단심판관이었군. 벌써부터 귀찮게 굴다니……. 이래서 빛의 광신도들하고는 일찍 엮일 필요가 없다고 여러 번 말했거늘…….”
대처가 탐탁지 않은 듯 혀를 쯧쯧 찼다.
하나같이 미친 광신도들뿐인 루의 신도들은 이단으로 찍힌 자들에겐 광적인 집요함을 지니고 있었고, 누구라도 적으로 돌리기엔 껄끄러운 상대였다.
그렇기에 눈앞의 노인도 반대했던 입장이었는 듯 보였다.
하지만 결국엔 그들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적을 만든 이유에 대해 궁금했다.
“어째서 교단을 공격한 거지?”
“오, 네놈은 싸움 전에 그런 질문도 던질 줄 아나? 의외로군. 내가 지금까지 봤던 것들은 머리까지 광기에 절여진 놈들뿐이었는데.”
“뭐…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직접 알아내면 되니까.”
에일이 검을 치켜세웠다.
어차피 당장 뭔가를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금기에 손을 댄 악당들에게까지 미친놈 취급받는 건 역시나 묘한 기분이었다.
“웃기는군. 벌써 마력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터엉!
대처의 지팡이가 힘차게 바닥에 찍혔다.
사방으로 퍼져나간 마력이 주변 바닥을 검게 물들였고, 커다란 검은 개가 마력에 물든 바닥 안에서 소환되었다.
지상의 생명체라기보다는 지옥에서 올라온 존재일 법한 끔찍한 생김새.
역겨운 악취를 품으며 주둥이를 쩍 벌린 녀석은 그대로 에일을 향해 돌진했다.
재빨리 반응한 에일은 그를 피해냈고, 놈의 정보를 확인했다.
‘50레벨에… 엘리트 몬스터?’
마법을 발동하는 것만 봐서는 단순한 소환수일 거라 생각했는데, 엘리트 몬스터 취급을 받는 상위급 괴물이었다.
고작 저 정도 캐스팅 시간으로 정예몹을 소환하다니, 확실히 금지된 마법의 효율에 대해선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하나 오히려 그 덕에 저 시꺼먼 소환수의 머리 위에는 선명한 이단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푸욱!
한 번 더 쇄도하는 돌진을 피해낸 에일은 동시에 녀석의 다리에 검을 찔러 넣었다.
치명적인 대미지는 아니었지만, 공격을 통해 녀석의 대략적인 체력을 파악하고 견적을 내 보기 위함이었다.
‘이 정도라면…….’
뻗어져 오는 녀석의 발톱에 에일은 역극 스킬을 발동시켰다.
단번에 뒤를 잡은 에일은 그대로 장검을 치켜올렸고, 뻗어져 나온 일섬이 괴물의 등을 완전히 갈라놓았다.
쿠아아악!
녀석은 불길에 휩싸인 채 검은 피를 쏟아냈다.
고통에 찬 포효를 내뱉는 놈의 머리, 그 위에 떨어져 내린 에일의 장검이 한 번 더 깊숙이 꽂혔다.
[이단을 처단하였습니다!]
[여신의 총애 +0.14% (현재 75.10%)]
[빛의 교단 공헌도 +30]
[신앙심 스탯 +1]
[광기 스탯 +1]
“무, 무슨……!”
다음 마법을 준비하던 대처의 목소리에 경악이 담겼다.
결코 쉽게 당할 리 없는 상위 소환수였음에도, 캐스팅할 시간조차 벌어 주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허겁지겁 캐스팅을 끝낸 대처는 다음 괴물들을 차례차례 소환해 냈다.
방금과 같이 모두가 정예 급의 몬스터들이었고, 그의 명령을 따르며 에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결국 결과는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다.
연달아 스킬을 활용하며 나서는 에일의 앞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갔고, 대처의 안색도 점점 창백하게 질려갔다.
드드드드!
그러자 철갑을 두른 두 기의 골렘이 비장의 수로 등장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 방어력이 높은 소환수를 꺼내든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 에일을 상대로 마땅한 대책은 되지 못했다.
높은 방어력은 마찬가지로 높은 방어 관통 효과를 통해 상쇄시키며 뚫어냈고, 오히려 덩치가 크고 움직임이 느린 놈들의 특성상 일방적으로 공격에 당할 뿐이었다.
그다음은 하반신 없이 땅을 기는 시체들을 수백 구나 땅 밑에서 소환해 냈지만, 놈들은 에일의 불의 세례 스킬 한 방에 감쪽같이 산화되어 사라졌다.
“이… 이럴 수가…….”
“이제 더는 못 꺼내는 건가?”
느긋하게 마나 포션 하나를 삼킨 에일이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은 정곡이었다.
금지된 마법을 통한 소환이기에 효율이 좋긴 했으나, 가능한 소환의 횟수가 정해져 있었고, 더 이상 소환이 불가한 것이었다.
“아쉽네. 스탯이나 좀 더 벌어 두려고 한 거였는데.”
파악!
“커헉……!”
순식간의 공격에 당한 대처가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고꾸라졌다.
대처는 빈사 상태에 빠져 꼼짝도 하지 못했고, 에일이 마음을 먹자마자 상황이 끝나버렸다.
이단으로 지정된 소환수들을 계속해서 소환해 주길래, 더 많은 스탯과 공헌도를 얻어 보려 배려해 준 것일 뿐이었다.
‘방금은 조금 위험했어. 역시 소환사라 그런지 체력이 낮네.’
대처는 방금의 일격으로 사망 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었고, 만약 성화를 끄지 않고 공격했더라면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다 잡은 고기를 이번에도 놓칠 수야 없는 일.
에일은 서둘러 그의 입을 틀어막고 밧줄로 포박했다.
“어디 다른 단서는 없나…….”
고개를 돌린 에일이 엉망이 되어 버린 방 안을 확인했다.
실험실 겸용으로 사용하던 대처의 방이었던 것으로 보였는데, 에일은 어떤 단서가 없나 싶어 방 안을 꼼꼼히 확인해 보았다.
‘잠깐 이건……?’
어질러진 책장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에일이 그를 집어 들었다.
누군가의 서명이 담긴 왕가의 인장이었다.
[핵심 퀘스트 아이템을 발견하였습니다!]
[퀘스트 아이템과 관련된 연계 퀘스트가 자동으로 진행됩니다!]
[많은 양의 경험치가 주어집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뭐……?”
에일이 황당한 표정으로 메시지들을 바라봤다.
갑자기 부여된 대량의 경험치.
앞서 엘리트 몬스터 여럿을 잡긴 했지만, 아이템을 발견한 것만으로 레벨 업을 할 정도로 경험치를 주다니, 어지간해서는 있기 힘든 일이었다.
심지어 수락하지도 않은 추가 연계 퀘스트까지 자동으로 부여되었다.
‘이건 대체…….’
키익! 키이익!
하지만 그때 바깥에서부터 성난 울음소리들이 들려왔다.
요란한 전투 소리를 들은 리자드맨들이 사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빠져나가야겠어.’
에일은 축 늘어진 대처를 들쳐 매고 방을 나섰다.
빠져나갈 퇴로 정도는 이미 짜 두었던바.
이제 월드 퀘스트의 거대한 판 안에 한발 더 들어설 때였다.
* * *
“수고 많으셨습니다. 넘겨 주신 죄인은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저희 신전이 책임져 이단심문소까지 엄중히 호송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사제님.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개를 꾸벅인 에일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용꼬리 숲에서 빠져나온 에일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루의 신전.
빛의 교단이 관리하는 신전에 생포해 낸 결사단원을 넘긴 것이다.
락포터 인근의 이단심문소까지 에일이 직접 죄인을 끌고 가기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때문에 호송은 가장 가까운 빛의 신전에게 맡겼고, 녀석에게 정보를 불게 만드는 것 또한 이단심문소에서 누구보다 확실하게 처리해 줄 것이었다.
어떤 결과가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어도, 만약 심문소에서 정보를 캐내는 데 실패한다면 자신이나 다른 이가 맡았다 할지언정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
호송과 심문이 끝날 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남게 된 상황.
에일은 잠시 자리에 멈춰서 고민에 빠졌다.
‘50레벨은 달성했지만 스킬이 문제네.’
현재 에일은 새롭게 활성화된 스킬창 한 자리가 공석으로 방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에일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스킬북은 보랏빛 하나와 붉은빛 두 개, 결코 부족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명백히 운이 따라 줘야 하는 워로드의 스킬북 시스템에서 충분하다, 라는 말은 있을 수 없었고, 세 개의 스킬북을 모두 사용했음에도 쓸 만한 스킬을 건지지 못한 것이다.
중간에 희귀 스킬이 한 번 나와 주기는 했지만 그저 무난한 성능의 단일 공격기였고, 역할이 일섬과 겹치기까지 하면서 습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한곳에서 가만히 사냥만 하다 보면, 고등급 스킬북 확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게 단점이었다.
‘이제 이걸 어쩐다…….’
아무래도 스킬북 수급은 퀘스트나 보스 몬스터를 상대로 얻는 게 가장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킬북만을 위해 반복 작업을 하면서 성장이 지체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일단은 물건 정리부터 하면서 고민해 봐야겠지.’
에일은 우선 도시의 경매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획득 아이템의 등록과 기존에 올려 뒀던 아이템들의 판매금 수령을 위해,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거점 지역에 올 때마다 한 번쯤은 들러야 하는 곳이었다.
그렇게 에일이 인적 드문 골목길에 들어섰을 무렵.
건너편에서 망토와 후드를 뒤집어쓴 한 쌍의 남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잠깐…….’
어딘지 모르게 심상치 않아 보이는 분위기.
그의 감이 경보음을 울리며 반응했고, 곧바로 방향을 튼 에일이 골목을 빠져나가려 했다.
“자, 잠시만요!”
에일을 향해 소리친 여성이 후드를 급히 벗었다.
청명한 푸른빛을 머금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고,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린 에일은 그녀의 드러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얼굴… 아니,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워로드 전역을 지배하는 왕가, 그리고 왕가의 핏줄이자 하나뿐인 공주 세이아, 그녀가 에일의 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