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사냥의 진수 (2)
콰아아아!
맹렬한 백색의 화염이 통로를 가득 채우며 쏟아졌고, 그에 휩쓸린 몬스터들은 순식간에 산화되었다.
그렇게 놈들을 삼켰던 성난 불길은 벽을 훑으며 사그라졌다.
말끔히 정리된 통로의 앞에 선 에일이 검을 내렸다.
그리고 그런 에일을 노리고 등 뒤에서 달려드는 마지막 한 놈.
파악!
녀석의 목이 단숨에 날아갔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됐어!’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에 에일이 쾌재를 불렀다.
언데드로 가득한 이 음침한 던전 안에 틀어박혀 사냥한 지 벌써 일주일째.
에일은 잠자고 밥 먹고 운동하는 시간만 뺀다면, 거의 최대한의 시간을 갈아 넣어 사냥을 지속해 왔다.
가상현실 게임, 특히 워로드에서의 전투는 많은 심력을 소모하기 마련이었고, 어지간한 사람들은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강행군이었다.
하지만 에일은 온라인 게임에서부터 숙련되어 길러온 노가다 본능에 더해, 초월적인 집념으로 그를 극복해 냈다.
그리고 그 결과.
‘49레벨이라…….’
7일간 8레벨 업.
퀘스트 병행도 없이 단순 사냥만으로 이 정도 속도를 낸 것이다.
물론 오로지 에일의 능력만으로 달성해 낸 결과는 아니었다.
이곳의 몬스터가 주는 경험치의 효율이 매우 좋았던 데다가 리젠 속도가 빨랐고, 최고의 상성까지 겹쳐졌다.
더군다나 스탯 얻을 정예 몬스터들까지도 드문드문 존재했다.
덕분에 에일은 놈들과 틈틈이 마주칠 때마다 스탯도 알뜰하게 올려 두었고, 더욱 박차를 가해 온 던전을 돌아다니며 몬스터들을 쓸어버렸다.
한 번에 구해 놓은 식량과 물자들을 인벤토리에 쌓아 둔 채, 거의 폐관수련급으로 지하 던전에 틀어박혀 사냥한 에일.
하나 이러한 노력에 따라오는 결과는 무엇보다도 달콤했다.
<유저 정보>
이름: 에일
칭호: 여신의 대행자
세력: 빛의 교단
레벨: 49
직업: 이단심판관
주요 능력치
힘: 105(+60) 민첩: 97(+41) 체력: 98(+33) 마력: 20(+20) 신앙심: 162.4(+20) 광기: 156.9(+20)
패시브
[광적인 순교자(기초)], [증오의 칼날(기초)], [방어 분쇄(유일)]
액티브
[성화(기초)], [형벌 선고(사도)], [이단 지정(사도)], [역극(희귀)], [일섬(영웅)], [불의 세례(영웅)]
신앙: 정의와 빛, 광기의 여신
직책: 루의 사도
여신의 총애: 73.96%
공헌도: 8,230 (누적 16,180)
“하하…….”
떠오른 상태창을 바라본 에일이 웃음 지었다.
일주일에 걸친 지옥 사냥의 산물이었고,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어찌나 열을 올렸는지, 처음엔 빠르게 성장한다고 좋아하던 루조차도 나중엔 걱정 섞인 메시지들을 중간중간 보내올 정도였다.
물론 방금의 레벨 업을 마지막으로, 사냥을 마무리 지은 시점에서 그녀도 기쁨을 표해 왔다.
[‘빛의 심판자, 루’가 당신의 근성에 진심으로 감탄합니다.]
[여신의 총애 +1.00% (현재 74.96%)]
[빛의 교단 공헌도 +300]
41레벨에 시작한 사냥이었고, 이젠 49레벨까지 올랐다.
슬슬 사냥의 효율이 처음만큼 나오지 않을 시기였고, 그건 곧 사냥터를 바꿔야 할 시점이라는 뜻.
이제 바깥 공기를 다시 마시러 갈 때였다.
“읏……?”
검을 회수한 뒤, 던전을 나가려던 에일이 순간 자리에서 휘청했다.
아무래도 마지막 스퍼트라며 너무 무리를 했는지 다리가 다 후들거리려 했다.
[‘빛의 심판자, 루’가 당신의 한심한 모습을 질책합니다.]
[여신의 사도는 그런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후원 아이템이 지급되었습니다.]
[축복이 담긴 피로회복 포션(희귀)]
“음?”
새하얀 빛과 함께, 에일의 손에 포션이 담긴 병 하나가 쥐어졌다.
‘이런 아이템은 또 처음 보네…….’
소모성 아이템의 종류야 워낙 다양했고, 에일도 모두 꿰고 있기란 힘들었다.
감사히 고개를 꾸벅인 에일은 포션을 마셨고, 곧 몸에 어느 정도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피로 회복에 대한 포션들은 대부분 실제 체감상으론 시원찮은 경우가 많았는데, 희귀 등급의 아이템이라 그런지 바로 효과가 나타났다.
덕분에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에일은 던전을 나설 수 있었다.
‘영상들의 반응은… 역시 좋네.’
개인 화면을 확인한 에일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사냥에 열중한 사이, 완성본을 받은 에일이 업로드만 해 놨던 영상들의 반응도 굉장히 좋았다.
편집 퀄리티야 블러디직 스튜디오에서 맡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는 수준이었고, 에일의 워튜브 채널은 지금도 계속해서 가파르게 성장 중이었다.
더군다나 에일의 방식도 바뀌었다.
이젠 따로 녹화를 설정해 놓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앞으로는 아예 상시 녹화로 설정해 놓고 쓸 만한 영상을 건지는 식으로 바꾸었다.
모든 플레이 장면 중에서 에일이 적당히 선택해 집어낼 생각이었다.
영상에 쓸 만큼 끝내주는 장면이 언제 갑자기 나타날지 모르는 만큼, 이 방법이 조금 더 효율적인 것 같았다.
‘마침 딱 맞는 정보도 찾아냈고.’
그동안 에일이 무턱대고 던전에 틀어박혀 사냥만 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강행군을 치르면서도 꾸준히 각종 정보 사이트들을 확인했고, 조금 전 쓸 만한 정보를 찾아냈다.
리자드맨들의 영역인 용꼬리 숲에서 금지된 마법의 흔적이 발견됐다는 사실.
최근 대대적으로 집결하기 시작한 리자드맨의 세력과 분명한 연관이 있었고, 관련 퀘스트를 받은 근방의 유저들이 모여 전투 중이었다.
사실 리자드맨들은 그동안 오래된 주술을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히 마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하나 갑자기 등장한 정체불명의 마법들.
기존의 몬스터 중 하나였던 리자드맨의 주술사들이 자신들의 주술을 버리고 금지된 마법으로 추정되는 마법들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탓에 놈들은 왕가로부터 현상금이 걸렸고, 50레벨 근처의 수많은 유저가 주술사들을 노리고 몰려들었다.
하나 갑자기 놈들이 금지된 마법을 깨우쳤을 리는 없는 법, 에일은 그를 결사단의 짓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바짝 숨어만 살던 녀석들이 갑자기 왜 이렇게 날뛰는지…….’
최근 결사단은 전과 달리 활발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그 탓에 정보 사이트의 최상위 등급 유저들 사이에서는 결사단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나돌기 시작할 정도였다.
금지된 마법이 강력한 건 맞지만 엄격히 탄압받는 데다가, 비밀 결사 단체인 만큼 숫자와 기반 세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 탓에 너무 시선을 끌면 좋을 게 없을 텐데, 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뭐, 어쨌든 서둘러야겠지.’
너무 늦었다간 또다시 단서를 놓칠 수 있었고, 통로를 나선 에일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이거 혼자서 가능할까…….”
거대한 높이의 나무 위에 올라타 있던 에일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리자드맨들의 영역인 용꼬리 숲.
그들의 영역답게 울창한 숲속을 수많은 리자드맨 병사가 바글거리며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50레벨대 사냥터 중에서 높은 난이도로 분류된 용꼬리 숲이었지만, 관련 이벤트가 발생한 지금은 전보다도 개체 수가 늘어나 있었다.
영역을 도는 몬스터들의 경계도 삼엄해지고, 살벌한 기운을 풀풀 풍겨댔다.
물론 왕가의 현상금 퀘스트가 발생하고, 그들이 늘어난 것만큼 많은 유저가 사냥터로 찾아왔다.
난이도에 걸맞은 경험치와 전리품을 주었기에 꽤나 많은 유저가 모여, 리자드맨들과 전투를 벌이며 사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에일은 보다 더 깊숙이 들어가야만 했다.
대부분의 유저는 엘리트 몬스터인 리자드맨 주술사를 제거하는 게 목적이었고, 그를 이용해 현상금을 받아 챙기려 했다.
그러나 에일은 그런 목적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들에게 금지된 마법을 넘겨준 결사단원 혹은 그에 관한 단서를 찾아내야 하는 것, 그것이 진짜 에일의 목표였다.
‘그러려면 아예 숲의 중심부까지 파고들어 가야 하는데…….’
사냥을 위해 용꼬리 숲으로 들어와 전투 중인 파티가 많이 있긴 했지만, 그들조차도 들어서는 건 비교적 덜한 외곽지역뿐.
대부분의 파티는 더 많은 리자드맨으로 가득 찬 내곽지역은 쉽게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그래도 해보는 수밖에.’
그간 정보 사이트를 뒤지며 일주일 만에 발견한 실마리였고,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야 없었다.
나무에서 내려온 에일은 수풀을 헤치며 기척을 감춘 채 숲속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리자드맨의 숫자가 워낙 많아 한 번 걸리면 사방에서 몰려들어 위험할 가능성이 있었다.
무엇보다 속성이나 데미지 보너스를 받을 수 있는 몬스터도 아니었고, 가급적이면 발목을 묶여 가며 상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물론 그건 들키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키익?
수풀 사이를 지나던 에일과 우연히 눈이 마주친 리자드맨 한 마리.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잠깐의 눈맞춤이었다.
콰악!
녀석의 목에 순식간에 장검이 꽂혔고, 에일은 벌러덩 뒤집어져 발버둥 치는 녀석의 머리를 발로 밟아 으깼다.
단숨에 목숨을 잃은 리자드맨은 덜렁거리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무리 잘 숨어 다닌다 해도 한 번도 들키지 않을 수는 없었고, 다른 동료들을 불러 모으기 전에 이렇게 재빨리 제거해 가며 나아가야 했다.
하지만 에일은 놈의 시체를 두고 곧바로 떠나지 않았다.
“역시… 그냥 가면 조금 그렇겠지?”
이젠 시체를 두고 곱게 떠나면 더욱 어색함을 느끼는 에일이었다.
* * *
“이… 이것들이 미쳤나?”
“크억……! 갑자기 얘들 왜 이래요?”
숲에서 사냥 중이던 유저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갑자기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한 리자드맨들 탓이었다.
원래도 마냥 쉽지 않은 녀석들이긴 했지만, 지금은 아예 광분 마법에 걸린 것처럼 격하게 분노하며 달려들었다.
어떤 징조가 있던 것도 아니고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맞닥뜨린 건 단순히 이들 파티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키이이익!
쉬이익!
분개한 리자드맨들의 울음소리가 숲속 곳곳에 퍼졌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숲속의 온갖 곳에서 이루어진 리자드맨들의 처형.
영역에 침입한 정체불명의 인간에게 동족이 붙잡혀 끔찍하게 능욕을 당하며 죽어간 것이다.
화형과 참수를 비롯해 전시하듯 꾸며 놓은 처참한 광경을 거의 모든 리자드맨이 목격했고, 인간들에게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결국 애꿎은 다른 유저들에게만 향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