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이단심판관-105화 (105/227)

105화 규격 외 거래자 (4)

“어우… 화끈한데.”

영상을 보고 있던 에일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거대한 화염 마법이 길드 건물 전체를 쓸어버린 장면.

불과 몇십 분 전에 업로드되어 화제가 되고 있는 영상으로 중견급 길드가 한순간에 쓸려나가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볼 수 있었다.

사실 원래 나이트메어가 보이는 방식대로였다면 그들의 길드에 서너 명만 보내 초토화시켰을 것이다.

그 정도 인원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남았으니까.

하지만 굳이 여섯이나 되는 길드원을 보낸 이유.

‘이쪽에 성의를 보인 거겠지.’

에일이 피식 웃음을 띠었다.

메디아까지 직접 찾아갔던 에일은 고대 던전에 대한 정보를 조건으로 나이트메어와의 거래를 성공적으로 성사시켰다.

전에 쫓겼던 아마란스의 경우, 타인의 청부 하나를 막는 것으로 이만한 정보를 소모하기엔 너무 아까운 카드인 데다가, 워로드 전역에 흩어져 있는 만큼 그들을 아예 박살 낼 수는 없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짓밟았다간 남은 이들로 인해 후환이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화이트 팽은 달랐다.

에스마이어 지역에 터를 잡은 길드.즉, 절대적인 나이트메어의 세력권 내에 자리 잡은 길드라는 뜻이다.

나이트메어가 움직이기만 한다면 뒷맛까지 깔끔하게 완전히 지워 버릴 수 있는 세력이었고, 지금은 순조로이 그 수순을 밟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불쌍하다는 생각도 안 들어. 자세히 알아보니 길드 사정이 있긴 했지만, 욕심도 적당히 부렸어야지.’

영상을 끈 에일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마란스는 단지 고객 중 하나의 청부를 받은 것뿐이지만, 놈들은 아예 에일을 길드 척살 명단에까지 올리며 적대할 셈이었다.

심지어 손안에 넣기 위해 협박을 가하며 퀘스트까지 망쳐 놓은 녀석들이니, 아예 다신 귀찮게 하지 못하도록 뿌리를 뽑아 버린 것이다.

베켄에게는 끝내주는 추가 옵션까지 걸어 뒀으니 뒤탈도 없을 것이고, 당분간 방해받을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쓸데없는 악연 하나 탓에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어…….’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예상 못 한 건 아니었지만, 이제 당분간 마음 편히 성장에 집중할 수 있어 보였다.

다만, 이번 일로 잃은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에일로서는 전혀 생각 못 했던 뜻밖의 성과가 있었다.

나이트메어의 길드장 카린, 그녀가 직접 에일과의 협상 테이블에 나선 것이다.

세계 랭킹 4위의 탑 랭커를 벌써부터 마주하게 되다니, 솔직히 말해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언제나 화면 너머에서나 보던 유명인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동등한 자격으로 마주했다.

자신이 워로드의 거대한 판 안에 제대로 발을 디뎠음을 체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녀가 어마어마하게 바쁜 위치에 있는 만큼 협상에 주어진 시간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단순히 말이 잘 통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녀는 에일이 말을 꺼내들지 않은 것조차 곧바로 포착해 내며 대화를 진행시켰고, 아무런 차질 없이 짧은 시간 안에 모든 합의를 이뤄냈다.

귀찮은 간 보기나 흔들기 따위 없이 시원시원한 과정이었음은 물론, 에일의 이름으로 개별 할당된 연락 채널까지 개설되었다.

‘애초에 길드장이 직접 나섰다는 것부터가 어느 정도 관심을 뒀다는 이야기였을 테니까. 이번 거래가 끝일 거라 생각한 게 아니겠지.’

영상을 통한 네임드 플레이어로서 잠재력을 인정받은 건지, 아니면 무언가 그 이상을 보고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녀에게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물론 들뜨기엔 일러. 이제 쓸 만한 거래처 하나가 생긴 것뿐이니까.’

에일은 소속 길드원도 아니면서 그들하고만 연락을 주고받을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어디든 기웃거리며 줄타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여러모로 불리한 개인 유저의 몇 안 되는 장점이었다.

그리고 에일은 그 장점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었다.

6대 길드든 12강이든 상관없다.

언제든 토사구팽 당할 수 있는 사냥개가 되기보단, 격렬하게 맞부딪치는 거인들 틈에서 판을 짜며 상황을 풀어가는 주도자가 될 것이다.

[‘빛의 심판자, 루’가 당신의 수완을 인정합니다!]

[여신의 총애 +1.74% (현재 64.84%)]

[빛의 교단 공헌도 +1,500]

갑자기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 중견급 길드 하나를 박살 낸 덕인지 굉장한 보상이 주어졌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또 하나의 메시지.

[‘빛의 심판자, 루’가 하늘을 가리킵니다.]

“음……?”

에일은 메시지에 따라 반사적으로 시선을 올렸고, 곧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느새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비행선이 정거장에 도착해 있었다.

무려 35분짜리 지옥의 배차 간격을 가진 비행선이.

‘아, 안 돼!’

* * *

“오셨습니까.”

블랑쉬 고원에 위치한 힐스베다 지하 유적지의 입구.

나이트메어의 랭커, 람빅이 어둠을 뚫고 나타난 카린을 맞이했다.

“안쪽 상황은 어때.”

“초입부 몬스터들은 전부 190레벨 근방입니다. 다만 엘리트의 경우 200을 넘어서는 경우도 있고, 패턴이 까다로워 랭커급이 아니라면 위험할 겁니다.”

“분명 210대의 던전이라고 했는데 말이지. 더 깊숙이 들어가 봐야 한다는 건가.”

카린이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고대 던전 계통답게 크기가 보통이 아니라……. 공략에 얼마나 걸릴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단축할 수 있는 만큼은 최대한 줄인다. 당장 출발할 테니 너도 준비해.”

“잠깐, 직접 나서신다고요?”

화들짝 놀란 람빅이 그녀를 쳐다봤다.

“내가 여기엔 왜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외관상으로만 봐도 알 수 있듯 고대 던전의 크기를 보아, 하루 이틀 정도로 끝날 공략이 아니었다.

또, 던전의 패턴이나 난이도에 따라 얼마든지 기한이 늘어날 수 있는 상황.

카린과 본인을 비롯한 하이랭커들까지 나선다면 단축되기는 하겠지만, 거대 길드의 수장쯤 되는 이가 던전 하나에 그만큼 오래 묶여 있는 건 좋지 않은 일이었다.

“일정은 모두 캔슬해 둬. 몇 주 전부터 계속 서부 사막 밖에서 잡음이 들려오는데 이번 건과 관련해서도 냄새가 난단 말이지.”

“그렇다면야… 알겠습니다.”

길드장의 단호함에 람빅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서둘러 왕의 무덤이 있는 내부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감이 이번에도 뭔가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번 정보를 넘긴 이단심판관 말입니다. 굳이 직접 만나 주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사람들이야 그 로덴을 찍어 누른 줄 알고 과대평가하고 있지만…….”

앞서가던 람빅이 카린에게 슬쩍 물었다.

자신이 처음 영상을 보고하며 소개했던 이였기에 더욱 기억에 남았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은 햇병아리에 불과한 루키, 길드장이 직접 시간을 쪼개 그런 이를 만나 줄 이유는 없었다.

그녀의 성격상 그런 불필요한 만남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람빅, 너도 못 봤던 건가?”

“예? 뭘 말입니까?”

“아니… 아무것도.”

카린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띠며 고개를 돌렸다.

* * *

콰아앙!

귀가 먹먹해지는 격렬한 전투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원인으로 보이는 던전을 발견했던 에일이 갑작스레 쫓겨 달아남으로 인해, 툴리 마을의 습격 문제가 아직도 해결이 되지 못한 탓이었다.

점점 더 격렬해지던 몬스터들의 습격은 이제 웨이브 방식을 넘어서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었다.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더욱 늘어난 몬스터의 습격으로 인해, 마을의 방어가 한계에 달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원인을 밝혀내 언데드들의 진군을 저지하십시오!]

[성공 시 네 배의 추가 경험치가 주어집니다.]

[남은 시간 ‘3:39:11’]

“꼭 좀 부탁하네! 이제 정말 오래 버틸 수가 없어.”

“허…….”

간곡히 부탁을 넘기는 조사단원과 마주하고 있던 에일은 순간적으로 황당함을 숨길 수 없었다.

에일이 추적을 피해 달아난 사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던 방어전이 한계에 달한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상황이 새로운 퀘스트를 파생시켰고, 에일에게는 호재가 되어 버렸다.

원래 보상에 더해 무려 네 배의 추가 경험치라니.

자신을 막아 세웠던 고딘에게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나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될 정도였다.

‘이거 서둘러야겠어.’

에일은 급히 장비를 챙기고 마을 밖으로 나섰다.

시간제한이 걸려 있긴 했지만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그를 서두르게 만드는 것은 이번 퀘스트가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유저들까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퀘스트의 내용은 저 안개 속으로 직접 들어가 짐작도 안 가는 원인을 밝혀내야 하는 것이었고, 일찌감치 포기하고 방어전에 전념하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이번 방어전에도 추가 보상이 붙기는 했지만, 무려 4배의 추가 경험치엔 감히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욕심을 내며 모험수를 던진 이들이 있을 터.

키에에엑!

“저리 꺼져!”

괴물의 포효와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어지럽게 얽혔고, 마법사가 쏘아낸 마법들이 여기저기서 폭발했다.

언데드가 쏟아진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저번 방어전에 비해 사람은 늘어났지만, 몬스터들의 숫자는 한술 더 뜬 탓에 오히려 전보다 더욱 힘에 부쳐 보였다.

결사전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다툼.

하지만 그 전장을 달리고 있는 에일의 신경은 온통 한데 쏠려 있었다.

‘그 녀석들… 계단은 다시 닫고 나왔겠지?’

장치를 통해 여닫을 수 있는 던전 입구의 계단.

만약 입구가 닫혀 있기만 하면 이 혼란한 안개 속에서 우연히 던전을 발견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반대의 상황이라면…….

누군가 이미 발견했어도 이상할 게 없다.

“하, 이런……!”

자리에 멈춰선 에일의 앞, 아니나 다를까 활짝 열려 있는 계단의 입구가 그를 반기고 있었다.

화이트 팽 패거리들을 붙잡고 제발 문 좀 닫고 다니라며 잔소리를 퍼부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에일은 눈물을 머금고서 계단을 달려 나갔다.

이번 퀘스트의 성패는 물론, 월드 퀘스트와 이어지는 단서까지도 빼앗겼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계단 아래엔 누군가 최근에 들어간 흔적들까지 보였다.

‘저기다!’

힘껏 내달리던 에일이 정면에 멈춰 서 있는 파티를 발견했다.

다행히 그들도 아직 깊이 들어선 것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어, 사람이다! 안녕하세요?”

“설마 거길 뚫고 혼자 오셨나? 체력도 얼마 없으시겠네.”

“잠깐, 어디서 본 거 같은 얼굴인데…….”

그와 마주친 네 명의 유저가 제각기 에일을 향해 말을 걸어왔다.

역시나 에일과 같은 퀘스트를 받은 파티로 보였고, 마침 바닥에 열려 있던 계단을 우연히 발견해 어부지리로 들어온 것일 터였다.

“휴.”

유저들의 앞에서 멈춰선 에일이 잠시 숨을 골랐다.

만약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들이 먼저 던전에 들어온 이상 큰 낭패를 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일이 먼저 발견했던 곳이라고 우겨 본다 한들, 증거가 없으니 분란만 발생할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을 보자마자 에일의 불안감은 말끔히 가셨다.

파티원들의 머리 위에 그려진 강렬한 표식의 존재 덕이었다.

“음… 이단들이네?”

화륵!

에일의 검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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