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규격 외 거래자 (3)
“말도 안 돼! 형이 직접 갔는데 어떻게 놓칠 수가 있어!”
베켄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분개하며 소리쳤다.
그가 증오해 마다않는 에일에게 고딘과 길드원들이 직접 찾아갔음에도 결국엔 놓쳐 버렸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탓이었다.
대충 건너들은 게 전부였던 아마란스와 달리, 형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베켄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글쎄 놈이 갑자기 이상한 수를 썼다잖아. 곧바로 다시 추적에 들어갔다고 했으니 곧 잡힐 거야.”
“그 자식을 지금 쫓고 있다 이거지? 확실해?”
“그래, 그래. 그러니까 그만 귀찮게 하고 할 거 하고 있으라니까.”
짜증 섞인 얼굴의 길드원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베켄에게는 아직 에일을 길드로 영입하려는 것에 대해서 비밀로 하고 있었다.
길드원들이 에일을 쫓기 시작하자 드디어 놈을 길드의 척살 명단에 올린 줄 알고 신나하던 베켄이었는데, 오히려 그를 같은 소속으로 들인다 하면 아주 생난리를 피워댈 게 뻔했다.
그렇게 남자가 베켄을 붙잡고 있는 동안, 다른 세 명의 화이트 팽의 길드원은 대책 회의에 나섰다.
“뒤에 짐덩이가 있으니 도무지 진행이 안 돼. 다들 이거 어떻게 할 거야? 골드까지 내고 들어왔는데 이대로 있을 거야?”
“그럼 어쩌려고? 여기서 목이라도 딸까?”
“하아, 오늘 안에 레벨 업할 계획이었는데…….”
그들이 위치한 곳은 130레벨대 유명 사냥터, 비명 협곡.
기본적으로 사냥 효율이 상당히 좋기로 유명한 데다가, 중간 정비를 할 수 있는 거점의 위치도 가까워 편리성까지 가진 덕에 많은 이가 찾는 곳이었다.
다만 그런 좋은 사냥터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을 리는 없을 터.
나이트메어의 산하 길드인 ‘글레이드’가 직접 맡아 관리하는 사냥터였고, 통행료를 내지 않고는 감히 출입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들 파티들도 효율적인 사냥을 위해 돈을 내고 여기에 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레벨도 한참 낮은 베켄이 실시간으로 소식을 전해 듣겠답시고, 계속해서 그들을 쫓아다니며 알짱거렸다.
하필 길드장의 동생이라 어떻게 손을 봐줄 수도 없고, 가만히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 귀찮은 짐 덩어리를 들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니, 됐어. 그냥 내가 데리고 나간다. 애초에 통행료도 안 내고 여길 왜 들어온 거냐고.”
희생을 자처한 길드원 한 명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리 직속이 아니라도 그렇지, 결국엔 6대 길드인 나이트메어의 관리하에 있는 사냥터였다.
비록 베켄이 사냥에 끼지도 못할 초보자라 해도, 무단 통행이 걸리면 일이 골치 아파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베켄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어디선가 거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드드드드!
순식간에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이들.
말을 탄 기수들이 그들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더니 자리에 멈춰 섰다.
“무, 무슨……?”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한 길드원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녹색빛으로 통일된 갑옷과 선명히 그려진 벌새의 문장.
글레이드의 길드원들이었다.
“화이트 팽 소속의 유저 다섯… 너희가 맞겠지?”
“잠깐, 이쪽은 초보자야. 우리 길드 소속이긴 하지만… 길을 잘못 들었다 해서 다시 데리고 나갈 참이었어.”
베켄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급히 입을 열었다.
글레이드의 길드원들이 비명 협곡의 관리 길드로서 무단침입자를 잡아내려는 줄만 알았기에 서둘러 변명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신경 쓰는 건 통행료 문제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콰직!
앞으로 나섰던 남자가 휘둘러진 철퇴에 정면으로 맞았고, 투구와 함께 머리가 찌그러지며 바닥을 굴렀다.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동료들은 믿기지 않는 상황에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그들이 사태를 미처 파악하기도 전, 주위를 둘러쌓았던 글레이드의 길드원들이 일제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크헉……!”
“이 자식들이!”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시작된 기습.
공격을 당한 길드원들은 다급히 저항하려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스펙과 실력 차이에, 숫자마저도 상대는 6명으로 우위에 있었다.
푸욱!
저항하던 마지막 길드원까지 창에 찔리며 쓰러졌다.
이제 자리에 남은 건 무기를 뽑을 엄두도 내지 못했던 베켄뿐.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베켄이 버럭 소리쳤다.
그들이 나이트메어의 산하 길드로서, 누구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건 맞았다.
하나 아무런 명분도 없이 하나의 길드를 먼저 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대상이 조그만 중소 길드라면 모를까, 화이트 팽은 수백 명 단위의 세력을 갖추고 있는 중견 길드였다.
오히려 글레이드 측에서 나이트메어의 징계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감히 예고도 없이 선제공격을 해! 이 사실을 형이 알면 어떻게 될지 알아!”
“잠깐. 네가 고딘의 동생, 베켄인가?”
“그래! 이 개같……!”
푸욱!
“커헉……?”
창에 꿰뚫린 베켄이 주르륵 피를 뱉어냈다.
단숨에 그의 입을 다물게 만든 길드원은 비웃음을 띤 채 죽어 가는 베켄을 내려다봤다.
“마침 잘됐군. 너는 특별 대상이거든. 다신 워로드에 발도 들이지 못하도록 완전 척살하라는 명령이다.”
* * *
“녀석이 메디아로 향하는 비행선에서 발견됐습니다. 얼굴도 내놓고 다니는 걸로 보아 추적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을 것 같고요.”
“방심하지 말고 청부 길드들에게도 의뢰해. 최대한 빨리 끝낸다. 언제까지고 이 건에 매달리고 있을 수는 없지.”
길드 집무실에 앉아 있던 고딘이 말했다.
고작 사람 하나 쫓는 데 중견급의 길드 전체가 목을 맬 수는 없는 법.
길드장인 고딘과 1군으로 분류되는 주 전력들도 오늘부터 중요한 레이드 일정이 여럿 잡혀 있었다.
대망의 연합 거점전을 앞두고서 스펙업에 박차를 가하려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길드 건물 바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히 소란스러워진 것을 넘어, 심히 어수선한 분위기에 위화감을 느낀 고딘은 집무실을 나와 1층으로 내려왔다.
“무슨 일이지?”
“크, 큰일입니다! 저쪽에……!”
방금 문을 박차고 들어온 길드원이 밖을 가리키며 소리쳤고, 고딘과 길드원 몇몇은 직접 상황을 살피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 보았다.
그러자 그들은 길드 건물 앞에 서 있는 검은 갑옷 차림의 유저들을 볼 수 있었다.
소란을 일으키며 코앞까지 들이닥친 여섯 명의 유저.
‘나이트메어……!’
고딘이 순간 자리에 굳었다.
그들을 찾아온 것은 무려 나이트메어의 직속 길드원들이었고, 마치 선전포고라도 하러 온 듯이 살벌한 분위기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사람들이 길거리에 모여 구경꾼들이 가득한 상황.
“갑자기 여긴 어쩐 일이지?”
“네가 화이트 팽의 길드장인가?”
“그렇다.”
고딘이 애써 긴장감을 감추며 말했다.
길드 건물에 남아 있던 길드원들은 모두 40여 명이 넘었지만, 그 정도 인원만으로 저 6명의 유저를 당해낼 가능성 따위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고딘은 나이트메어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될 만한 사안은 건드린 적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결코 큰 문제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바.
그러나 그의 기대는 단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너희 길드를 해체하기 위해 찾아왔다.”
“뭐, 뭐라고?”
앞으로 나선 남성의 한 마디.
고딘과 길드원들이 경악함은 물론, 주변에서 구경을 하던 사람들까지 깜짝 놀라 술렁이기 시작했다.
설마 길드 해체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단순히 전쟁을 넘어서 아예 그들의 뿌리를 뽑아 버리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아니… 말도 안 돼. 나이트메어에서 우리 길드를 공격할 이유 따윈 없어.”
“글쎄, 너희가 건드려서는 안 될 걸 잘못 건드린 모양인데.”
‘잘못 건드려……?’
고딘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여가기 시작했다.
몸집이 있는 길드를 운영하며 타 세력과 충돌이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서로가 원한을 살 일이라면 에일 정도는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많은 이가 떠올랐다.
‘젠장, 누구지. 6대 길드를 매수할 수 있을 정도라면…….’
열심히 생각을 쥐어짜내는 고딘이었지만,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사이, 이야기가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나이트메어의 길드원들이 무기를 뽑아들며 거리를 좁혀왔다.
“잠깐……!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 그쪽 간부와 이야기를 나눠야 해.”
고딘은 나름 나이트메어 길드 내에도 얕게나마 연줄이 닿아 있었다.
나이트메어 소속의 랭커 중에 그와 같은 ‘클랜워’ 게임 출신이 있던 덕이었다.
클랜워 랭킹 1위를 놓친 적 없었던 그는 워로드의 나이트메어 소속으로 들어갔고, 주요 간부 축에는 들지 못해도 랭커 중 한 명으로서 무시 못 할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자주 연락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지만, 따로 만나 부탁한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간단했다.
“미안하지만 누구와 대화하든 소용없어. 길드장께서 직접 지시한 사항이니까.”
“그, 그럴 리가…….”
고딘의 얼굴에 깊은 충격이 어렸다.
다른 이도 아니고 무려 6대 길드의 수장이 나서게 만들 수 있는 이가 자신의 주변에 있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빠져나갈 궁리를 아무리 한들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완전히 모퉁이에 몰리자, 애써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 했던 고딘도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끌어 온 길드인데 이렇게 위기를 맞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했고,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며 그간 쏟아낸 모든 노력과 성과가 담긴 결실이었다.
고딘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붙들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부탁한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너희 길드장과 만나게 해 줘. 아니, 이번 일을 맡긴 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진심으로 사과하겠다. 절대 이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어. 이렇게 허무하게는…….”
“이봐, 길드장까지 해 봤으면 알 거 아니야. 워로드에 그런 어줍잖은 이야기 따윈 소용없다는 걸. 사과라고? 그렇다면 너희 길드가 성장하기 위해 그동안 깔고 뭉갰을 수많은 길드와 유저들은? 그들이 무릎을 꿇고 애원할 때 너희는 검을 거뒀나? 물론 아니겠지. 그랬다면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건…….”
남자의 말에 고딘은 차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고, 정적이 맴돌았다.
워로드에 깊숙이 몸을 담고 있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침묵을 깬 한 마디.
“쓸어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