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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이단심판관-102화 (102/227)

102화 규격 외 거래자

에일이 처음 진입했던 계단을 통해 던전을 빠져나왔다.

화이트 팽 길드 놈들 탓에 겨우 찾았던 이번 던전을 끝까지 다 확인도 하지 못하고 도망쳐야 했다.

곧장 짙은 안개 속으로 몸을 숨긴 에일은 언데드들을 피해 가며 평원을 빠져나갔다.

‘다행히 달아나긴 했지만… 아직 안심하긴 일러.’

잠깐의 틈을 만드는 용도일 뿐 섬광 자체의 효과는 그리 길지 않았다.

당장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쯤 정신을 차린 길드원들이 뒤에서 열심히 쫓아오고 있을 것이다.

이 짙은 안개를 뚫고 자신의 흔적을 쫓아왔던 것을 보아 추적과 관련된 아이템이나 스킬이 존재할 것이었고,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금방 좁혀질 거리였다.

게다가 하필 이 근방에 있는 유일한 거점, 툴리 마을은 제대로 된 경비병들이 있는 곳도 아니었다.

그들의 추적을 피하려면 더욱 멀리 달아나야 했다.

‘이 주변이라면… 그곳밖에는 답이 없나.’

마을과 목책이 있는 쪽에서 정반대 방향으로 향한 에일은 곧 안개 낀 평원을 빠져나갔다.

그가 향한 평원의 끝엔 높다란 나무가 늘어서 있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었고, 서둘러 안쪽으로 진입했다.

구조가 굉장히 복잡하고 드넓은 숲이라 모습을 감추기엔 안성맞춤인 곳.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자신을 쫓아오고 있는 추적자들을 따돌리기엔 부족했고, 에일이 생각하고 있는 돌파구도 아니었다.

에일은 계속해서 자신의 위치와 지도를 확인하며 무언가를 찾았다.

콰앙!

뒤편에서 투창이 날아와 에일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갔고, 앞쪽에 있던 나무 기둥을 박살 냈다.

하지만 에일은 움찔하거나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달렸다.

‘역시나 뒤따라왔네.’

던전을 나오며 속도를 증가시켜주는 도핑 포션까지 마셨음에도 발 빠르게 뒤를 쫓아온 길드원들이었다.

다만 들려온 소리로 보아 제법 멀리서 던져 온 투창이었는데, 미리 눈치채고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꽂혀 버렸을 만큼 정확도가 매서웠다.

레벨 차이가 나는 만큼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 가망은 없었다.

‘잠깐, 찾았다……!’

이대로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그가 찾고 있던 구덩이가 나타났다.

겉보기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작은 구덩이였지만, 저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에일은 잘 알고 있었다.

촤아아악!

바로 몸을 던진 에일이 구멍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금세 아래로 도착한 에일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천장과 바닥을 포함해 온 사방에 크고 작은 거미줄이 쳐진 굴이었다.

서늘한 공기가 스치는 이곳은 거미굴.

무려 150레벨의 대형 몬스터인 자이언트 스파이더의 서식지였다.

자이언트 스파이더는 분류상 일반 몬스터 취급이었지만, 난이도 자체는 웬만한 엘리트 몬스터 뺨치는 녀석들로 유명했다.

놈들의 굴이라면 온 사방으로 널리 뻗어져 있어 이 주변 지역을 벗어나고도 남을 것이다.

물론 보통은 에일의 스펙으로 이런 곳에 발을 들인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크르르륵!

위에서 들려오는 위협적인 숨소리.

에일이 반사적으로 시선을 들어 올리자 천장에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거미가 대롱대롱 매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철저한 야행성 몬스터인 놈들은 낮에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직접 공격을 받거나 아예 바위를 폭파하는 수준으로 굉음이 들리지 않는 이상 깨어나지 않았다.

음산한 굴 안의 풍경에 더해 정말 끔찍이도 징그러웠지만, 지금으로썬 그를 살릴 유일한 방법이었다.

‘저쪽이군.’

사방으로 뚫린 수십 개의 통로들 사이에서 에일은 벽 쪽에 나 있는 커다란 구멍을 발견했다.

자이언트 스파이더의 굴은 기본적으로 굉장히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공간마다 특정 패턴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요령만 있다면 막다른 길이 아닌 내부로 향할 통로를 얼마든지 파악할 수 있었고, 에일에겐 그 요령이 있었다.

에일은 끈끈함을 잃어버린 부분의 거미줄들을 찾았고, 그를 타고서 벽 위에 올라가 벽면의 통로 위에 섰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곧바로 달아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신호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일이 내려왔던 구덩이에서 누군가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다!’

인벤토리에서 활을 꺼낸 에일은 곧바로 활시위를 당겼다.

파악!

호기롭게 날아간 화살은 데미지를 주기는커녕 거대한 거미의 표피에 맥없이 튕겨져 나갔다.

하지만 상관은 없었다.

잠들어 있던 몬스터의 눈을 뜨게 하는 데엔 문제가 없었으니까.

드드드득!

쿠웅!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내려선 자이언트 스파이더는 수십 개의 붉은 눈알을 굴리며 자신의 잠을 깨운 침입자의 흔적을 좇았다.

그리고 정확히 그 타이밍에 에일을 쫓던 고딘이 아래로 내려왔다.

“무슨……!”

키이이이익!

침입자를 발견한 자이언트 스파이더가 포효했다.

분노한 거미의 입에서 뻗어져 나간 거미줄이 천장에 치솟더니 단숨에 사방을 뒤덮었다.

끝을 보기 전까지는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발동된 녀석의 패턴이었다.

그리고 생겨난 거미줄 너머로 고딘과 에일의 눈이 마주쳤다.

이미 빠져나갈 수 있도록 통로 쪽에 자리 잡고 있는 에일.

그의 모습을 본 고딘은 여기서 추적이 끝났다는 걸 직감했다.

“왜 길드를 거부하는 거지! 넌 우리에게 이름을 건네고, 우리는 널 압박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이 제안을 어째서?”

“미안하지만 나 하나 못 잡는 무능한 녀석들 보호는 필요 없는데.”

피식 웃은 에일이 말하자 고딘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에일은 등을 돌렸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고딘이 소리쳤다.

“아직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잘 모르겠지만, 그따위 안일한 생각으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어! 워로드는 길드가 전부다. 아무리 강한 랭커라도 그를 뒷받쳐 줄 세력이 없다면 결국 짓밟힐 뿐. 그런데 고작 50레벨도 넘지 못한 네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아니. 유저 한 명이 할 수 있는 건 네 생각보다 많아. 그걸 가르쳐 주지.”

에일의 뒷모습이 벽 너머로 사라졌다.

* * *

“…….”

거대한 거미가 널브러진 채 죽어 있는 시체의 앞.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고딘은 검을 거뒀다.

그사이, 뒤편에서 숨 가쁘게 뛰어온 길드원이 그에게 다가왔다.

“어, 어떻게 되셨습니까?”

“완전히 놓쳤다. 확실히 로덴을 눌렀다는 게 거품은 아니군.”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바.

고딘은 순순히 자신이 상대를 얕잡아 보고 방심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는 못하겠지. 길드를 상대로 혼자서 아무리 도망쳐 봐야 한계가 있으니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원래 저희 방식은 아니잖습니까.”

“어쩔 수 없는 결정이야. 서리불꽃과 합의를 본 이후 길드 내 분위기가 굉장히 좋지 않아.”

고딘이 짜증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그들의 길드, 화이트 팽은 얼마 전 마찰이 빚어졌던 서리불꽃 길드와 충돌 없이 합의를 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문제는 합의가 나온 과정이 원만하게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점이다.

협상에 임하며 계속해서 호전적인 태도로 일관한 서리불꽃에게 고딘은 곧 있을 연합 및 거점전을 차질 없이 준비하기 위해서 많은 걸 양보하며 두 발 물러섰다.

자존심을 굽히는 입장이긴 했지만, 길드의 입장에서 거점을 차지한다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목표였으니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길드원 사이에선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정말 강한 길드를 상대로 마찰이 빚어진 것이라면 길드원들도 물러서는 데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아니었다.

제대로 붙는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보이는 동급의 체격을 지닌 길드.

심지어 서로 돌이키기 어려울 만큼 심한 마찰을 겪은 상태에서 자신들의 길드가 먼저 물러서니 길드원들의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직은 여기저기에 이야기가 퍼지지 않았지만 서리불꽃의 길드원들이 그들을 조롱하며 떠들고 다니기라도 한다면 그만한 수치가 따로 없었다.

대부분 길드에 강한 소속감을 가지는 길드원들의 입장에선 자연히 그런 결정을 내린 길드 마스터에게 불만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반발이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연합을 앞둔 상황에 지금의 기류는 분명 문제가 있다. 길드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네임드 플레이어를 끌어오는 게 필요했어.”

누군가를 강제로 길드에 끌어들인다는 것 자체가 다소 무리한 시도긴 했다.

하지만 거점전을 앞둔 가장 중요한 시점에 이런 식으로 불만이 쌓여 균열이 생긴 상태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지금으로썬 어떻게든 분위기 환기가 꼭 필요한 때였다.

“놈에겐 뒤를 봐줄 만한 세력도 인맥도 없어. 운이 좋아 상황을 모면하기는 했어도 아마란스를 상대로 고전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고딘은 그의 동생이 에일을 처리하기 위해 청부 길드에 의뢰를 했던 것까지도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하지만 아마란스는 에일이 나이트메어의 길드원과 우연히 만났다는 것만으로 완전히 손을 떼고 포기했다고 했다.

과연 아마란스답게 유별난 조심성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의뢰를 진행했다면 에일은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언제까지고 계속 잡아 두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당장은 우리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을 거다. 녀석은 길드의 이름도 알릴 겸 분위기를 바꿀 만한 정도의 역할만 해 주면 돼.”

단순히 힘의 차이를 제외하더라도 그들은 정체를 숨기며 활동하려던 에일의 약점까지도 하나 쥐고 있었다.

아마 영상 수익은 올리면서도 귀찮은 일에는 엮이고 싶지 않은 듯했는데, 조용히 활동하고 싶다면 길드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 구덩이에서 뒤따라온 또 다른 길드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달려와 그를 불렀다.

“기, 길드장님! 녀석의 이름과 얼굴이 드러났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는 길드원의 말에 고딘이 물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급하게 말을 쏟아 냈다.

“그게 아닙니다! 그 녀석이 스스로 자기 정체를 공개해 버렸어요!”

“뭐, 뭐야……?”

고딘의 얼굴에 당혹감이 물들었다.

* * *

“하하… 아마 지금쯤 벙쪄 있겠지?”

주렁주렁 거미들이 매달려 있는 통로 안, 에일은 당황했을 고딘의 얼굴을 상상하며 고소를 머금었다.

에일은 방금 전 워튜브에 자신의 닉네임을 공개했고, 영상 속의 얼굴 인식을 막던 필터까지도 고스란히 해제해 버렸다.

쓸데없이 놈들에게 약점을 잡힐 바엔 먼저 공개해 버리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시기의 문제였을 뿐 본격적으로 개인에게 파급력이 생기려면 이름과 얼굴 모두 공개되었어야 했다.

당장 지금만 하더라도 예고도 없이 이루어진 에일의 정체 공개에 반응이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다만 지금은 그런 반응에 대해 신경 쓰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무사히 놈들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긴 했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에일 혼자만의 힘으로는 당연히 대항이 불가능하다.

수백 명 단위의 중견 길드.

놈들은 아마란스와는 달리 이런저런 요소에 예민하게 반응하지도 않을 것이고, 전과 같은 요행을 다시 바라기는 무리였다.

더군다나 지금 에일의 상황상, 신격이나 교단 혹은 여타 NPC들에게 뭔가를 바라기에도 무리였다.

쉽사리 해결될 만한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고, 그렇기에 에일의 머릿속은 더욱 명확해졌다.

‘끝장을 보지 않는 이상 해결이 안 나는 상황이다. 여기서 더 이상 패를 아끼는 건 무의미해.’

완전히 마음을 굳힌 에일은 화면을 조작해 메신저 기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명확히 기억해 뒀던 채널의 코드를 입력했다.

[접속 요청이 승인되었습니다.]

[‘NightMare-4918’ 채널이 연결됩니다!]

그간 사용하지 않았던 비장의 패를 꺼내 들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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