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최선의 방어란 (4)
쿠우웅!
육중한 시체 덩어리가 피분수를 내뿜으며 쓰러졌다.
시체 덩어리는 악취를 내뿜으며 바닥에 축 퍼졌고, 녀석의 몸 위에 올라타 있던 에일은 가볍게 땅 위로 내려섰다.
에일의 손에는 시체 덩어리에게서 도려낸 머리가 들려 있었고, 한껏 인상을 찌푸린 그는 머리를 옆으로 집어 던졌다.
“후, 괜히 위험하다는 게 아니었네.”
에일이 한숨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목책 너머의 안개 평원엔 온갖 위험한 몬스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을 방어전을 치를 때에는 몰려오지 않았던 녀석들이었는데, 제대로 파티를 짜고 진입해도 언제 당할지 모를 만큼 위협적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언데드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그나마 훨씬 나은 형편이었다.
일정 시간마다 평원에 출현하는 몬스터들의 개체 수가 급증하고, 급증한 언데드들이 툴리 마을로 몰려드는 것이었다.
에일의 입장에서는 주어진 시간 안에 최대한 해결을 본 뒤, 늦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방금의 그 몬스터 웨이브를 이 한가운데에서 마주했다간 아무리 에일이라 해도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에서 탐색 작업을 벌이기엔 너무 촉박한 시간대긴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는 없으니까.’
에일에게는 무려 교단의 집행관에게 직접 부여받은 단독 임무가 있었고, 결사단 추적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위험쯤은 기꺼이 감수해야 했다.
더군다나 이번엔 왕국 조사단의 의뢰까지 겹쳐 두 가지 퀘스트를 동시에 클리어할 수 있는 기회이니만큼 절대 놓칠 순 없었다.
파악!
에일은 재빨리 죽은 몬스터의 시신을 뒤적여 아이템을 챙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느긋하게 시체를 해체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지도라도 없었으면 이런 곳에 숨겨진 던전은 어떻게 찾았을지…….’
에일은 펼쳐 든 지도를 확인하며 길을 찾았다.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어찌나 안개가 심해지는지 이젠 한 치 앞도 제대로 보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아무 단서도 없이 무작정 이곳을 수색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고, 자세한 위치가 기록된 세부 지도를 지닌 에일조차도 애를 먹을 지경이었다.
다만 무조건 지형이 방해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안개의 좋은 점을 억지로나마 한 가지 찾아본다면, 언데드들도 에일이 있다는 걸 쉽게 알아채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크르르륵!
사방에서 들려오는 몬스터들의 소리가 에일의 귀를 간질였다.
사방이 탁 트인 평원임에도 안개 덕에 놈들이 에일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에일은 잔뜩 숨을 죽인 채 앞으로 나아갔고, 근거리까지 다가선 녀석들은 조용히 베어 버리며 지나갔다.
물론 제대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것은 에일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그를 먼저 포착한 언데드 몬스터들이 사납게 달려들어 전투가 대판 벌어지곤 했다.
하지만 에일은 최대한 빠르게 놈들을 처리한 뒤, 소리를 듣고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피해 다시 안개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그러길 수차례 반복한 뒤.
“분명 이 위치가 맞는데……?”
지도를 대조해 가며 이동하던 에일이 중얼거렸다.
무사히 지도가 가리키던 좌표 부근까지 도착했지만,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 탓에 가시거리가 좁혀진 건 사실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이곳은 나무 한그루 보기 힘든 황량한 평야인지라 딱히 착각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멀찍이서 들려오는 몬스터의 울음소리, 자욱하게 안개 낀 하늘, 발밑으로 느껴지는 땅바닥뿐.
‘그러면 바닥이겠네.’
에일은 곧바로 자세를 낮춘 뒤 땅바닥을 헤집어 놓았다.
지니고 있던 지도가 잘못되었을 거란 생각은 크게 하지 않았다.
이미 세베라의 성향에 대해선 기존의 정보와 저번 퀘스트로 재차 파악한 데다가, 중립적 입장에 서 있을 블러디 핸즈로서도 의뢰인인 자신을 속일 만한 이유가 없었다.
뒷골목에 자리 잡은 조직들의 평판이란 생각보다도 예민했기에, 만약 넘길 수 없는 정보였다면 아예 처음부터 교단의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바닥을 덮고 있던 흙이 에일의 손에 슥슥 쓸려 나가자, 그 아래에 있던 돌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돌바닥,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인위적인 손길이 닿은 흔적이라는 뜻이었다.
‘이 아래에 결사단원이 숨어 있겠군. 이 일의 원인도 함께.’
에일은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하자, 왜 아직까지 다른 유저들의 조사가 지지부진했는지 알 것 같았다.
수색하기 어려운 극악한 환경에 겹쳐, 지도가 아니었으면 도저히 감도 못 잡았을 위치였다.
블러디 핸즈는 어떻게 이 장소를 알아냈는지 궁금할 정도.
사실 의뢰를 한 뒤에 정보를 캐낸 속도를 보아, 이번 일이 터진 지 얼마 안 돼 이미 파악해 뒀던 정보를 그에게 넘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이제 이 단서를 어떻게 처리하냐가 문제였다.
이 아래에 숨겨진 공간이 있다는 건 확실했지만, 안으로 향하는 입구가 발견된 것은 아니었다.
‘어딘가 발동 장치가 있겠지.’
아예 엎드리다시피 한 에일은 주변 바닥을 열심히 파헤치기 시작했다.
가끔은 몸으로 때워야 할 일도 있는 법이었다.
* * *
횃불을 쥔 에일이 계단을 내려왔다.
예상대로 무늬가 달랐던 바닥 쪽에 숨겨져 있던 발동 장치를 건드리자, 아래로 통하는 통로가 나타났다.
이런 장치까지 있는 걸 보아 평범한 던전은 아닐 터.
이끼가 끼어 있는 벽과 바닥은 상당히 오래된 듯한 기색이었지만, 띄엄띄엄 횃불이 놓여 있는 것도 그렇고 명백히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지하 시설이었다.
계단의 끝에 내려선 에일은 입구로 보이는 방에 자리한 큼지막한 문을 지나 내부로 들어갔다.
이 안에 결사단원이 있을 것이었고,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지 모르는 지금.
가급적 빠르게 놈들을 추적해 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길게 늘어선 복도를 지나던 에일은 잠시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양옆으로 이어진 벽에서 눈에 띄는 문양을 발견한 탓이었다.
‘이번에도 이 상징이군…….’
검게 물든 초승달 문양, 뮤트에게 보았던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명백히 결사단을 상징하는 표식이었고, 낡은 벽만큼이나 아주 오래된 듯한 흔적으로 보아 이곳을 누가 만들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벽엔 온갖 글자와 그림들로 빼곡히 차 있었고, 반대편 벽화엔 커다란 보랏빛 뱀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에일은 그 문양이 누구를 상징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식과 하늘 공허의 신, 레녹스.
금지된 마법을 권장하는 신은 결코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탐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단마법사들이 매우 좋아하는 신격이었다.
레녹스의 세 번째 이명이 공허라는 것도 그를 신봉하게 된 이유 중 하나.
한때 먼 과거엔 공허와 관련된 금지된 마법들이 중요한 분파로서 존재했는데, 지금은 그와 관련된 마법이 모두 실전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뭐 하던 곳인지는 대충 감이 잡히네.’
꼼꼼히 벽을 살피던 에일이 생각에 잠겼다.
신격인 레녹스나 그의 교단과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결사단이 사용할 목적으로 과거에 만들었던 시설이라고 보는 편이 맞아 보였다.
잠깐 추적을 피하던 은거지인지 아니면 버려진 실험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었다가 다시 들어온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그때.
콰아아앙!
요란한 굉음과 함께 에일이 바라보고 있던 벽이 박살 났다.
벽이 산산조각 나면서 파편과 함께 망치가 날아들었지만,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에일은 미처 대응할 수 없었다.
퍼억!
묵직한 둔기의 충격에 한참을 날아간 에일이 바닥을 굴렀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강렬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적이 기습을 가해 온 상황에 벌러덩 누워 있을 수는 없는 일.
“크윽…….”
서둘러 바닥을 짚고 일어난 에일은 피가 새어 나오는 입가를 닦았다.
고작 공격 한 방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체력이 줄어들어 있었다.
“어떤 쥐새끼가 숨어들었나 했더니… 그냥 멍청한 모험가였나?”
부서진 벽 사이에서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걸걸한 목소리의 남자, 슬레지는 방금 벽을 분쇄해 버린 커다란 망치를 양손으로 들고 있었다.
“너는 결사단과 무슨 관계지?”
“뭐? 어떻게 우리에 대해 알고 있는 거냐?”
에일의 물음에 오히려 슬레지가 날 선 반응을 보이며 되물었다.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인 그의 얼굴이 있는 힘껏 찌푸려졌다.
하지만 에일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답할 뿐이었다.
“우리? 하, 이상한 수작 부리려 하지 마.”
“닥쳐! 머리를 으깨 버리기 전에 똑바로 말해라. 결사단에 대해선 어떻게 들었지? 이곳은 어떻게 찾아든 거냐?”
슬레지는 더욱 살벌한 기운을 뿜어대며 에일을 위협해 왔다.
그러자 반신반의하던 에일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분명 결사단은 금지된 ‘마법’에 발을 들인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폐쇄적 집단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는 외모로 보나 복장으로 보나 아무리 봐도 야만전사 뺨치는 작자였다.
한데 그는 결사단을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라 칭하고 있었다.
당황한 에일의 시선이 슬레지를 위아래로 훑었고, 막상 복장을 자세히 보게 되니 그가 두르고 있는 방어구에 결사단의 문장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저, 정말이잖아……? 너, 마법사였나?”
“물론이다! 나의 이 강인한 육체야말로 진정한 마법! 이쑤시개나 휘두르고 있는 네놈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마법이라는 단어에 흥분한 슬레지가 마구 삿대질하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신체 강화 마법이라도 사용하는 건가…….’
에일이 진땀을 삐질 흘렸다.
가끔 스탯을 잘못 투자해 마법사(물리)가 되어 버린 유저들의 이야기가 우스갯소리로 나돌긴 했지만, 눈앞의 상대는 작정하고 그쪽 길을 걷는 마법사였다.
직업과 스킬의 선택 폭이 다양하기로 유명한 워로드에서도 처음 보는 케이스였다.
하지만 당황도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에일은 검을 치켜세웠다.
“빨리 시작하지. 너하고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거든.”
“감히 나를 붙잡겠다고……? 아니, 그 전에 나를 붙잡아 심문한다고 입이나 뻥끗할 거 같나?”
슬레지가 가소롭다는 듯이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에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그의 반응을 넘겼다.
누구든 직접 겪어 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이단심문소까지 친히 데려가 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