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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이단심판관-97화 (97/227)

97화 최선의 방어란

해가 저물고 달빛만이 하늘을 비추는 밤.

성문의 앞에 선 에일은 잠시 주위를 돌아봤다.

방금 퀸즈 블론드에 도착한 그는 아름다운 수로 도시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여전히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근사한 모습.

하지만 밤낮의 시간대가 완전히 바뀐 지금에는 도시 곳곳에 사람의 손길이 닿은 불빛들이 켜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 불빛이 보이는 건물들과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이 밤거리를 비췄고, 평범해 보였던 길거리조차 절묘한 경관으로 만들어 냈다.

밤이 되면 어둠 속에 살아야 했던 실제 중세와 달리,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데다가 언제든 유저들의 원활한 플레이가 이루어져야 하는 워로드에서 불필요한 현실 고증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밤 풍경이 더욱 유명한 퀸즈 블론드였던 만큼 전해 듣던 이야기 그대로였다.

일부러 야경 자체를 구경하러 나온 이들도 있을 정도니, 큰 거리들은 여전히 생기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지 병력이 더 많아진 느낌인데…….’

도시의 밤거리를 순찰하는 정예병의 숫자에 에일이 생각했다.

검은 갑옷을 두른 나이트메어 직속의 정예병은 퀸즈 블론드를 보호하는 상위 NPC로,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유저가 상대하더라도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한데 그런 자들의 숫자가 늘어난 듯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에일조차도 제대로 확신하지는 못할 정도였고, 전과 그리 큰 차이가 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약간의 차이가 에일의 감을 조금씩 건드렸다.

병력 재배치 혹은 자체 증원 어느 쪽이건 간에,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었다면 해석할 여지는 많은 움직임이었다.

다만 에일의 정보망 내에서는 이와 관련되어 별 이야기가 없었고,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이곳까지 찾아온 용건을 위해 에일은 다리 하나를 넘어갔다.

그리고 강물이 흐르는 수로의 옆길, 비교적 인적 드문 골목길에 들어선 에일은 길가의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을 무렵.

뒤에서 불쑥 나타난 신형이 에일의 옆자리에 대뜸 앉았다.

“이거 오랜만이네. 네 쪽에서 먼저 찾아와 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붉은 머리의 여인.

강가를 비추던 등불의 빛에 그녀의 낯익은 얼굴이 비춰졌다.

블러디 핸즈의 지부장, 세베라였다.

“이쪽도 한창 바쁠 지부장이 직접 마중 나올 줄은 몰랐는데.”

“교단을 대표해서 온 의뢰인을 맞이하는 건데 아무나 보낼 수야 있나. 그나저나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는걸. 최소한 애송이 냄새는 없어졌어.”

에일의 모습을 살펴본 그녀가 선심 쓰듯 말했다.

하지만 에일은 시큰둥한 태도로 답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별말씀을.”

품속에서 손을 빼든 세베라가 편지 한 장을 팔락였다.

미리 이번 의뢰에 대한 내용을 담아 보냈던 에일의 서신이었다.

“본론은 빠를수록 좋겠지? 금지된 마법에 손을 댄 이단마법사를 추적해 달라는 의뢰. 결코 간단한 건은 아니야.”

그녀의 말에 에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지에 숨어든 이단마법사.

교단이 그런 이들을 사냥하는 데 도가 트기는 했지만, 당장은 황혼회 척살을 위해 움직일 수 없는 이상, 아무래도 같은 음지에 있는 이들에게 추적을 의뢰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블러디 핸즈에게 의뢰를 맡기려면 높은 비용이 문제이긴 했지만, 교단의 임무를 수행하는 만큼 이번 대금에 관해서는 이단심문소에서 부담할 것이라 큰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일에겐 꼭 추적에 관련된 일이 아니더라도, 블러디 핸즈를 찾아왔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뮤트라는 이단마법사가 마력이 담긴 검은 돌… 사령석을 사용하고 있었어. 금지된 마법과 확실히 관련이 있었지. 도적단들이 숨어들어 있던 동굴 안에도 사령석이 있었고. 놈들과 저번 의뢰는 무슨 관련이 있는 거지?”

“미안하지만 의뢰했던 일은 거기까지가 아니잖아? 그 질문은 의뢰 범위를 벗어났어. 돈 몇 푼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고개를 저은 세베라는 파이프를 물었다.

“교단과 굳이 척을 지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이쪽에도 사정이 있어서 깊이 관여할 수가 없거든. 하드록 동굴에서도 그깟 도적들을 상대하는 데 괜히 너희를 고용한 게 아니야.”

“그런 거였나…….”

그동안 에일은 그들이 처음 자신에게 의뢰를 맡긴 이유에 대해서 마땅한 추측을 해내지 못했다.

블러디 핸즈만 한 조직에서 조그만 도적단 처리를 왜 굳이 외부의 모험가에게 맡긴 건지 의문이었는데, 이제는 감이 잡혔다.

‘아직 노선을 정하지 않았다는 거겠지.’

블러디 핸즈는 가급적이면 이번 일에 대해 직접적인 개입을 피하는 모습을 취하는 듯했다.

큼지막한 월드 퀘스트가 진행 중인 상황 속에서 양쪽 길 사이에 자리해 어느 쪽이건 갈아탈 수 있도록 줄타기를 하려는 심산.

퀘스트가 차근차근 진행되면서 정보 사이트에서도 서서히 풀리고 있는 정보들에 따르면, 이번 월드 퀘스트의 세력 구도와 진행 방향이 두 가지 분기로 나뉘고 있다고 들은 바 있었기에 에일은 곧장 눈치챌 수 있었다.

결사단인지 아니면 그 너머의 무언가인지는 몰라도, 아직 이번 일의 배후와 깊은 분쟁은 피하는 모습이었다.

더 이상의 정보에 대해선 에일이 직접 해결해야 한다는 뜻.

피식 웃어 보인 세베라는 다시 원래 맡았던 의뢰로 돌아와 그에게 정보를 던져 주었다.

“이건…….”

세베라가 건넨 조각 지도를 받아든 에일이 눈가를 좁혔다.

십자 모양으로 낸 칼자국이 지도의 위치 한 곳을 표시하고 있었다.

“뮤트라던 그 이단 마법사는 아니지만, 녀석의 동료가 이곳 지하에 틀어박혀 있어. 정체 모를 마법의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말이야. 던전 안에서 정확히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듣는 귀가 있다면 대강 예상은 할 수 있겠지. 어때, 이만하면 이번 의뢰의 답으로 충분한가?”

지도로 표시된 곳으로 보아, 이곳 퀸즈 블론드에서부터 약간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특히 요즘 말이 많은 툴리 마을 부근에 있었는데, 툴리 마을은 며칠 전부터 대량의 언데드들이 나타나 습격 이벤트가 벌어진 곳이었다.

주로 퀘스트를 노리고 찾아온 40레벨대 유저들이 몬스터들을 상대로 방어전을 펼치고 있었고, 마을을 둘러싼 전투가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또 다른 결사단원의 위치… 방어전과 관련이 있나 보군.’

재빨리 지도의 위치를 머릿속에 집어넣은 에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실한 정보를 얻었으니, 행동은 빠를수록 좋다.

“충분해.”

* * *

변방의 평화로운 작은 마을이었던 툴리 마을.

하지만 최근 들어서 그곳에 이벤트가 발생하며 격렬한 방어전이 치러지고 있었고, 평원 지대와 통하는 입구엔 높은 목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임시로 만든 방어 시설이라고는 해도, 급하게 만든 것치고 제법 모양새를 갖춘 모습이었다.

다만 지금은 격렬했던 전투의 여파로 곳곳이 부서져 있었다.

널브러졌던 언데드들의 시체는 이제야 모두 치워졌고, 피와 살점을 비롯한 흔적은 아직도 여기저기 눌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흔적들 사이.

목책의 위아래로 꽤 많은 숫자의 유저가 휴식을 취하며 제각기 모여 앉아 있었다.

모두 이제 막 전투를 치른 탓에 기진맥진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봐, 네 쪽은 뭐 좀 챙겼어?”

“당연하지. 경험치 전리품 둘 다 짭짤해.”

“후, 확실히 보상이 좋긴 한데… 전투마다 죽는 유저도 조금씩 늘어나고,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어.”

“그거야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당장 주변에 이만한 사냥터 없을걸. 복잡한 퀘스트 병행하느라 골머리 썩을 일도 없고 말이야.”

목책에 기댄 채 앉아 있는 남자가 히죽거리며 대검을 손질했다.

좀 전의 방어전에서 적잖은 전공을 올린 그는 레벨 업까지 얼마 남지 않은 탓에 기분이 올라 있었다.

하지만 건너편의 동료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장엔 좋기야 하지만. 분명 이대로 가다간 오래 못 버틸걸.”

점점 습격해 오는 언데드 몬스터들의 개체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올라가는 난이도에 비해, 방어전에 참가하는 유저의 수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거기다 참가하는 유저들조차 퀘스트의 보상이 탐내는 사람뿐, 마을을 위해 필사적으로 막아야 할 이유는 거의 없었다.

일단 규모부터 상당히 작은 편인 마을인 이곳은 상인 유저들이 탐낼 만한 특산품도 없고, 다른 거점들과 한참 동떨어진 채 구석 쪽에 자리해 있었다.

중요한 NPC들이 있어 쓸 만한 퀘스트들이 많이 생겨나는 곳도 아니었고, 지리적으로도 불리해 더더욱 많이 찾지 않게 되는 마을.

그 말은 곧 마을에서 발생하는 수익이 적다는 것이었고, 명목상 이 마을을 소유 중인 대형 길드도 현재 마을을 반쯤 내버려 둔 채 방치 중이었다.

소속 길드원을 배치해 둘 경우 불필요한 인력 손실이 일어나고, 경비를 서는 NPC들조차도 다 유지비가 들어가니, 계륵 같은 곳이었다.

대개 하나하나가 매우 소중한 워로드의 거점 지역치고는 정말 몇 안 되는 경우.

“방어전 퀘스트도 최소한 마을이 살아는 있을 때 발생하는 거니까. 지금 이러는 것도 몇 번 안 남았을지 몰라.”

“으음……. 그렇다고 우리한테 마땅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잖아?”

“그러게나 말이다. 이 많은 언데드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목책 너머의 안개 낀 평원에서 몰려드는 언데드 몬스터들.

끝도 없이 발생하는 놈들의 원인 조사를 위해 몇몇이 몬스터를 뚫고 평원으로 나가 봤지만, 뭔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저 지하에서 땅을 뚫고 나올 뿐.

평원 주변에 특별한 시설이 있다거나, 장소의 배경이 오래된 과거의 전쟁터였다든가 하는 것도 아니었다.

호기심에 들러본 고레벨 유저들도 끊임없이 몰려든 언데드들에 질려 잠깐 거들어 주고 지나갔을 뿐.

특출한 드랍 아이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레벨 몬스터를 상대로 싸워 봐야 시간 낭비밖에는 되지 않으니 당연히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길드나 왕국군이 팔 걷고 나서지 않는 이상에야 방법이 없는 상황.“뭐 어때, 우리야 보상이나 잘 챙겨 가면 되는 거니까.”

“음… 맞는 말이야.”

피식 웃은 남자가 방금의 고민이 무색하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가다간 마을이 위험하겠지만, 단지 퀘스트를 위해 찾아온 유저들의 입장에서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처럼 마을이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는 것도 평소 유저들의 눈에 띄지 않아서 그렇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고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때, 목책 위에서 외쳐오는 소리가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놈들이 온다!”

“전투 준비! 다들 자리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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