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인맥도 실력이다 (4)
딸깍 딸깍!
우진은 자신의 구닥다리 컴퓨터 앞에 앉아 바쁘게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었다.
2020년대도 아니고 요즘 세상에 누가 저런 걸 쓰냐며, 폐품 소리를 듣는 768기가짜리 램 2개가 달린 본체.
없는 살림에 최대한 값싸게 중고로 샀던 녀석이었는데, 그래도 인터넷 서핑 정도는 무난하게 가능했다.
전에 했던 영상 편집과 업로드도 이 녀석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역시 반응이 엄청나네…….”
댓글을 확인하던 우진이 중얼거렸다.
그는 메일로 보내온 영상을 보자마자 대박을 직감했었고, 예상대로 뜨거운 반응이 쏟아지고 있었다.
채널에 업로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워튜브 실시간 인기 동영상 20위권을 돌파했고, 고작 영상 두 개가 전부인 채널에 구독자가 수십만 단위로 급속도로 불어나고 있었다.
그동안 돌았던 커뮤니티들의 입소문 덕에 초기 홍보 같은 것도 필요 없었다.
이번 반응이 워낙 좋아 워튜브 계정으로 다수의 길드에게서 영입 제안이 왔고, 어느 정도 눈여겨볼 만한 중견 길드를 넘어서 12강 길드에서조차 그에게 접촉해 왔다.
나이더스와 붉은 달.
발빠르게 우진에게 영입을 제안해 온 두 길드의 이름이었다.
우선 나이더스 길드는 12강 중 가장 많은 직속 길드원을 지닌 길드답게, 최대한 덩치 불리는 데 힘을 쏟는 곳이니 이상할 건 없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길드 수준이 있기에 어중이떠중이들의 가입을 받는 건 아니었지만, 가장 기준이 널널한 편인 건 사실이었다.
그다음은 붉은 달 길드.
아무에게나 가입을 제안할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접근해 온 이유는 어렵지 않게 추측 가능했다.
얼마 전, 학살 길드 주도의 방해로 안기오스 레이드에 실패하고 큰 타격을 입더니, 영입을 비롯해 여러 방면에서 이미지 쇄신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길드라…….’
일단 두 길드 모두 그를 일반적인 직속 길드원으로 영입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전적으로 개인 활동을 보장하고 지원을 제공하는 대신, 자신들의 길드 마크를 달게 만드는 스폰서 개념이었다.
우진의 레벨이 아직 한참 낮고, 길드 활동을 하기 어려운 빛의 교단 소속이라는 건 그들도 영상을 통해 알고 있을 테니, 그런 방식을 택하는 것이 당연했다.
인제 와서 교단 소속을 포기할 리 없는 에일의 입장에서도 그 부분이 그나마 받아들일 만한 제안이기도 했다.
워로드의 12강 길드라면 결코 계약 조건의 수준이 떨어질 일은 없을 터.
하지만 우진은 굳이 생각할 것도 없이 두 제안 사항을 모두 기각했다.
몸값이 아직 한참 낮은 이 시점에, 쓸데없이 특정 소속에 묶여 줄 필요성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하나 지금은 그들에게 제안이 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큰 의미였다.
완전히 넘볼 수 없는 위치의 6대 길드 정도를 제외한다면, 12강 길드는 워로드 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들이었고 대륙 패권에도 그만한 영향을 미치는 곳이었다.
그런 길드에서 우진의 영상이 업로드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먼저 연락을 해 왔다는 건, 그만큼 그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뜻이었다.
일반 유저들이 아닌 상위 길드이 그런 평가를 내린 것만 봐도 처음 세웠던 에일의 계획이 충분히 먹혀들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6대 길드에선 고작 이 정도 이슈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듯했지만, 그쪽이야 애초에 기대도 안 하던 부분이었다.
아직은 차분하게 여러모로 더욱 쌓아 나가야 할 시점이었고, 굳이 급해질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효과를 얻어낸 부분도 있었다.
전 세계를 아울러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시장이 되어 버린 워로드의 특성상, 이런 류의 화제는 단순히 관심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플레이어의 유명세는 곧 돈으로 연결되었다.
영상의 조회수와 광고 수익으로 수입을 올린 우진은 벌써 적지 않은 정산금 수령이 가능했다.
‘이번 영상만 벌써 백만을 넘었어……. 이 추세만 유지해도 엄청나겠는데.’
워튜브의 수익 산출 방식은 여러 변수에 따라 뒤바뀌긴 했지만, 일반적으로 조회수 하나당 1원가량의 정산금이 떨어졌다.
아직 영상이 두 개뿐이라 그렇지, 이대로만 영상의 수가 늘어난다면 놀랄 만한 수익이 발생할 만한 지표였다.
거기다 언제 생겨난 건지 팬들이 자신을 위해 남긴 후원금까지도 차근차근 쌓여 있었다.
당장 벌어들인 돈만 해도 이번 달 생활비는 메꾸고도 남을 정도였다.
게임에 집중할 수 없도록 발목을 잡힐 수 있던 현실적인 부담을 장기적으로 덜어낼 수 있는 방안이 생긴 것이었으니 당연히 기쁜 일이었다.
다만 아까부터 걸리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거 완전히 내가 가볍게 이겨 놓은 것처럼 되어 버려서는…….’
반응을 확인하고 있던 우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서로의 전력을 숨기는 편집 과정에서 누락된 과정이 몇몇 존재했고, 대부분의 유저가 이단심판관의 완승으로 착각한 것이다.
뭐, 자신을 찬양하며 높이 사는 이들이 있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탓에 로덴의 실력을 깎아내리며 폄하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 전투를 영상에 사용하겠다고 허락은 받아 뒀지만,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던바.
우진은 로덴에게 메신저를 통해 사과라도 전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며 웃어넘기며 오히려 승자의 권리라며 즐기라고 할 뿐이었다.
아르메니아의 유명 스타이자 하이 랭커로 지내던 경험이 있으니 이런 일에도 익숙한 모양이었다.
지금 잠깐 몇몇 악성 유저가 물고 뜯어 봐야, 나중에 본실력을 보이면 다시 얼굴에 철판을 깐 뒤 자신을 찬양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확실히… 그런 멘탈은 본받아야겠어.’
지금이야 얼굴과 닉네임까지 숨기고 활동한다 해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
유명세가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랭커로서 활동하기 위해선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멘탈이 필수였다.
‘그나저나 진짜 대단하단 말이지.’
우진은 이번에 업로드했던 영상을 다시 재생해 보았다.
버려진 사원의 아래, 지하 던전으로 입장하는 에일의 모습으로 시작된 영상.
유저들에게 생소한 신규 던전의 등장과 맞물려, 화려한 전투 장면에 완벽하다 싶을 만큼 적절한 편집과 연출이 가미되었다.
우진이 따로 퀘스트와 관련되거나 전력을 숨겨 달라고 요청한 적도 없었는데, 아주 정확하게 민감한 부분들을 쳐내며 영상은 끊기는 느낌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져 나갔다.
블러디직 스튜디오가 맡은 만큼, 역시나 명불허전이었다.
세계 최고의 영상 편집가, 덱스터.
아무리 이름난 워로드의 랭커들이 달라붙어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컨셉이라면 가차 없이 내쳐 버릴 만큼 깐깐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어째서 자신의 영상은 아무 말도 없이 맡아 준 건지 의문이었다.
심지어 워로드의 영상 쪽에서 가장 유명한 편집가인 만큼, 아무래도 우진에게 가장 문제였던 건 지불해야 할 비용이었다.
블러디직에게 의뢰를 맡기는 것은 한두 푼으로 될 일이 아니었고, 한두 번 제작하는 것으로 끝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영상을 받고 난 뒤, 덱스터 쪽에서 먼저 색다른 제안을 해 왔다.
광고 및 영상 조회 등으로 얻은 수익의 일정 퍼센티지만 떼어가는 인센티브 방식.
원래의 덱스터로서는 한 번도 제안해 본 적 없는 파격적인 제안임은 물론, 그의 몫으로 나뉜 비율도 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진은 당연히 그 제안을 수락했다.
계약대로 그가 정산 수익의 일부분을 떼가야 했지만, 영상의 퀄리티를 보면 전혀 개의치 않을 정도였다.
애초에 돈으로 했다면 의뢰 비용이 훨씬 더 들었을 테고, 덱스터도 당장의 이득보다는 조금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고 인센티브 방식을 제안한 것일 것이다.
거기다 영상의 정산금은 우진의 수익이었지만 동시에 일부는 그의 수익이기도 하니, 단순 제작자의 입장을 넘어서 덱스터 역시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영상을 제작할 것이다.
그때,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고 에일은 알리사에게 걸려온 전화를 재빨리 받아들었다.
- 축하해요. 반응이 좋은데요?
“좋은 정도가 아니죠. 이게 다 알리사 님 덕분인데요. 설마 소개해 주신다는 곳이 블러디직 스튜디오일 줄이야. 까다롭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대체 어떻게 설득하신 건지…….”
- 설득이요? 전혀요.
우진의 말에 알리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 저는 그냥 말 그대로 소개를 해 줬을 뿐이에요. 그분이 정말 제 부탁만으로 이번 일을 받아들였을 거라 생각하세요?
“그렇다면…….”
- 덱스터 씨는 일단 자기 마음에 안 차면 무슨 일이 있어도 꿈쩍도 안 할 사람인걸요. 제가 아무리 다리를 붙잡고 늘어진다 한들 마찬가지죠. 에일 님 영상이 그만큼 가능성을 보였기에 계약을 받아들인 거예요.
그녀의 말대로 소개는 단지 소개였을 뿐.
인센티브 방식을 처음으로 꺼내든 건 에일의 사정을 알고 있는 알리사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지만, 덱스터가 흔쾌히 그 방식을 받아들인 건 에일이 보내온 플레이 영상을 보고 난 뒤였다.
실제로 자원봉사자도 아닌 덱스터가 그녀의 부탁만으로 제안을 받아들였을 리는 없었고, 원본 영상에서부터 쓸 만한 느낌을 받았기에 수락한 것일 터.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에일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진 않았다.
‘정말 그게 전부일지는 의문이란 말이지…….’
스스로 보기에도 촬영해 두었던 자신의 영상이 쓸 만한 건 사실이었다.
색다른 컨셉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둔 뒤였고 시기도 잘 탄 데다가, 3대 게임 출신의 전 하이 랭커가 등장하기까지 했다.
더군다나 새로운 얼굴과 컨셉에 목말랐다던 덱스터의 입장에서 에일의 영상은 욕심이 날 법도 했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편집자가 아니었고, 이미 정점의 자리에 서 있는 최고의 편집자였다.
그런 덱스터가 아직 영상 두 개가 전부인 에일과 인센티브 방식까지 채택해 가며 장기 계약을 맺은 데 과연 그녀의 영향이 전혀 없었을까.
거기다 결국 이런 엄청난 기회를 만들어 준 건 그녀의 덕이었다.
손꼽히는 유명 랭커들도 연락이 주고받기 쉽지 않은 덱스터에게 누군가를 소개해 줄 만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데다가, 따로 제안까지 건넨 그녀에 대해서도 작은 의문이 생겼다.
대체 어떤 수를 쓴 건지 궁금했지만, 그에 대해선 알리사는 도통 어떤 말도 해 주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말을 슬쩍 돌리며 꺼리는 듯한 낌새.
‘굳이 캐물을 필요는… 없겠지.’
우진은 더 이상 그와 관련된 것들을 묻지 않았다.
그녀가 처음 자신을 만났을 때 그러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