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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이단심판관-94화 (94/227)

94화 인맥도 실력이다 (2)

인근 도시에 도착한 에일은 그간 얻어 둔 아이템들의 처분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골동품들을 감정소에 맡긴 뒤, 상점에 들른 그는 굳이 경매장에 올릴 필요 없는 저가의 싸구려 장비 아이템과 함께 잡템들을 팔아넘겼다.

싸구려긴 해도 장비 아이템들이 섞인 데다가 잡템을 비롯해 워낙 얻어 둔 양이 많아 제법 괜찮은 돈이 그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다음은 경매장.

쓸 만한 가치를 지녀 따로 남겨 둔 장비 아이템들을 적당한 가격대로 설정한 뒤 경매장에 등록했다.

경매장마다 다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최대로 물품을 등록할 수 있는 개수 제한도 있었으니, 너무 설정 가격대를 높게 올렸다가 팔리지도 않은 채 공간만 차지한다면 손해 볼 여지가 있었다.

‘이제 이걸 어떻게 처리하냐가 문제인데…….’

에일이 인벤토리 한쪽에 가득 쌓여 있는 토륨 주괴를 바라봤다.

한두 개도 아니고 이 정도 수량이라면 비싼 금속이라고 대충 내다 팔 수는 없었다.

경매장 시스템에서 지원되는 토륨 주괴의 시세 변동 추이.

몇 주 전 급등하던 때에 비해선 한풀 꺾이긴 했지만, 여전히 조그맣게나마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제 이 가격대에서 주괴들을 팔 것인지, 아니면 창고에 쌓아 둔 채 타이밍을 볼 것인지.

에일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장난질을 쳐 놓은 가격대라면 당장 처분하는 게 맞지만……. 아직 그쪽 인간들이 개입한 수준은 아니군.’

그간의 변동 폭을 보아 인위적인 사재기나 시세 조작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설령 사재기 작업이 있었다 하더라도 개인이 도박하듯 투자한 것이 전부인 수준.

처음 갑작스레 상승세를 탔던 원인을 모르니, 경매장 시세 차익으로 먹고사는 ‘꾼’들도 아직 본격적으로 나서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에일은 어렴풋이나마 처음 급등한 원인을 추측하고 있었다.

결사단의 마법사인 뮤트가 점거했던 제단 아래, 그곳에서 발견된 대량의 주괴들.

분명히 월드 퀘스트와 관련성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토륨 주괴의 시세가 뛴 시점도 기존의 월드 퀘스트가 마무리된 뒤, 새로운 챕터로 넘어갈 시기와 거의 일치했다.

거기에 만약 가설이 맞아떨어진다면, 이번 월드 퀘스트는 이제 막 초입부에 진입한 시점이었고, 수요가 더 올라갈 가능성이 커 보였다.

물론 확신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마침내 에일은 결정을 내렸다.

‘일단 버텨 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경매장에서 나온 에일은 지니고 있던 토륨 주괴들을 전부 창고에 집어넣었다.

가격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위험성 또한 고려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다양한 방면에 사용되는 토륨 주괴는 기본적으로 꾸준히 수요가 있는 편이었고, 일정치 미만으로 대폭 추락할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했다.

‘물론 추가 매입까지 하기는 조금 그렇고… 이쯤이면 되겠지.’

무리하지만 않는다면 해 볼 만한 투자, 딱 그 정도였다.

에일은 수북히 쌓인 주괴들을 옮기느라 끙끙대는 창고 관리인을 뒤로하고, 마침 시간이 된 것을 확인하고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에일 님! 여깁니다!”

“기다리고 계셨어요? 시간보다 조금 일찍 왔는데 금방 끝나셨네요.”

“저야 뭐 가지고 있던 아이템들만 싹 팔아 버리면 끝이었으니까요. 그나저나 갑자기 자금이 이렇게 넉넉히 생겨 버렸네요. 조만간 자금 한 번 땡겨 올 생각이었는데 미뤄도 되겠네.”

만족한 듯한 표정의 로덴이 말했다.

비록 워로드에 비하면 시장이 비교적 작았다고는 해도, 3대 게임이었던 아르메니아에서 유명한 하이랭커로 활동한 로덴은 당연히 당시에 엄청난 돈을 벌어 놨을 것이었다.

자금을 땡겨 온다는 말은 현금을 투자해 게임 내 자본을 마련한다는 것일 테고, 게임에 총력을 다해야 하는 랭커들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생활비도 아껴 써야 하는 에일에게는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물론 이번 수확으로 가용 자금이 넉넉해진 것은 에일도 마찬가지였다.

곧 경매장에서 아이템들이 판매되어 수중에 들어올 골드까지 생각하면, 일부는 생활비로 사용하기 위해 바깥으로 빼내도 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에일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고, 게임 내 골드를 빼서 현실에서 사용하기엔 너무 이른 시점이었다.

아주 적은 수준이라 해도 환전 과정에서 수수료까지 붙으니 섣불리 결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세요?”

“락포터로 가 볼 생각입니다. 대도시에 들러야 할 일이 생겨서……. 여기서 멀지 않으니 금방 도착하겠죠. 에일 님은 퀸즈 블론드로 돌아가신다면서요?”

“네, 중요한 퀘스트 때문에요.”

“거기서 처음 에일 님 흔적이 찍혔던 걸로 기억하는데……. 또 사람 하나 태우러 가는 건 아니죠?”

“글쎄요.”

농담을 던지는 로덴의 말에 에일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확실히 그가 처음 사람들에게 알려진 계기는 퀸즈 블론드에서의 일이었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물론 아직 골동품의 감정이 끝나지 않았기에 바로 출발할 건 아니었지만.

친구 등록이야 마차를 타고 오는 길에 이미 해 뒀고, 그들은 인사를 마치고 서로 미련 없이 작별을 나누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대련해 주셔야 하는 거 잊지 마세요.”

“하하, 명심하죠.”

* * *

“진부해……. 이런 쓰레기들로 뭘 만들라는 건지.”

멍한 눈빛의 남자가 턱을 괸 채 눈앞의 화면을 바라봤다.

워로드의 플레이 영상이 켜진 대형 스크린에서는 박진감 넘치는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저 따분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끼이익.

남자는 곧 영상에 흥미를 잃고서, 뒤로 젖힌 의자에 몸을 기댔다.

지저분한 수염 자국이 가득한 남자는 덥수룩한 머리를 헝클어뜨려 놓은 채 후줄근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30대 중후반의 백수 같은 모습.

하지만 반면,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온갖 고가의 장비들이 늘어선 작업실이었다.

블러디직 스튜디오.

워로드를 넘어, 가상현실 게임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던 플레이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게임 시장이 과거에 비해 차원이 다르도록 급성장함에 따라, 전면에 선 네임드 플레이어들은 물론 보조적인 역할에 선 사람들까지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중 영상 편집 분야에서는 덱스터라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전문가 한 명이 대표적이었는데, 블러디직이 바로 그가 지니고 있는 1인 스튜디오의 명칭이었다.

과장을 보태 유치원생들의 소꿉놀이도 그의 손만 거치면 박진감 넘치는 블록버스터 단편 영화가 되어 버린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이 시장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영상 제작과 다르게 워로드에서 좋은 영상을 뽑아내려면 게임에 대한 높은 이해가 필수였고, 특히나 최상위 유저들은 자신의 전력이 누출되는 것을 피해야 했기에 적당히 스킬과 움직임을 숨겨 줄 줄 아는 센스가 필요했다.

경우에 따라 원본 영상에 들어가 있는 중요한 퀘스트나 길드의 정보 또한 마찬가지로 숨겨야 했고, 그렇기에 입이 무겁다는 신뢰성까지 갖춰야 했다.

물론 앞의 요소들을 모두 갖췄다 한들, 타고난 편집 기술을 갖추지 못했다면 모두 부질없는 일이었고, 같은 시장 안에서는 도저히 덱스터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최고의 실력을 가진 그에겐 언제나 수많은 요청이 쏟아졌다.

혜성처럼 등장한 워로드가 다른 게임들을 모조리 흡수한 뒤, 가상현실 게임 시장은 과거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덩치가 불어났고, 그에 따라 실력만큼이나 사람들의 이목을 이끌어 내는 스타성이 중요해졌다.

많은 팬덤과 영향력은 단지 외부에서 얻는 수입뿐 아니라, 게임 내적으로도 직접적인 영향을 줄 만큼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유저의 스타성이란 실력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 워로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6대 길드장들만 해도 손꼽히는 미남미녀들뿐.

물론 압도적인 실력과 세력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역대 모든 가상현실 게임을 통틀어도 범접할 수 없는 그들의 인기엔, 여러 외적인 요소 또한 작용되었을 거란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이렇듯 자연히 영상을 통한 마케팅의 중요성도 커지며, 편집 기술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다.

랭커들이 전력 노출의 위험이 있음에도 괜히 영상 업로드에 손을 대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날아드는 수천 수백의 영상을 보고 있자면 그의 눈에 차는 건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이런 폐급 재료들만을 사용해서는 도저히 자신이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때문에 덱스터는 엄청난 돈을 제안하는 하이 랭커들의 제안조차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가차 없이 거절했고, 심지어 너무 익숙한 얼굴이라 식상하다는 이유를 붙여 거절한 적도 있었다.

자신에게 의뢰를 할 만큼 돈만 많은 금수저들의 어설픈 랭커 흉내, 혹은 이미 뻔한 얼굴이 되어 버린 랭커와 네임드 유저들의 양산형 PVP 영상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주는 건 이제 지긋지긋했다.

매너리즘에 빠져 버린 지금, 그에겐 좀 더 새롭고 신선한 자극이 필요했다.

띠리리링!

테이블 위에 있던 그의 핸드폰이 세차게 울렸다.

작업실에 멍하니 앉아 있던 덱스터는 의자를 빙그르르 돌리며 느릿느릿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귀찮게 전화하지 말고 문자로만 연락하라니까…….”

그는 귀찮음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막상 화면에 떠 있는 번호를 확인한 덱스터는 깜짝 놀라 파묻었던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무… 무슨?”

전화로 인한 짜증이 싹 날아가 버린 덱스터는 눈을 여러 번 끔뻑였다.

혹시 잘못 봤나 싶어 자신의 눈을 의심했지만, 정말 ‘그녀’의 연락이었다.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상황에 그는 허겁지겁 전화를 받아들었다.

- 오랜만이에요, 덱스터.

“세상에. 정말이잖아. 대체 어쩐 일이야?”

낯익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덱스터가 물어왔다.

평소에 보이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반가움과 당혹감이 섞여 어쩔 줄 모르는 태도였다.

워로드의 하이 랭커들을 앞두고도 항상 시큰둥하던 그가 누군가에게 이런 모습을 보일 거라고는 사람들은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보다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하지? 예전 닉네임은…….”

- 알리사예요.

싱긋 웃은 알리사는 말을 이었다.

- 그리고 부탁드릴 게 한 가지 있는데, 괜찮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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