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결사단 (5)
끼릭끼릭.
상자 앞에 쭈그려 앉은 로덴이 바닥에 락픽 도구를 늘어놓은 채 씨름하고 있었다.
전리품이 들어 있을 보물 상자에 강력한 잠금장치가 걸려 있던 탓이었다.
그는 텐셔너를 걸어 둔 상자의 열쇠 구멍을 이리저리 쑤셔가며 살살 긁었고, 에일은 잠자코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았다.
에일도 이런 상황에 대비해 여분의 락픽은 챙기고 있었지만, 잠금 해제 작업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은 없어 자신은 없던바.
그가 머뭇거리던 사이에, 로덴은 스스로 전문가를 자처하며 해제 작업에 나섰다.
“어떻게… 좀 가능할 것 같아요?”
“글쎄, 걱정 붙들어 매고 저만 믿으세요. 이래 봬도 제가 이런 쪽으로도 재능이 있어서… 됐다!”
딸깍 소리가 나며 상자의 잠금장치가 해제되었다.
감탄사를 내뱉는 에일을 뒤로한 채, 로덴은 곧바로 상자를 열었고 그 안의 내용물들을 눈에 담았다.
“이건……!”
“으음?”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물에 둘의 표정에 의문이 차올랐다.
큼지막한 상자 안에 있던 건 무기나 방어구가 아니었고, 스킬북이나 장신구, 금화도 아니었다.
토륨 주괴.
은은한 녹색 빛을 띠는 희귀 금속이 주괴로 가공된 채, 상자 안에 한가득 쌓여 있었다.
“뭐지…….”
그들은 잠시 멈춰선 채 눈을 끔뻑였다.
내용물에 실망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토륨 주괴라면 분명 금고 안에 따로 보관해 두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귀중한 값어치를 지닌 금속이었다.
하지만 악마를 추종하는 광신도들이 던전 안에 토륨 주괴를 뭐 하러 이렇게 모아 뒀는지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몇 주 전부터 토륨 주괴의 수요가 급증해서 시세가 뛰었다던데, 뭔가 관련이 있는 건가…….’
일반적으로 토륨이 지닌 가장 큰 특성이라면 전도성이 좋아 마력을 깃들게 하기 좋은 금속이라는 것.
그리고 장비와 장신구 등을 포함해 유저들 사이에서 폭넓게 사용되고, 주로 북부 지역 위주로 산출된다는 것뿐.
하지만 단순히 그런 사실들의 나열만으로는 이 금속과 광신도들과의 관계성을 파악하기는커녕,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누가 주체로 모아 놓은 것인지도 아직 불확실했다.
광신도들이 필요해 구매한 게 아니라, 결사단에서 나온 뮤트의 요청에 의해 준비해 놓은 걸지도 몰랐다.
“일단… 당장 이유를 알아낼 방법은 없네요.”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고개를 끄덕인 로덴은 토륨 주괴들을 상자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잔뜩 쌓여 있는 토륨 주괴의 가치에 대해선 굳이 말할 것도 없는바, 정확히 반으로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그들은 등을 돌려 뒤편을 바라봤다.
상자에 있던 토륨 주괴들을 제외하고도 엄청난 값어치의 아이템과 골드가 놓여 있었다.
현재 워도르에서 전체적으로 따졌을 때, 이곳은 명백한 저레벨 던전이었음에도 한가득 쌓여 있던 골드가 무려 6천이 넘었다.
당연히 그 또한 정확히 반씩 나눠 3천 골드씩 나눴고, 당장 현금으로 바꿔도 상당한 액수를 확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사장의 도살 장갑(희귀)]
[아벨리온 신발(희귀)]
에일이 가장 먼저 챙긴 아이템들은 30레벨제 희귀 등급의 경갑 방어구였다.
기존엔 약간은 애매한 느낌이 있던 장갑과 신발 부분의 두 방어구를 상위 등급으로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챙긴 것은 무기.
[처형인의 도끼]
- 등급: 영웅
- 종류: 양손 도끼
- 제한: 레벨 35 이상
- 물리 공격력 50
- 힘 +14, 체력 +4
- 특수 효과 ‘충격과 공포’: 마지막 일격으로 적을 처치하면, 주변 적들에게 공포 디버프를 부여합니다.
‘이거 굉장한 옵션이 생겼는데…….’
감탄한 에일이 도끼를 내려다봤다.
이 무기를 사용해 적을 쓰러뜨리면 주변 모든 적에게 공포 효과가 적용되는 강력한 특수 효과를 지니고 있는 녀석이었다.
더군다나 에일이 지니고 있던 기초 패시브 ‘광적인 순교자’가 공포, 위축 등의 상태 이상 효과를 2배로 적용시킨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훨씬 더 강한 효과를 뿜어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영웅 등급의 무기답게 기본 스펙 자체도 뛰어났고, 사용 가능한 레벨도 마침 딱 맞아떨어진 상태.
현재 에일이 지니고 있는 보조 옵션으로는 두말할 여지 없이 최상급의 무기였다.
‘이 정도면 대만족… 아니 그냥 대박이지.’
이번 최초 공략으로 얻은 아이템들의 향연에 에일은 즐겁게 자리를 옮겼다.
물론 지금 언급된 것보단 나머지 장비 아이템이 훨씬 많았지만, 직접 사용하기엔 모두 무리가 있는 것들이었고, 적당히 경매장에 판매할 용도였다.
“이제 남은 건… 골동품들뿐이네요.”
두리번거리던 에일이 골동품들이 쌓여 있는 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로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 저 그건 필요 없습니다. 챙기시려면 에일 님이 다 가져가세요.”
“네? 정말 그래도 되겠어요?”
“솔직히 감정 작업은 영 귀찮아서……. 시간도 잡아먹는데 여태 당첨된 적도 없어서 적자만 났습니다.”
“으음, 그러시다면야…….”
본인이 귀찮다는 데 굳이 사양할 건 없었다.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독식할 뿐.
* * *
“커흑…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을 기고 있는 광신도가 절규했다.
그릇된 신념으로 인해 악마에게 영혼까지도 기꺼이 바칠 수 있던 그였지만, 진정한 광기가 만들어 낸 극한의 공포 앞에선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하나 지금 광신도의 앞에 선 신임 심판관은 루의 신도답지 않게 심판을 내리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걸리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괜찮으신가요?”
“지, 집행관님…….”
뒤편에서 나타난 여인이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차분한 백색 갑옷을 입은 금발의 집행관, 아일린이었다.
생각지도 않게 마주친 그녀의 등장에 신임 심판관은 잔뜩 긴장하며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보였다.
“힘들어 보이시는군요. 마음속에 망설임이 생기셨나요?”
“…죄송합니다.”
“죄송한 일이 아닙니다. 해결해야 할 일일 뿐이죠.”
눈치를 보는 듯한 그의 행동에 아일린은 그저 부드러운 눈길을 던지며 말했다.
그러자 잠시 갈등하던 신임 심판관은 솔직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간 수습 기간을 거치며 많은 괴물을 베어 왔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후회도 없었습니다. 세상에 혼란을 가져다 주는 괴물들은 반드시 정화되어야 마땅하니까요. 하지만 이자는…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어리석고 무지하기에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이 제 발목을 자꾸 붙잡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형제님, 겉모습이 같다고 해서 모두 우리와 같은 길을 걷는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혹시 죄인들의 머리 위에 드리워진 이단의 낙인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미 악마의 손아귀에 넘어간 자라는 죄악의 표식입니다. 또한 여신의 명령이기도 하지요. 목 앞에 드리워진 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참회할지언정, 위기를 모면하고 뒤를 돌아서면 무고한 이들을 집어삼킬 괴물이 바로 이자들입니다.”
“하지만 이자에게는… 낙인이 찍혀 있지 않습니다.”
심판관이 쓰러져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이곳의 광신도들은 모두 일반 몬스터 취급이 되었고, 보스나 유저, 엘리트 몬스터에게만 생겨나는 이단의 낙인이 생길 리 없었다.
“여신께서 항상 모든 것을 점지해 주시진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선악을 가르는 안목을 키워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저의 안목이 언제나 옳은 길을 택할까요……? 제가 이자의 목숨을 거두어 간다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 두렵습니다.”
“이해합니다. 하나 신께서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까? 망설임에 발목을 잡혀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여신의 검이자 불꽃.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해지십시오. 어떤 결과가 따르든 그분께서 형제님과 함께하실 겁니다.”
차분하기 그지없는 아일린의 말.
검을 들고 주저하는 그를 답답하게 여길 만도 하건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꿀꺽 침을 삼킨 신임 심판관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눈이라도 질끈 감고 싶었지만, 신성한 심판을 앞두고서 그리하면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파아악!
엄청난 속도의 검격이 그를 지났고, 순식간에 광신도의 머리가 날아갔다.
깔끔히 도려져 나간 시체의 목에선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철컥!
검을 거둔 아일린이 떨리고 있는 심판관의 두 팔을 아래로 내렸다.
“물론, 오늘은 아닙니다.”
“크읏…….”
긴장이 풀린 심판관이 무기를 떨어뜨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신임 심판관의 모습에 아일린은 입을 열었다.
“자매님, 형제님을 돌봐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집행관님.”
옆에서 그녀를 보좌하고 있던 여성 심판관이 다가가 그를 부축해 나갔다.
그사이 뜨끈한 핏자국이 바닥을 적시며 신발을 더럽혔지만, 무심히 고개를 돌린 아일린은 자신을 찾아온 새로운 손님을 반겼다.
“마침 오셨군요.”
“집행관님……?”
에일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뒤엔 로덴도 평소답지 않게 바짝 긴장한 채 서 있었다.
온 곳에 불길을 놓으며 던전을 통째로 지워버리다시피 하고 있는 이단심판관들의 기행에 질겁한 탓이었다.
“임무를 기대 이상으로 훌륭히 수행하셨더군요. 물론 그 이야기에 앞서 감사의 뜻을 표해야겠죠. 덕분에 많은 형제자매님이 사악한 음모로부터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아일린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보상을 모두 챙긴 그들이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이번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대강 전해 들었는지 에일에게 감사를 표하는 모습이었다.
“아니, 그보다 갑자기 여긴 어쩐 일로……?”
에일이 버려진 사원 지역으로 출발하기 전, 이단심문소에서 아일린에게 들었던 계획에 따르면 그녀가 직접 이곳에 올 일은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아일린은 다른 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해, 타 지역으로 향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에일의 눈앞에 보이다시피 정해져 있던 그녀의 목적지가 바뀌어 있었다.
“저를 포함한 이단심문소의 다섯 집행관에게, 여신께서 내려보내신 묵시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그에 따라 이번 계획은 물론, 교단 전체의 움직임에서도 대대적인 변경점이 생겼습니다.”
‘그런…….’
집행관들에게 직접 루의 뜻이 내려왔다니,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변수였다.
계시를 통한 간접적인 개입이라 해도, 교단 전체를 움직일 정도의 수준이라면 상당한 양의 영향력 소모가 필연적으로 뒤따랐을 터.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루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떤 말씀이 있으셨길래…….”
“여신께서 저희의 검 끝이 향할 대상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베나론의 추종자들을 처단하기 위한 교단의 총력전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죄악의 무리인 핏빛 황혼회를 완전히 뿌리 뽑는 것이지요.”
베나론 그리고 총력전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멸망의 마을에서의 일이 생각난 에일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설마… 나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