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결사단 (4)
“후아!”
바닥에 주저앉아 포션을 삼킨 에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슬아슬했던 체력이 다시 최대치까지 차오르니 살 만했다.
에일은 굳이 서두를 거 없이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사령석이 파괴되면서 퍼져 나간 파동에 방 안에 있던 언데드들은 모두 쓰러진 뒤였고, 이 일을 꾸민 결사단의 마법사까지 확실히 죽은 게 확인되었기에 적대적인 자들은 더 이상 이 공간 안에 없었다.
에일은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가 로덴이 벌러덩 누워 있는 곳으로 향했다.
“로덴 님, 괜찮아요?”
“에일 님?”
누워있던 로덴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으아, 이것 좀 봐요. 몸이 아주 반쯤 구워져 가지고… 진짜 죽을 뻔했네.”
로덴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하지만 엄살은 아닌 듯, 그의 몸엔 정말 온갖 마법에 그을린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래도 무사하니 다행이네요.”
“하하, 아주 멋진 타이밍이었어요.”
에일이 뻗은 손을 잡고 로덴이 일어섰다.
정말 쉽지 않은 난이도의 전투였지만, 피해를 보거나 죽은 이 없이 멋지게 클리어해 냈다.
특히 에일의 입장에서는 많은 것을 얻어낸 상황이기도 했다.
우선 집행관에게 받았던 퀘스트를 대성공적으로 클리어해 추가 보상을 받을 수 있었고, 결사단의 음모를 저지해 개입이 없었다면 함정에 빠져 몰살당했을 교단의 심판관들까지도 대거 구해 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결실.
진행 중인 월드 퀘스트에 관한 새로운 단서를 얻어냈다는 것이다.
블러디 핸즈의 세베라로부터 시작할 수 있었던 월드 퀘스트는 고레벨 던전인 왕의 무덤에 들렀던 이후로 별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고, 더 이상의 진전 없이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거기다 도적들이 주둔해 있던 하드록 동굴에서도 사령석을 발견하긴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이 어떤 물건인지 추리해 내기는 힘들었었다.
하지만 이번 퀘스트를 클리어하며 이야기는 달라졌다.
이곳에서도 똑같이 발견된 사령석은 죽은 이들을 자유자재로 살려내고, 막대한 마력 공급 능력까지 지니고 있는 등 엄청난 효력을 지니고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더군다나 그런 사령석을 운용하는 주체가 결사단이었던 것으로 보아, 그들이 월드 퀘스트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다는 건 거의 확실해 보였다.
‘자, 이제 어쩐다…….’
에일은 이제 여기서 알아낸 사실들을 어떻게 퀘스트와 연결시켜 풀어 나갈까 머리를 굴려 가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친절하게도 루트가 하나하나 정해져 있던 과거의 온라인 게임들과는 달리, 또 다른 세계를 표방하는 가상현실 게임, 특히 워로드의 연계 퀘스트들은 알아서 이어지지 않는다.
철저히 스스로 발로 뛰며 단서를 찾고 개척해 나가야 했다.
하지만 에일이 미처 마땅한 답을 구하기 전, 로덴이 그의 어깨를 흔들며 깨웠다.
“왜… 왜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니, 그냥…….”
“뭐, 됐고요. 빨리 오세요. 여기 널린 시체들 아이템 분배해야죠.”
그의 말대로 주변을 둘러보자 광신도와 짐승들을 비롯해 언데드가 되었던 많은 몬스터의 시체가 한가득이었다.
많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려면 가급적 빨리 루팅 작업에 들어가는 것이 좋은바.
고개를 끄덕인 에일은 로덴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선 이번 루팅의 메인이자, 거리상으로도 가장 가까이에 놓여 있는 뮤트에게로 다가갔다.
이번 일들을 꾸민 데다가 상당히 애를 먹이기도 했고, 무려 결사단의 일원인 만큼 좋은 아이템을 주리라 믿었다.
하나 정작 가까이 다가가 보자, 그녀의 시체에선 루팅이 가능하다는 표시인 희미한 빛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실제로 시체를 뒤져 보았지만 루팅이 불가하다는 메시지만이 나타났을 뿐이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지… 난감하네.”
“음, 떨어뜨린 아이템이 하나도 없는 거 아닐까요?”
“그 정도로 운이 없긴 힘들 텐데요.”
“그렇긴 하지만 그것 말고는… 으악! 뭐, 뭐야!”
갑자기 뮤트의 시체가 꿈틀거리자 로덴이 펄쩍 뛰었다.
축 늘어져 있던 그녀의 팔이 움직여 에일의 멱살을 덥석 잡았다.
느닷없이 붙잡혀 버린 에일은 땅에 떨어져 있던 뮤트의 지팡이를 발로 차 멀리 보낸 뒤, 급히 무기를 뽑아 들려 했다.
설마 했는데 아직도 죽지 않았다니 징글징글할 정도였다.
하지만 뮤트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서 한 마디 말만을 내뱉었다.
“기억하고 있겠어… 에일.”
치이이익!
그 말을 마지막으로 뮤트의 몸이 급속도로 부패하며 녹아내렸다.
거무죽죽하게 녹아내린 몸에선 도무지 참기 힘든 썩은 내가 진동했다.
“이제야 죽은 건가…….”
“에라이. 마무리도 뭐 같이 하네, 정말.”
코를 부여잡은 로덴이 뒤로 물러나며 불평을 쏟아냈다.
다만 게임을 시작한 뒤, 온갖 오지의 언데드들을 위주로 상대해 왔던 에일에게 이 정도 악취는 그다지 문제 되지 않았다.
그는 선천적으로 이런 부분에 대해 민감하지 않은 편이었다.
외려 지금 에일의 신경이 쏠려 있는 곳은 그들이 쓰러뜨린 뮤트의 정체였다.
‘설마 여태 싸운 상대가 분신이었다니.’
그들이 상대한 뮤트는 처음부터 자신의 본체로 싸움에 임한 것이 아니었다.
금지된 마법으로 만들어 낸 거짓 분신이었고, 원격으로 조종하는 본체의 힘보다 훨씬 약화된 것에 불과했다.
‘기억한다, 라… 이름을 괜히 알려 준 건가. 아니, 처음부터 거짓말을 했다면 아무것도 들어내지 못했을지도.’
* * *
뮤트로 인해 한차례 소동을 겪은 뒤, 에일과 로덴은 방 안을 돌아다니며 아이템을 회수했다.
그리곤 원활한 분배 작업을 위해 이번 전투에서 획득한 전리품들을 한데 모아 정리했다.
먼저 가장 눈에 띄었던 건, 사령석에서 획득한 10개의 파편.
당장에 적혀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에일조차도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에일이 자신의 퀘스트와 관련된 아이템이라고 하자, 로덴은 흔쾌히 파편을 모두 양보했다.그가 월드 퀘스트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합당한 판단이었다.
다음은 몬스터들의 드랍한 아이템과 돈.
우선 둘의 바람이 겹치지 않는 이상 서로의 필요성에 따라 장비를 나누었고, 나머지 아이템들은 시중 가치를 따져 가며 분배를 진행했다.
‘그런데 따로 보상은 없는 건가.’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메시지창에 에일이 머리를 긁적였다.
교단과 관련되어 나름 큰 건을 해냈는데 여신은 아무런 언질이 없었다.
원래부터 루의 후원이 없었다면 모를까, 지금껏 주고받는 관계에 익숙해져 버린 에일은 살짝 서운해지려 할 정도였다.
하지만 분배 작업이 모두 끝날 때까지도 루의 전언이 없는 건 여전했고, 둘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런데 정말 여기가 던전의 끝인가……? 인간적으로 그 고생을 시켜 놓고 너무 보상이 적은 거 아닙니까?”
창에 삐딱하게 기댄 로덴이 불만을 터트리며 투덜거렸다.
에일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신규 던전의 최초 개척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특별할 것도 없이 언데드 몬스터들을 사냥해 나온 드랍 아이템 정도가 전부였는데, 이대로 흐지부지 끝난다니 허탈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아이템을 회수하면서 사방을 샅샅이 뒤져 봐도 이렇다 할 만한 건 나오지 않았었고, 어쩔 수 없이 제단의 계단을 털레털레 내려왔다.
“잠깐, 여기…….”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제단 아래에 내려온 에일과 로덴은 동시에 우뚝 멈춰 섰다.
내려온 계단의 바로 옆에 둥그런 입구가 생겨난 것이다.
입구를 발견한 그들은 머뭇거릴 거 없이 안으로 부리나케 들어갔고, 곧 화려하게 치장된 내부의 방을 볼 수 있었다.
조그만 방 안에는 커다란 상자 하나를 비롯해 테이블 위에 한가득 쌓인 금화와 장식대에 올려진 장비 아이템들로 가득했다.
“좋아, 이거지!”
“하하…….”
일명 전리품실.
호불호 없이 거의 모든 플레이어가 가장 좋아라 하는 장소였다.
이런 유의 공간이 숨겨져 있는 것이야 흔했지만, 이번엔 방 전체를 둘러쌓았던 마력의 영향인지 시간차까지 걸려 있던 모양이었다.
기다란 창이 걸려 있는 걸 본 로덴은 신나서 장식대가 서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고, 에일은 그 반대편으로 향했다.
한쪽 벽에 수북이 쌓인 골동품들.
그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에일이 물건들을 집어 가며 꼼꼼히 살펴보았다.
자신이 감정사도 아니고 당장 그것들의 가치를 알 수는 없었지만, 훼손된 부분도 거의 없었고 전반적인 퀄리티를 보아 기대를 걸 만했다.
특히 책장에 한가득 쌓인 고서들이 눈에 띄었다.
새까맣게 때가 묻어 있는 데다가 알 수 없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기는 해도, 이런 유의 고서들은 언제나 대박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일은 고개를 돌려 로덴을 바라봤다.
“그쪽은 좀 어때요?”
“어떻긴요. 딱 봐도 대박이죠, 뭐.”
정신없이 창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로덴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장식대에 걸려 있는 무기와 방어구들 모두 신규 던전을 최초 공략한 보상답게, 하나같이 잘빠진 녀석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때 정신을 차린 로덴은 잠시 창을 내려놓더니 입을 열었다.
“아까 대강 들어 보니까 교단 쪽 사람들이 왔다면서요? 위쪽은 어떻게 됐을까요.”
“그러고 보니…….”
에일이 그의 말에 이곳에 들어왔을 이단심판관들을 상기했다.
단지 결사단의 음모를 막았다는 것에만 신경이 쏠려 있었지만, 지금쯤 던전을 급습해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처음 네 개의 소환 마법진이 작동된 탓에 불어났던 몬스터의 수는 분명 엄청났었다.
하지만 지금 걱정되는 건 그쪽이 아니었다.
“끄아아악!”
아니나 다를까 던전엔 비명이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안으로 들이닥친 심판관들은 성화를 놓아 던전을 불태웠고, 언데드가 된 광신도나 몬스터들은 물론 머리 위에 이단의 표식이 나타나 있는 유저들까지 모조리 붙잡아 처형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은 악명 높은 악마 추종자들의 소굴이었고,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내통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이단의 낙인이 찍혀 있지 않은 유저마저도 후속 조사를 위해 모조리 제압한 뒤 붙잡았다.
잔뜩 겁을 먹은 유저들은 그들의 추적에서 달아나려 했지만, 레벨 수준을 훨씬 상회하는 루의 심판관들을 상대로 도망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단과 악인을 색출해 내야 하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부분이었지만, 빛의 교단이 유저들 사이에서 악명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죄인들은 무릎을 꿇어 고개를 숙이고 신께 용서를 구하라! 그대로 머리를 잘라 그분께 보내 줄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