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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이단심판관-88화 (88/227)

88화 결사단

“아… 고생하셨겠네요.”

에일은 절로 숙연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굉장한 실력의 유망 랭커였던 로덴이 갑자기 종적을 감춘 이유에 대해, 유저들 사이에서 온갖 추측이 일었었는데, 다른 이유도 아니고 설마 병역 문제였다니.

그러고 보니 그 역시 자신과 같은 한국 국적의 플레이어였다.

어쩐지 전에 비해 인상이 꽤나 달라졌다 싶었었는데, 차마 웃지도 울지도 못할 사연이었다.

“에일 님은 군대 다녀오셨어요?”

“저야 다녀왔… 제가 한국 사람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허참, 생긴 거만 봐도 딱 알죠. 그리고 한국 사람이 가상현실 게임도 잘하잖아요. 에일 님이면 무조건이죠.”

“으음, 국뽕은 자제해 주시고요.”

“국뽕이라뇨! 그런 천박한 단어를! 아르메니아에서 한국 랭커가 얼마나 많았는데요. 당장 저랑 에일 님도 한국인이고, 이스트혼의 아이메이나 뉴월드의 아쉴라도 한국인이었다던데, 이 정도면 그냥 한국인이 평균적으로 잘하는 거 맞습니다.”

로덴이 열변을 토하며 말했다.

그에 머리를 긁적인 에일은 슬쩍 말을 돌렸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로덴 님은 이번에도 랭커가 목표겠죠?”

“그거야 당연하죠.”

“쉽지는 않을 텐데요.”

“물론 쉽지 않겠죠. 하지만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아르메니아에 비해서 경쟁도 치열해진 데다가 1년이나 늦어서 많이 불리하기는 하겠지만, 그 정도야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에일 님도 당연히 랭킹 안에 드는 게 목표 아닌가요?”

“뭐, 그렇죠.”

그의 말에 에일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터무니없다고 할 수 있는 목표였지만, 당연히 랭킹권이 목표라… 나쁘지 않은 소리였다.

로덴은 피식 웃는 에일의 모습을 잠시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에일 님 의외로 정상적이시네요. 영상만 봤을 땐 완전 미친… 죄송합니다. 아무튼 특이하신 분인 줄 알았는데, 솔직히 지고 나서 어떻게 죽을까 걱정했거든요.”

로덴이 으스스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기둥에 꽁꽁 묶인 채 화형당할 걸 상상하기라도 했던 모양이었다.

“아시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서요.”

“하하, 이해합니다.”

신격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는 로덴은 교단과 신도들의 시스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도를 지니고 있었고, 그들이 유저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단심판관으로서 빛의 교단에 몸을 담고 있는 에일의 사정을 짐작하는 것도 대략이나마 가능했다.

‘그러고 보니 멸망의 마을을 클리어한 이후로는 메시지를 본 적이 없네.’

개인 인터페이스를 슬쩍 뒤져 본 에일이 생각했다.

여신의 메시지가 에일의 앞에 나타나지 않은 게 벌써 꽤 되었다.

악마종인 베나론의 하수인을 쓰러뜨리며 돌발 퀘스트로부터 파격적인 보상을 받았던 에일이었지만, 그 뒤로는 별도로 여신의 후원을 받은 적이 없었다.

‘설마 영향력을 다시 모아야 해서 그런 건가.’

워로드의 신격이 세상에 직접 개입하거나 플레이어에게 무언가를 부여하려면 그만한 영향력을 지출해야만 했다.

탐욕의 악마 베나론과 기 싸움까지 벌이고, 많은 보상이 달린 퀘스트까지 의뢰하며 루가 적잖은 양의 영향력을 소모했을 것이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겨우 그 정도로 여신이 가지고 있던 영향력을 모두 탕진했을 리는 없는데.’

워로드의 신격들이 여유가 있어서 신도들에게 퀘스트나 공헌도를 퍼주는 것이 아니었다.

신도들의 행동이 만들어 낸 결과, 그리고 그 결과가 세상에 미치는 파급력이 곧 신격이 받는 영향력이 되었다.

평범한 신도들과는 다른 존재, 사도인 에일은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더욱 많은 파급력이 뒤따르기 마련이었고, 깨어난 직후의 루가 무리를 해 가며 그를 사도를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뭔가 구상해 두는 것이 있거나, 사정이 있는 모양.

에일이 그녀가 가진 유일한 사도이긴 하지만, 루가 관장하는 범위는 무려 워로드 전역이었고 신경 써야 할 곳이 많을 것이었다.

사실 신격의 메시지가 한쪽에 항상 떠오르면서 플레이하는 유저 자체가 에일밖에는 없었다.

덜컹!

통로의 끝에 다다른 그들은 문을 마주할 수 있었고, 주저 않고 그를 밀었다.

두터운 문이 바닥을 긁으며 서서히 밀려났고, 곧 활짝 열러 건너편을 볼 수 있었다.

“이건…….”

눈앞의 광경에 에일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전에도 본 적 있는 낯익은 풍경이었다.

커다란 방과 제단, 바닥엔 시체들이 가득했다.

멸망의 마을에서 보았던 악마의 제단과 그 흔적들이었다.

‘똑같은 의식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건가…….’

악마종을 소환하기 위한 의식이 준비 중이었던 것으로 보였고, 마련된 제단의 크기로 보아 더욱 규모가 커 보였다.

다만 전과 다르게 눈에 띄는 점이 몇 가지 있었다.

검은 마법진이 방 전체를 수놓으며 바닥에 넓게 펼쳐져 있었고, 위에 있던 네 개의 마법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했다.

거기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제대로 바라보자, 그들이 끌려온 제물이 아니라 이곳을 지키던 광신도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희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지?”

제단 위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올리자, 그곳엔 보랏빛 로브를 눌러쓴 여성이 지팡이를 든 채 서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이단의 표식이 떠올라있었다.

“아, 바깥 마법진이 파괴된 탓에 균열이 생긴 건가. 그렇다면 네 놈들은 이단심문소의 끄나풀들이겠군. 오히려 잘됐어.”

여성은 지팡이를 바닥에 한차례 내려찍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바닥으로부터 살짝 띄워졌고, 로브를 나풀거리며 제단을 내려왔다.

“저 녀석이 보스 같은데 얼른 끝내죠.”

로덴은 어깨에 가볍게 지고 있던 창을 들어 그녀에게로 겨눴다.

하지만 뭔가를 발견한 에일은 재빨리 팔을 뻗어 그를 막아섰다.

아직은 전투를 시작할 때가 아니었다.

“그 문장… 결사단의 마법사인가?”

“네가 그걸 어떻게…….”

놀란 듯한 여성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로브에 선명히 그려져 있는 초승달 문장.

에일은 그것을 보자마자 그녀가 속한 단체를 알 수 있었다.

“결사단……? 그게 뭐예요?”

로덴이 옆에서 소곤거리며 물었다.

광신도들의 제단에서 갑자기 다른 단체의 이름이 등장한 건 둘째 치고, 난생 처음 듣는 명칭이었다.

사실 로덴이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들의 정체는 지금껏 철저히 베일에 감춰져 있던 비밀결사단체.

에일조차도 유료 사이트에서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정보를 다른 희소한 정보 몇 가지와 교환해 힘겹게 얻어 냈었다.

다만, 결사단을 이런 자리에서 보게 될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왕국에 의해 엄격히 금지된 마법들의 해방과 존속을 위해 암약하고 있는 단체로서 비밀 연구와 실험을 이어 가고 있는 자들이었는데, 악마 추종자 집단인 핏빛 황혼회와 엮이다니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결사단의 일원이 이런 곳엔 무슨 일이지? 분명 황혼회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을 텐데?”

“확실히 우리에 대해 알고 있군. 정체가 뭐야.”

“물어본 건 내가 먼저인데.”

“후후, 좋아. 재미있네.”

에일의 대답에 여성은 미소 지었다.

바로 그들을 처리할 생각이었지만, 눈앞에 나타난 불청객에 대해 흥미가 생겨 버린 그녀였다.

“거래에 앞서, 우선 이름부터 말해 주겠어?”

“에일. 그쪽은?”

“뮤트.”

로브에 달린 모자를 벗은 뮤트는 얼굴을 드러냈다.

비밀 결사의 일원인 그녀가 이렇게 쉽게 얼굴을 보였다는 것은 결코 그들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고, 지금 이렇게 대화를 나누려 하는 것도 어차피 살아 나가지 못할 거라는 확신하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우리가 왜 이런 정신 나간 녀석들과 함께 있냐고 물었지? 나도 썩 내키진 않았어. 냄새나고… 무식하고… 멍청하다 못해 악마한테 머리를 조아리는 머저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잠시 놈들과 협력하기로 했지. 공동의 적을 가지게 되었거든.”

“공동의 적?”

“그래, 내가 여기 온 건 빛의 교단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야.”

“뭐……? 하지만 교단과 큰 원한 관계는 없었을 텐데, 뭐 하러 그런 짓을 꾸미는 거지?”

에일이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음지에서 금지된 마법에 손을 대는 마법사, 그리고 이단을 사냥하는 광적인 심판관.

딱 봐도 상극처럼 보이는 조합이었지만, 그런 인상과는 다르게 둘은 서로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빛의 교단이 가지는 이단의 기준은 무슨 마법에 손을 대는지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금지된 마법에 손을 대건, 부두술에 너무 심취하건.

결국 불의와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만이 이단으로서 낙인찍혔고, 그들에 한해 열렬한 심판이 이루어진다.

오히려 어떤 방식이건 금지된 마법이라면 모조리 억압하고, 그들을 사냥하는 데 열을 올리는 왕국을 상대로 복수의 칼을 간다면 모를까, 난데없이 교단을 무너뜨린다니 납득이 가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여기까지. 이제 내 차례야. 이단심문소의 사주를 받고 왔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하지만 너희가 교단에 직접 소속된 심판관인지는 모르겠단 말이지.”

“으엑, 난 아니에요!”

로덴이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에일은 긍정의 뜻을 비춰 보였다.

“나는 이단심판관이 맞아.”

“그래? 그렇다면 결사단에 대해 이단심문소에서도 파악하고 있는 건가?”

“아니, 너희의 존재에 대해선 나밖에 모른다.”

뮤트는 에일의 대답에 만족했는지 히죽 웃으며 물러섰다.

“우리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는지… 에 대해선 다음 질문에서 물어봐야겠지? 다시 네 차례야.”

“교단을 공격하려는 이유에 대해 다시 들어야겠는데.”

“우리의 뜻을 관철할 원대한 계획이 목전에 있어. 거기서 방해될 수밖에 없는 게 너희 교단이고. 눈엣가시 미리 제거해 두려는 거지.”

“그렇다면 그 계획이란 건…….”

“그건 너무 질문이 크잖아. 그치?”

뮤트가 눈웃음을 지으며 생글거렸다.

에일도 이만한 건을 답해 줄 거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바로 다음 물음을 꺼냈다.

“뭐, 좋아. 그렇다면 이 시체들은 뭐지? 아무리 봐도 황혼회의 신도들로 보이는데.”

에일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훑었다.

입구가 열려 있지도 않던 이런 깊숙한 곳에서 외부의 침입 탓에 그들이 죽었을 리는 없었다.

“그게… 아니나 다를까 의견 차가 조금 있었거든. 기껏 사람들의 영혼을 이렇게나 모아 놓고, 한다는 게 고작 악마들의 먹이로 던져 주는 거라니, 직접 사용하면 훨씬 더 효과적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데 말이야. 그래서 빼앗았어. 제단도 살짝 개조하고, 계획도 더 확실하게 수정했지.”

“배신인가…….”

“그럴지도.”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질문을 던졌다.

“나도 방금 질문을 이어서 할게. 네가 결사단에 대해 어떻게 알아냈는지 말해 줘야겠어. 확실하게 말이야.”

“아스칼론의 정보상인에게서 처음으로 들었다. 거액을…….”

“거짓말이군.”

인상을 찌푸린 뮤트가 그의 말을 날카롭게 끊었다.

단번에 싸늘해진 말투가 한기를 풍겼고, 그녀의 표정 또한 180도 돌변해 굳어 있었다.

“거래는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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