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광기에게 광기가 (10)
카가가강!
로덴의 매서운 창격이 휘몰아쳤다.
유연하게 이어지는 연격은 에일을 쉼 없이 압박해 왔고, 기회를 잡아 반격을 노려볼 때조차 빙글 돌아간 창이 손쉽게 노림수들을 막아 냈다.
버티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빈틈이 찾아볼 수 없는 수준.
조금 전 그가 검을 들고 상대했던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전투 스타일이 단숨에 180도 바뀌며, 훨씬 더 날카롭고 허를 찌르는 공격들이 이어졌고, 에일은 속수무책으로 뒤로 밀려나는 중이었다.
창의 리치를 생각해 단검으로 무기를 스왑하고 안쪽으로 파고들려고 해 봤지만, 전 상위 랭커를 상대로는 그리 간단한 공략법만으로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로덴은 근접한 상태에서의 체술 또한 빈틈이 없었고, 발에 차여 튕겨 나가기 일쑤였다.
‘한 번만 성공시키면 된다……!’
에일이 빠득 이를 갈며 일어섰다.
로덴의 체력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고,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에일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 자체는 평소보다 많지 않았다.
한정된 마나 탓에 일섬 스킬을 두 번이나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
포션을 마실 틈도 없고, 마법 스크롤은 적절하지 않았다.
아무리 승부욕에 불탄다 한들 스크롤까지 쏟아부으며 상대하게 된다면, 공헌도 소모는 둘째 치고 영상의 반응을 비롯해 여러모로 의미가 퇴색되었다.
상대의 말도 안 되는 전투 감각 탓에 싸움이 계속 이런 양상으로 지속되다간 서서히 말라죽을 것이었고, 무언가 승부수가 필요한 시점.
파앗!
거리가 좁혀지자 에일은 다시 한 번 스킬을 발동해 로덴의 뒤로 돌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로덴은 창을 잡고 몸을 비틀며 공격을 피했고, 에일의 턱에 발을 꽂아 넣었다.
회피와 공격이 마치 하나처럼 이어지는 동작, 각법류 스킬이 아닌 자체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충격에 흔들린 에일은 순간 균형을 잃고서 비틀거렸다.
그리고 그사이 로덴의 창이 에일을 노렸다.
푸욱!
“큭……!”
어깨를 관통당한 에일의 체력이 주르륵 빠져나갔다.
에일은 그 틈에도 정신을 놓지 않으려 집중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무너진 자세를 회복하기엔 무리였다.
“너무 안일했습니다!”
로덴이 끝을 지으려 창을 크게 휘둘렀다.
에일이 대놓고 노리며 사용한 역극 스킬은 이미 그에게 한 번 꺼내들었던 수였고, 오히려 독이 된 꼴이 되었다.
심지어 어떤 스킬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던 처음에도 막혔던 스킬을 트릭도 없이 그대로 사용해 보였으니 먹혀들 리가 없었다.
보통의 PVP 상황이라면 몰라도 그들만 한 수준의 세계에서는 이만큼 안일한 판단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계산된 행동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쩌엉!
“……!”
로덴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에일의 주변에 검은색 보호막이 생겨나 그의 창을 완벽히 막아 낸 것이다.
검은 수정 장신구의 세트 효과, 공격 무효.
그 못지않게 강적이었던 네슈아를 처음 상대할 때도 매우 유용하게 써먹었던 패턴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공격이 무효화되고, 에일은 그 틈을 노렸다.
낮게 깔렸던 에일의 장검이 공격을 위해 동작을 소모한 상대를 향했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자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방법이 없는 법.
하지만 이대로 끝일 거라는 에일의 예상과는 달리, 로덴의 입가에 짜릿한 미소가 흘렀다.
PVP에서의 진짜 실력은 반응 속도뿐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 플레이어가 모인 이 판에서 랭커로서 서기 위해선 예지에 가까운 감각, 혹은 천재적인 수읽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잘 싸우던 에일이 갑자기 안일한 선택으로 약점을 노출하자, 로덴은 한 가지 여지를 남겨 뒀었다.
후웅!
단번에 몸을 비튼 로덴의 움직임에 불꽃을 머금은 장검은 허공을 갈랐다.
에일이 준비한 회심의 일격은 그의 얼굴 끝을 스치듯 지나갔다.
‘이걸…….’
분명 외통수라고 생각했던 수.
하지만 로덴은 그것마저도 피해 냈고, 에일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이대로 이번 노림수까지 무위로 돌아간다면 그 뒤의 결과야 불 보듯 뻔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빠득 갈은 에일은 장검이 나아가던 관성 그대로 손을 놓아 무기를 버렸다.
장검이 핑그르르 돌며 벽을 향해 날아갔다.
에일은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내디디며, 힘껏 반대편 팔을 뻗었다.
빠악!
“크헉…….”
힘이 실린 주먹이 로덴의 안면을 강타했다.
무기가 없어 큰 데미지를 입히긴 무리였지만, 이미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던 로덴은 그대로 뒤로 넘어가 쓰러졌다.
설마 그 자세에서 무기를 버리고 맨주먹을 뻗어 낼 줄은 예상 못 했던바.
로덴은 털썩 소리와 함께 빈사 상태에 빠졌고, 그가 쥐었던 청색 창 또한 바닥을 굴렀다.
거친 숨을 내뱉은 에일은 꼼짝 못 하고 뻗어 있는 로덴의 앞에 서 그를 내려다봤다.
잠시 뒤, 긴장감이 풀린 에일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 자존심 상하네.”
아직은, 간격이 좁혀지지 않았다.
* * *
툭!
바닥을 굴러온 포션병이 로덴의 머리맡에 멈춰 섰다.
힘겹게 고개를 돌려 그를 본 로덴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에일을 올려다봤다.
“이건…….”
“빨리 마시고 일어나시죠.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마무리는 안 지으십니까?”
로덴이 벌여 놓은 일은 명백한 기습.
스스로 끝을 볼 생각이 없다고는 했어도, 사전 합의 없이 다짜고짜 공격한 행위는 변치 않았고 공격받은 쪽에선 그를 죽여도 할 말 없는 일이었다.
에일을 미친 심판관으로 알고 있는 로덴도 당연히 그가 그런 선택을 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일은 그의 목숨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이단 지정 스킬을 다시 한 번 사용해 머리 위에 떠올랐던 이단의 낙인을 지웠다.
악행으로 자연스럽게 생겨난 낙인은 당사자가 속죄하며 선행을 쌓지 않는 이상 제거가 불가능했지만, 낙인이 없던 상대에게 스킬로 만들었던 표식은 시전자가 다시 지워 낼 수 있었다.
그의 숨을 끊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험치와 아이템, 보너스 스탯이 탐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는 아르메니아의 상위 랭커로 활약하던 네임드 플레이어다.
괜히 뒤탈이 생길 수도 있고, 알려진 게 하나 없어 어떤 난관이 나타날지 모르는 이번 던전의 공략을 돕게 만드는 게 나았다.
잘만 하면 그에게 빚을 하나 지워 놓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어 보였고.
“됐습니다. 마저 공략하는 거나 도와주시죠.”
“정말 그래도 괜찮다고요? 화형은요?”
“애초에 끝장을 볼 것도 아니었다면서, 뭐 하러 그럽니까?”
에일의 말에 로덴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잠시 벙해 있었다.
그 덕에 에일은 영상을 접한 사람들이 어떤 이미지로 자신을 보는지 새삼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금세 정신을 차린 로덴은 재빨리 치유 포션을 들이켜고 일어났다.
그가 다시 창을 주섬주섬 집어들 때쯤 에일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출발하죠.”
“저기……! 형님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 그럼 에일 님!”
먼저 발걸음을 옮기는 에일을 로덴이 허둥지둥 따라갔다.
안쪽으로 향하는 기다란 통로는 꽤나 깊게 이어져 있었고, 조금 더 걷자 아래로 내려선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을 내려가며 슬쩍슬쩍 눈치를 보던 로덴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에일 님, 진짜 잘하십니다. 워로드 와서 이만한 실력자 처음 봤어요. 설마 저를 쓰러뜨릴 사람을 30레벨대에서 만날 줄이야.”
“놀리지 마시죠. 스펙만 같았어도 그쪽이 이겼을 텐데요.”
에일이 조금은 퉁명스레 답했다.
보았듯이 결과는 에일의 치열한 접전 끝 승리였지만, 만약 스펙의 우위를 지니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겨내지 못했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로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하, 제 캐릭터는 누가 대신 키워 줬나요? 육성도 실력이죠. 찌질하게 쪼렙존 와서 양학한 게 아닌 이상, 장비탓 스킬탓은 멍청이들이나 하는 겁니다. 에일 님은 저보다 잘한 거고요. 다음에도 저랑 대련 한 번 해 주셔야 합니다?”
로덴이 한껏 들이대며 말했다.
솔직히 이번 대결을 통해 느낀 점도 많고, 도움 많이 된 것은 사실이다.
로덴이라면 아르메니아에서도 굉장히 특별한 케이스였긴 했지만, 그럼에도 에일은 자신과 랭커와의 간격을 톡톡히 자각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창을 들었다면… 분명 내가 졌겠지.’
에일이 방금의 전투를 떠올렸다.
로덴이 시작부터 창을 들고 진심으로 나섰다면, 굳이 스펙 차이를 따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실력상으로는 두말할 여지 없이 그가 자신의 우위에 있었다.
사실 제삼자가 보기에는 전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눈부신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한들, 이제 막 시작한 플레이어가 다년간 경험을 쌓으며 플레이해 온 최상위권 괴수들을 능가하기란 불가능하다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였다.
하지만 당사자가 되어 직접 그 벽을 겪었을 때의 느낌은 달랐다.
“문제점이 뭐였을까요.”
에일이 물었다.
치열했던 전투가 끝나고 난 뒤, 자체적으로 복기를 하긴 했지만 전 랭커의 시점에선 어떻게 보였을지 궁금했다.
“저를 이렇게 떡실신시켜 놓고도 문제점을 찾으시다니… 분하려 하네요.”
“그런 대답 말고요.”
“오케이, 좋아요. 우선 에일 님, 어느 게임 출신이세요?”
“워로드가 처음인데요.”
간단한 에일의 말.
하지만 그 말에 로덴의 얼굴 표정이 바뀌었고, 자리에 굳듯이 멈춰 섰다.
전에도 이런 경험을 겪어 본 적 있는 에일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농담아니고 정말이에요.”
“아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긴 했지만… 얼굴 숨기고 활동하던 거 아니었어요? 이 실력이 막 시작한 뉴비라니, 거짓말이죠? 설마 예전에 유명했던 PK꾼이었다거나 그래서 그래요?”
“아뇨, 전혀요.”
이상한 추측을 늘어놓는 로덴에 에일은 완고히 부정했다.
그러자 잠시 당황한 얼굴로 골똘히 생각하던 로덴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런 플레이 스타일은 난생 처음 본 거니…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해도 모를 리가 없었겠네요.”
빠르게 납득한 로덴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하겠네요.”
“간단하다고요?”
“네, 결국 시간이… 아니,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경험’이 해결해 줄 문제라는 거죠.”
“경험…….”
워로드, 그리고 이전 게임들을 비롯해 수많은 게임을 거친 랭커들이 그동안 수년간 쌓아온 경험은 우습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루아침 새에 따라잡을 수 있을 만한 건 더더욱 아니었고.
“나름 이쪽 세계에 먼저 발을 들인 사람으로서, 감히 에일 님을 평가해 보자면 재능은 충분해요. 특히 아까 그 무기 스왑은 어떻게 한 건지 감도 안 잡히고요. 괜히 자책할 필요 없어요. 스펙이 어땠건 무기를 어쨌건 저 이겨 본 사람 손에 꼽습니다. 물론 지금이야 게임을 한참 쉬다 와서 감각이 조금 죽긴 했지만…….”
“하하… 고마워요.”
그의 진심 어린 조언에 에일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방금 그게 1년 반을 넘게 쉬고 난 뒤에 죽어 있던 감각이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무려 전 세계 모든 플레이어가 한데 모인 거대한 판이니만큼, 이런 괴물들이 위쪽에 포진해 있는 게 당연했지만 직접 겪어 보니 말이 안 나왔다.
그동안 막연히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던 6대 길드의 리더들은 어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질려 버릴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로덴 님, 제작년에 갑자기 모습을 감췄던 이유는 뭐였어요? 워로드도 이제야 시작한 걸로 보이고, 혹시 이번에도 도전한다면서 일부러 후발주자로 시작한 건 아니겠죠?”
“푸하하, 설마요. 아르메니아에서도 무슨 개고생을 했는데 제가 미쳤다고 그러겠습니까. 원래는 바로 워로드로 넘어가려고 했죠. 가장 중요한 무대고, 시작 시기가 늦어질수록 손해니까.”
“그러면 왜……?”
“아 그게…….”
곤란한 기억을 떠올린 듯 로덴이 머리를 긁적였다.
잠시 한숨을 내쉰 그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영장이 날아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