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광기에게 광기가 (9)
아르메니아의 랭커 로덴이라면 워로드 이전의 모든 게임을 통틀어서도 아주 유명한 편이었고, 그의 스타일이라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손꼽히는 창술가로서 명성을 떨쳤던 로덴은 워로드에 들어서 직업을 바꾼 건지 한손검만을 들고 있었지만, 에일이 함께 싸우는 동안 지켜본바, 그만의 독특한 플레이 스타일은 여전했다.
바로 액티브 스킬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
전투 중에 보인 공격은 모두 스킬이 가미되지 않은 일반 공격뿐이었고, 직접적으로 사용된 스킬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철저히 패시브를 중점으로 둔 캐릭터 육성과 스킬 트리.
다른 랭커들과 차별화되는 로덴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액티브 스킬은 변수 창출이라면, 패시브는 기본기.
두 가지 요소 중 하나라도 떨어진다면 치열한 랭커들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건 자연스러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로덴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는 특별한 스킬 없이도 괴물 같은 반사 신경과 피지컬을 바탕으로 변수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출발이 한참 늦었던 아르메니아에서도 쟁쟁한 랭커들을 상대로 꾸역구역 따라잡을 수 있었다.
부족한 레벨임에도 패시브만을 집중적으로 투자해 어떻게든 기본 스펙을 따라잡고, 남은 변수 창출의 문제는 압도적인 실력으로 커버했다.
그것이 로덴이 등장했던 당시에 시작부터 괴물 루키라며 유명세를 떨쳤던 이유였고, 지금조차도 유저들 사이에서 굉장한 평가를 받으며 기억되는 이유였다.
만약 게임을 시작했던 시점이 좀 더 빨랐다면 훨씬 더 높은 위치에 있었을 것이라고 대부분의 유저가 입을 모아 이야기하곤 했다.
그리고 에일은 지금 그 평가가 조금의 과장이 없다는 걸 느꼈다.
카앙!
“크읍…….”
로덴이 가해 오는 변칙적인 연격에 에일이 주춤거렸다.
합을 주고받으며 자세를 유도하고, 양옆의 구조물까지 이용해 가며 어떻게든 없는 빈틈을 만들어 내는 수준이었다.
한손검을 이용한 일반 공격만으로 이런 압박을 가해 올 수 있다니 직접 상대하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3대 게임의 상위 랭커 출신… 역시 쉽게 볼 상대가 아니야.’
그동안 잠시 우쭐해져 있던 자신을 반성하며 에일은 검을 크게 휘두르며 성화를 발동시켰다.
화르르륵!
순백을 띤 장검이 불길을 토해 냈고, 주변을 태우려는 위협적인 열기에 로덴은 훌쩍 뒤로 물러났다.
적당히 재면서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하, 조금 더 늦게 나왔으면 기분 나쁠 뻔했습니다!”
제법 위협적인 모습에도 성화를 본 로덴은 오히려 즐거워하며 발을 굴렀다.
거리를 바싹 좁혀 온 로덴에 에일은 받아치려는 자세를 취했다가, 즉시 자세를 틀며 스킬을 발동시켰다.
역극의 효과로 에일의 몸은 단번에 그의 측면을 돌았다.
그렇게 등 뒤를 잡은 에일은 순간적으로 가속된 자신의 움직임을 그대로 살린 채 로덴에게로 장검을 휘둘렀다.
카앙!
“이크……!”
그러나 공격은 유효하지 않았다.
로덴은 놀라울 정도의 반사 신경으로 검을 뒤로 해 에일의 일격을 막아 냈다.
‘이렇게 쉽게 막을 줄이야.’
에일은 혹시 모를 일전에 대비해 몬스터들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와중에도 자신의 전력은 최대한 내보이지 않았다.
로덴의 입장에서는 그가 이단심판관이라는 사실은 알았다 해도, 근접 클래스들의 폭넓은 공용 스킬인 역극에 대해 미리 생각해 두기란 불가능했을 터.
그건 곧 로덴이 대비가 전혀 없었음에도 순발력만으로 대처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더 이상 놀라고 있을 틈 따위는 없었다.
상대도 진심을 다해 오기 시작했고, 반격은 순식간에 돌아왔다.
콰악!
검이 맞닿아 있는 그대로 몸을 돌린 로덴이 주먹을 뻗어 왔고, 에일도 한 손으로 급히 그를 막아 냈다.
데미지 없이 막아 내긴 했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로덴은 에일의 장검에 검을 바짝 붙인 채로 밀어붙였고, 쉽게 거리를 벌리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과거부터 그는 창술과 함께 공격적인 체술을 곁들이기로 유명했었고 그 실력 또한 여전히 날카로웠다.
빠악!
“큽……!”
발길질에 복부를 얻어맞은 에일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후, 역시 직접 붙어 보니 장난이 아니네.’
에일은 잽싸게 검을 바로 잡으며 자세를 추슬렀다.
워로드를 시작한 이후,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이만한 압박감은 처음 느껴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다.’
복부를 정통으로 타격당한 것에 비해 체력 자체는 많이 줄어들지 않았다.
그동안 충실히 쌓아 둔 총애와 광기 스탯 덕에 동레벨대에 비해 우월한 스펙을 지니고 있었고, 장착하고 있는 장비 또한 전반적으로 에일의 우위였다.
더군다나 패시브 위주로 세팅하는 육성 방식은 고작 30밖에 안 되는 레벨대 탓에 아직 충분한 탄력을 받기는 무리인 시점이었다.
로덴의 머리 위에는 이단 지정으로 인해 낙인이 찍혀 있는 상황.
객관적으로 봤을 때 에일이 여러모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상황은 쉽지 않았다.
어떻게든 공격을 성공시킨다면 강한 데미지를 줄 수 있겠지만, 그것부터가 여의치 않았다.
움직임과 관련해 패시브들을 세팅해 두었는지 로덴의 몸놀림은 굉장히 민첩했다.
‘그렇다면…….’
파앗!
다시금 압박해 오는 로덴의 검을 정면으로 쳐낸 에일은 즉시 무기를 바꿔 들었다.
에일이 손에 쥐고 있던 장검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하얀 불꽃을 머금은 기다란 창이 나타났다.
횡으로 쳐내던 검의 경로가 갑자기 직선의 창으로 변해 쇄도하자, 로덴은 깜짝 놀라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의 반사 신경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다.
창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 기다란 상처를 만들어 냈고, 무기에 달려 있는 독 효과가 발동되었다.
[상태 이상 ‘화상’이 발동되었습니다!]
[특수 효과 ‘중독’이 발동되었습니다!]
“이건 무슨…….”
로덴의 표정은 황당한 기운을 감추지 못했다.
상대의 무기에 따라 싸움을 이끌어 나가는 방식이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마련이었는데, 한창 전투 중인 와중에 쥐여 있던 무기가 단숨에 바뀌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에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장검으로 즉시 바뀐 에일의 무기가 로덴의 왼 어깨를 노리고서 내려찍혔고, 한껏 무게가 실린 채 강하게 부딪혔다.
카가가각!
로덴은 급히 무기를 들어 공격을 비스듬히 흘려냈고, 흘린 장검이 뒤편의 벽과 부딪히며 사나운 마찰음을 만들어 냈다.
막아 낸 검 너머로도 상당히 묵직한 힘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고, 장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하얀 불길이 그를 위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당했던 독과 화상 탓에 체력이 예상 이상으로 많이 빠져나갔다.
특히 성화로 입은 화상은 낙인 탓에 강제된 속성으로 인한 추가 데미지가 적용되었고, 이단을 상대로 한 칭호와 패시브의 데미지 증폭 효과까지 겹쳤다.
‘이거 공격 한두 번만 제대로 허용해도 위험하겠는데.’
그가 그동안 어떤 식으로 캐릭터를 육성해 왔는지 모르겠지만 동레벨대에 비해 굉장히 강하다는 게 느껴졌다.
물론 빛의 교단 신도들이 가지는 총애도가 경우에 따라 얼마나 강력한 효과를 주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고, 로덴 자신이 당장 사용할 장비들에 대해선 별 신경을 안 쓴 탓도 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놀라울 수준이었다.
그가 밑천을 숨겨 뒀다는 것쯤은 눈치채고 있었지만, 전력을 감춰 뒀었던 에일이 이렇게 본색을 드러내자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바로 에일의 실력.
‘여기다!’
투웅!
정확히 빈틈을 찔렀다 생각했지만, 로덴의 검은 갑자기 등장한 방패에 막혔다.
에일은 왼손에 데미지를 완전히 상쇄시킬 방패를 들어 올렸고, 그와 동시에 반대편 손에서 꺼내진 단검이 로덴의 목을 노렸다.
그에 재빨리 상체를 빼낸 로덴은 뒷걸음질 쳤다.
‘이 무기 스왑은 대체… 이런 게 가능했던 건가?’
랭커 출신 중 장비 스왑의 개념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숙련도와는 별개로 어쩔 수 없이 동반되는 딜레이와 지나치게 까다로운 난이도 탓에 대부분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게 보통이었다.
일반 유저들 사이에서는 실용성 없는 겉멋 플레이의 일종 취급을 받고 있을 정도였다.
하나 지금 에일이 보이는 모습은 그 상식을 가볍게 깨부수고 있었다.
필연적이라 여겨지는 특유의 시스템 상 딜레이는커녕, 어떠한 주춤거림도 없이 무기 전환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한두 번도 아니고 자유자재로 끊임없이 무기를 바꿔 가며 전투를 수행하다니.
로덴도 감히 엄두 내지 못할 수준. 아니, 여태 모든 게임을 통틀어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테크닉이었다.
‘이거, 쓸 만한 실력자라는 생각은 취소해야겠네.’
진짜 물건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 * *
콰아아아!
에일의 일섬 스킬이 한바탕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치열한 접점 끝에 확실한 기회를 만들어 내고서 날린 결정기.
그에 직격당한 로덴은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후아… 그런 스킬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요.”
엉망이 된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본 로덴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경갑 방어구를 두르고 있는 로덴은 체력 스탯에도 신경을 많이 쓴 편이라 내구력이 결코 낮은 편이 아니었는데, 공격 한 방에 생명력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엄청난 데미지를 입었다.
심지어 그는 장착하고 있는 방어구의 세트 효과가 첫 타격이 이루어지는 순간, 방어구에 붙은 방어력 옵션이 두 배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일에게는 방어 분쇄 패시브가 존재했다.
무려 40퍼센트의 방어 관통 효과를 지니고 있는 유일 등급 스킬인 만큼, 추가로 올라간 방어력을 모조리 상쇄시켜 버렸다.
일섬 스킬에 당해 남은 로덴의 체력은 불과 5퍼센트 남짓.
다른 유저의 시점에선 자세한 수치를 볼 수 없다 해도, 겉모습만으로 상태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여기까지만 할까요?”
“아뇨, 마무리는 지어야죠. 조금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궁지에 몰렸을 법한 상황에서도 로덴은 즐거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쥐고 있던 무기를 해제하더니, 인벤토리를 열어 또다른 아이템을 꺼내들었다.
터엉!
길게 뻗어진 청색의 창.
에일은 바닥을 찍으며 나타난 그것을 보자마자, 로덴이 아르메니아 시절부터 줄곧 창술가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워로드에 와서 직업을 바꾼 것이 아니라, 과거와 같은 창술가 직업을 선택한 것이었다면.
그리고 첫 만남부터 줄곧 클래스에 맞지도 않는 무기를 사용해 전투에 임하고 있던 것이라면.
지금의 흐름은 얼마든지 반전될 수 있었다.
“이건 뭐 보스몹 2페이즈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