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광기에게 광기가 (8)
에일과 로덴, 그렇게 결성된 파티는 남아 있는 세 개의 마법진을 모두 무력화시키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 과정은 생각만큼 순탄치는 않았다.
마법진 하나가 작동되자 나머지 마법진들도 순차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고, 직접적으로 건드리지도 않은 마법진들이 발동되어 몬스터들을 쏟아냈다.
하나만 해도 그 난리였는데 무려 세 군데에서 몬스터들을 뱉어 내니 그야말로 엄청난 숫자를 이루었다.
놈들을 뚫고서 마법진에 접근한 뒤, 5분여의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 내는 것.
이미 경험해 보았다고는 해도 사방에서 몰려드는 언데드들 탓에 골치 아팠다.
하지만 다행인 점은 그래도 처음 에일의 상황에 비하면 두 명으로 늘어난 인원 덕에 수월한 편이었다.
처음 맞춰 보는 합이긴 했지만, 로덴은 굉장한 실력자였고 괜히 어수룩한 다인 파티와 함께하는 것보다 체감이 확연히 느껴졌다.
[마법진이 성공적으로 파괴되었습니다!]
[부분 보상을 획득하였습니다!]
츠츠츠츳!
드디어 마지막 마법진을 파괴해 내는 데 성공했고, 건네받았던 검은 구슬은 효력을 다해 파괴되었다.
“휴, 이거 일 다 끝난 뒤에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만 해도 골치 아프겠는데요.”
축 늘어진 언데드를 시체 더미에 내던진 로덴이 말했다.
최대한 빠르게 이 난장판을 정리하긴 했지만, 그사이에 풀려 나온 몬스터들의 숫자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거기다 스컬 하운드 무리에게 희생당한 광신도와 유저들까지 모두 부활해 언데드가 되어 던전을 누비며 동료들을 늘리고 있었다.
마지막 마법진까지 가는 길만 하더라도 적잖이 애를 먹었는데, 일을 마친 뒤에 던전 바깥으로 나가는 길도 순탄치는 않을 예정이었다.
“그래도 아직 위험한 수준은 아니니까요. 다만 네 번째 마법진까지 부서졌는데 퀘스트와 관련해서 메시지로 나타난 건 없어요.”
“그렇다면 직접 찾아야 한다는 건가 보네요.”
드드드득!
그때 요란한 진동이 땅 밑을 뒤흔들며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인 소리가 들려왔다.
들려오는 소리로 보아 던전의 구조가 움직였을 가능성이 높았고, 에일과 로덴은 소리가 나타났던 방향을 따라 급히 뛰어갔다.
“던전 중심부 방향에서 들려왔어요!”
강렬한 반응이 온 걸 보아, 던전을 쏘다니며 마법진들을 무력화시킨 게 최소한 허탕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소리가 나타난 방향이 텅 비어 있어야 할 중심부 쪽인 걸 보아 그들의 추측이 크게 빗나간 것도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고, 길을 막는 몬스터들을 거침없이 뚫어 가며 발걸음을 최대한 서둘렀다.
어떤 것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악의 경우로 따졌을 때 늦었다가는 고생만 하고 다른 유저에게 보상을 통째로 빼앗길 수도 있었다.
“저깁니다!”
무언가를 발견한 로덴이 앞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에일도 그를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전에 지났을 때만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었던 벽이었지만, 지금은 거대한 균열이 생겨나 안으로 향하는 통로를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새롭게 나타난 입구는 그들이 첫 번째로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
마침 근처를 지나고 있던 유저들이 입구를 발견해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고, 에일은 급히 그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거 선두를 빼앗기겠는데요.”
“아뇨,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로덴의 말을 단번에 반박한 에일은 단검 하나를 뽑아 입구의 선두에 서 있던 유저에게로 힘을 실어 던졌다.
언데드가 되었던 첫 번째 파티를 전멸시키고서 얻었던 장비 아이템으로 투척 시 적중된 적에게 둔화 효과를 안겨 줄 수 있는 아이템이었고, 방심하고 있던 유저의 등에 정확히 꽂혔다.
“컥… 뭐, 뭐야!”
“기습이다! 저 자식들이야!”
습격을 당한 유저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분쟁은커녕 간단한 대화조차도 없이 다짜고짜 공격한 행위, 흔히들 말하는 상습 PK범들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에일이 따르는 신격인 루의 성향상 여신의 총애도가 대폭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아니었다.
마주친 유저들의 머리 위에는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이단의 낙인이 있었다.즉, 에일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공격을 해야만 하는 적들이라는 것.
플레이어를 포함해 누구에게든 이단의 낙인이 찍혀 있다는 건 그간 행한 악행이 충분히 쌓여 있다는 의미였다.
그 탓에 플레이 타임 자체가 많지 않았을 저레벨 유저들 사이에서는 자주 보기 힘든 경우였고, 레벨도 낮은 상태에서 낙인이 찍혀 있다는 것은 상당한 악질이라고 봐도 좋았다.
에일을 상대로 그 난리를 쳤던 베켄조차도 이단 지정 스킬에 당하기 전까진 낙인이 찍혀 있지는 않았었는데, 놈들은 전원이 표식이 드러나 있었다.
시스템상의 총애도가 문제가 아니라, 뒤통수가 무사하려면 일단은 제거해 놓고 봐야 할 족속이라는 것이다.
“이런 건 미리 말 좀……!”
로덴이 다급히 검을 꺼내 들며 에일의 뒤를 따랐다.
갑자기 일어난 싸움임에도 로덴은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서 그에 동참했다.
이미 에일이 루를 따르는 이단심판관이라는 걸 알고 있는 이상, 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들을 공격했을 리가 없다는 것쯤은 알 수 있던 것이다.
빛의 교단 신도들은 PK로 얻을 수 있는 이득보다도 불이익이 더 클 테니, 이미 좋지 못한 악연 사이였다거나 상대가 교단의 적인 이단일 가능성이 높았다.
콰악!
“끄아악!”
입구 앞에서 두 파티가 격돌해 부딪치고, 가장 먼저 쓰러진 건 투척된 단검에 등을 맞았던 유저였다.
움직임이 느려졌다는 것을 알고 에일이 그만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집중적으로 노린 탓에 오래 버티는 게 불가능했다.
세 명을 상대로 하는 입장임에도 뒤에서 백업을 해 주는 로덴의 존재 탓에 그들을 제압하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실력으로만 따져도 마법진 앞에서 상대했던 숙련자 파티보다 못했고, 인원수도 하나 적었다.
명색이 플레이어였지만 까다로운 적이라기보다는 소중한 스탯 보너스들로 보일 지경이었다.
혹시나 화상 데미지에 체력이 바닥날까 무기에 성화도 붙이지 않은 채, 그들의 목숨을 끊지 않고서 하나하나 제압해 나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화형대를 세운 뒤 생포한 플레이어들을 모조리 그 앞으로 끌고 갔다.
이미 빈사 상태에 빠진 이들은 밧줄에 꽁꽁 묶이기까지 했고,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죄인들의 발버둥과 애원은 에일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아… 안 돼!”
“으아아악!”
하나씩 끌려가 불태워지는 유저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고, 그들을 삼킨 불길이 일렁였다.
“으아, 살벌하네요…….”
바로 옆에서 그 모습을 생생히 보게 된 로덴은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지켜보고 있는 눈 탓에 적당히 연기를 가미된 에일의 표정이었지만, 정작 로덴이 진심으로 느낀 것은 그 너머의 무언가였다.
다만 갑자기 맨땅에서 화형대가 불쑥 솟아난 것에 대해서는 이상한 눈빛으로 보지 않았다.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설치형 아이템의 한 종류 정도로만 생각한 것이다.
사도의 존재를 모르는 다른 플레이어들의 입장에서는 에일의 형벌 집행을 어떠한 스킬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어떤 녀석들이길래 이런 겁니까?”
“먼저 공격해야 할 상대가 이단밖에 더 있나요. 자, 우선 이것부터 받으시죠. 돈도 꽤 들고 있고, 아이템도 잘 나와 줬습니다.”
누가 PK로 먹고사는 녀석들 아니랄까 봐 짭짤한 수익이었다.
세 명의 플레이어가 드랍한 돈을 반으로 나누고, 아이템들의 적당한 가치를 따져 가며 신속하게 전리품 분배가 이루어졌다.
양쪽 모두 아이템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에 마찰 없이 금세 분배 작업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지금 제압한 이들 말고도 누군가 입구를 찾아올 수도 있었기 때문에, 작업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쿠웅!
분배를 마친 에일과 로덴이 커다란 입구 안으로 들어섰고, 그와 거의 동시에 뒤편의 벽이 닫혔다.
들어왔던 입구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게 완전히 막힌 상황.
보이는 것이라고는 길게 늘어선 통로와 양옆에 놓인 횃불이 전부였다.
“휴, 정말 까닥하면 늦어 버릴 뻔했네요.”
로덴이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입구가 굳게 닫힌 걸 보아, 후발주자가 따라 들어올 수 없는 구조인 듯했다.
만약 방금의 파티가 그대로 안으로 들어섰다면, 막상 마법진을 해치웠던 그들은 바깥에서 손만 빨고 있었을 것이다.
“아까부터 정신없이 움직였는데, 이젠 좀 느긋하게 진행해도 되겠어요. 바깥에서 방해받을 걱정은 없으니.”
“하지만 빠르게 끝내서 나쁠 건 없죠.”
“그래도 이대로 들어가면 재미없지 않겠어요?”
쩌엉!
부딪힌 두 검이 파르르 떨렸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기습이었지만 그에 반응한 에일은 장검을 들어 공격을 막아 냈다.
다짜고짜 검을 휘두른 로덴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이며 입을 열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미리 사과하겠습니다.”
“이거, 당황스럽네.”
에일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 * *
카가가각!
에일이 주르륵 바닥을 끌며 뒤로 밀려났다.
한차례 경합 뒤, 팔 아래로 생겨난 상처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약간의 HP가 떨어져 나간 걸 확인한 에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영상에서 봤을 때부터, 한 번쯤 싸워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기습을 했다?”
“하하, 괜히 그런 소리 마시죠. 겨우 그 정도 공격에 당해 주진 않을 거잖아요. 그리고 아까부터 눈치챈 거 다 알고 있습니다.”
‘들었던 대로인가 보군.’
로덴의 말대로 사실 그가 언젠간 덤벼들 거라는 건 에일도 이미 예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아르메니아 시절부터 로덴은 인정할 만한 강자들에게 다짜고짜 덤벼들어 승부를 겨루기로 유명했고, 쉽지 않은 싸움을 즐기는 그의 성향은 전부터 익히 들어왔다.
“일단 제 쪽에선 끝을 볼 생각은 없으니,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잠깐…….”
여지를 남기는 에일의 말에 검을 바짝 들어 올리던 로덴이 멈칫했다.
에일도 걸어온 싸움을 굳이 피하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왜 강자와의 전투를 즐기는지 아주 잘 이해하며, 오히려 남들보다 더욱 동감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굳이 던전의 끝을 앞둔 이 시점에서 아무런 소득 없는 싸움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상대가 달랐다.
‘오히려 잘됐어. 좋은 소스가 될 거야.’
에일은 마침 다음 영상에 사용할 녹화본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의 레벨은 불과 35레벨.
화제가 필요한 이 시점에서 과거의 네임드 플레이어를 만나다니, 오히려 복이 굴러들어온 격이었다.
심지어 로덴은 최근까지만 해도 종적을 감춰 행방이 묘연했던 상황이었고, 그와의 대결을 영상에 사용한다면 엄청난 화제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단순히 대결 자체만으로는 에일의 성에 차지 않았다.
기회가 왔다면 얻어낼 건 모두 얻어낸다.
‘무조건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