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광기에게 광기가 (7)
[남은 시간 ‘00:00:00’]
[마법진이 성공적으로 파괴되었습니다!]
[부분 보상을 획득하였습니다!]
츠츠츠!
커다랗게 바닥에 그려져 있던 검은 마법진이 소멸되었다.
떠올라 있던 검은 구슬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고, 에일은 손을 뻗어 그를 받아냈다.
“끝인가…….”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에 에일은 보상을 확인했다.
심문소에서 받았던 퀘스트가 클리어된 것은 아니었지만, 마법진을 파괴한 것만으로도 별도의 보상이 존재했다.
경험치와 교단 공헌도가 늘어나 있었고, 이단의 낙인이 찍혀 있던 유저들을 처치해 얻은 각종 보너스들은 덤이었다.
촤륵!
에일이 품속에서 또 다른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도 공헌도를 사용해 구매한 물건은 아니었다.
교단의 집행관인 아일린이 출발하기 전에 그에게 건네줬던 연락용 마법 스크롤이었다.
그녀는 빠른 조치를 위해 마법진의 정체에 대해 밝혀내면 곧바로 보고해 주길 원했었고, 의도치는 않았지만 정체에 대해선 확실히 알아내는 데 성공했으니 빠르게 글자를 써갈긴 뒤 전송했다.
화르륵 불길이 타오르며 스크롤이 사라졌고, 에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적당히 이곳을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퀘스트를 완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볼일이 있었다.
그 많던 몬스터가 모조리 정리되어 널브러진 홀 내부는 핏자국으로 가득했고,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버티던 탱커의 목이 두둑하고 부러졌다.
털썩!
목을 비틀어 마무리를 지은 로덴이 그의 시체를 한쪽 구석에 내던졌다.
‘상당한 실력자다.’
심히 난감했던 그 상황 속에서 함께 싸워 봤기에 알 수 있었다.
아니,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거의 없는 초심자가 보기에도 방금 난입해 온 플레이어는 두말할 여지 없이 굉장한 고수였다.
최소 랭커급의 괴물.
물론 에일은 실제로 워로드의 랭커들을 본 적은 없기에 그들의 수준에 대해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자료로 접했던 기준으로 보자면 절로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건지는 둘째 치고,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에 에일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사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온 로덴이 먼저 입을 열었다.
“후, 다 끝났네요.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에일이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다소 위험했던 상황에서 그의 개입이 일을 훨씬 수월하게 만들어 줬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로덴에겐 의례적이고 진부한 빈말 같은 건 그의 성격상 맞지 않았고,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요즘 말 많던 그 이단심판관 맞죠?”
툭 던져진 로덴의 말에 에일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상대가 자신의 정체에 대해 눈치챘다는 것을 깨닫자,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자신임을 알고 접근한 건지, 아니면 우연히 마주치게 된 건지, 무엇을 노리고 먼저 접근해 온 건지.
자신을 도왔음에도 그를 향한 경계의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자 로덴은 너스레를 떨며 말을 이었다.“위에서 봤는데 역시 잘 싸우시던데요? 영상에서 봤을 땐 사실 어느 정도 편집 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대 이상이시더라고요.”
“어떻게 알아냈습니까?”
“하하, 이단심판관이라는 게 어디 흔한 직업도 아니고 그 정도 눈은 있어야죠.”
“뭐, 부정은 안 하겠습니다.”
지금 상대는 단순히 찔러보는 게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었고, 굳이 발뺌해 봤자 소용없었다.
“그러면…….”
“하지만 먼저 그쪽 정체를 밝히는 게 우선이겠죠.”
에일이 그의 말을 날카롭게 끊으며 말했다.
마주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듯한 얼굴에 아까부터 궁금증이 일었다.
기억력이 이렇게 허술한 편은 결코 아니었는데, 답답함이 다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자 씩 웃어 보인 로덴은 기꺼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고, 놀란 에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 * *
3세대 가상현실 게임, 워로드.
여기서 말하는 ‘세대’란 공식적인 분류까지는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업계 관계자와 플레이어들이 흔히들 사용하는 표현이었다.
워로드의 등장으로 이전 게임들이 완전히 저물고 지금의 시대가 열렸지만, 그 이전에도 찬란한 전성기를 구가하던 게임들은 존재했다.
1세대의 이스트혼.
1.5세대의 뉴월드.
2세대의 아르메니아.
3대 가상현실 게임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 세 가지 게임은 워로드의 등장 전까지만 해도 활발히 운영 중이었고, 많은 랭커가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최초의 가상현실 게임인 이스트혼이 모종의 사건으로 다소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자, 뒤를 이었던 뉴월드와 아르메니아가 전체 시장 점유율의 60퍼센트를 양분할 정도로 대표적인 게임이 되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두 게임엔 가장 많은 화제와 시선이 쏠렸고, 언제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많은 유명인사가 생겨났다.
물론 지금에야 워로드의 등장으로 존속이 위태로울 지경이지만, 현재 워로드의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랭커와 네임드 플레이어들 또한 그 두 게임 출신의 게이머가 많았다.
당장 6대 길드만 해도 그중 네 곳이나 그곳에서부터 명맥을 이어 온 명문 길드들이었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었다.
같은 장르의 가상현실 게임인 이상, 차세대로 넘어간다 해도 실력자는 여전히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
‘얼굴이 낯익다 싶더라니… 아르메니아의 하이 랭커 출신이었을 줄이야.’
로덴.
2세대를 주름잡던 아르메니아에서 한차례 돌풍을 일으켰던 네임드 플레이어의 이름이었다.
그의 유명세는 단순히 랭킹의 상위권을 차지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유저들에 비해 무려 2년을 늦게 시작하고도 막바지엔 하이랭커의 자리까지 차지한 어마어마한 실력자라는 점.
아르메니아를 플레이했던 게이머라면 당연히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명했고, 다른 가상현실 게임만을 플레이하던 이들도 그의 이름을 익히 들었을 정도로 유명세를 떨쳤던 자였다.
하지만 로덴은 어떠한 언질도 없이 돌연히 종적을 감춘 뒤, 무려 1년 반이 지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체 어째서 모습을 감춘 것인지, 또 대부분의 랭커가 넘어온 워로드에 나타나지 않는지, 정말 많은 이가 의문을 간직하던 참에 그가 30레벨대 사냥터인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에일도 당연히 그를 알고 있었지만, 왠지 전과는 조금 달라진 듯한 인상 탓에 한 번에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퀘스트 진행 중인 거 맞죠? 아마 마법진 파괴가 목표 같은데…….”
“비슷합니다.”
에일이 짤막하게 답했다.
자세한 정보는 알려 주지 않는다.
퀘스트를 중간에 강탈하려 하거나, 보상을 가로채려 공격해 올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물론 일반 NPC가 아닌 이단심문소의 퀘스트였기 때문에 의뢰 강탈은 불가능한 이야기나 다름없었지만, 그걸 모르는 상대가 어떤 꿍꿍이를 벌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가 익히 들어 온 아르메니아의 로덴이라면 뒤통수칠 만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지만, 과거의 평판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일.
더군다나 지난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보이지 않았던 이인 만큼 벌써부터 믿어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로덴도 그런 에일의 반응을 개의치 않아 했다.
중요한 퀘스트를 수행하던 중에 처음 마주친 유저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던전 안에 들어온 지 오래된 것 같지는 않은데……. 이 안에 마법진이 몇 개나 있는지는 아십니까?”
“몇 개라니…….”
“음? 설마 방금 게 끝인 줄 알았던 거예요?”
로덴이 조금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마법진이 하나가 아니라는 말인가 싶어 에일의 고개도 기울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이 맡은 의뢰의 목표는 마법진의 파괴가 아닌 ‘조사’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같은 종류의 마법진이라면 몇 개가 있든 큰 상관은 없었다.
“던전에 위치한 마법진은 총 네 곳… 아니 방금 하나 날아갔으니 세 곳이네요. 남은 세 마법진은 아직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위치야 제가 다 알아 놨고요.”
“그래서, 그 마법진들을 함께 파괴하자는 이야기인가요?”
“비슷하죠.”
“하지만 딱히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데요. 마법진의 위치야 저도 시간 좀 투자하면 찾을 수 있는 문제고, 뭣보다 마법진을 함께 찾는다 한들 정작 그쪽이 얻는 이득이 없을 텐데요?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밖에는…….”
“아니, 전혀요! 저를 그런 사람으로 보다니!”
에일의 말에 펄쩍 뛴 로덴은 잠시 뒤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음, 사실 마법진 파괴까지야 저한텐 부차적인 부분이죠. 핵심은… 바로 이곳.”
촤르륵!
로덴이 큼직한 지도를 펼쳐들었다.
그가 직접 던전을 탐사해 대략적으로 만들어 놓은 내부 지도였다.
기본적으로 모든 유저에게 지급되는 지도와는 다르게, 그가 꺼내든 지도는 별도의 아이템으로써 직접 가 본 곳을 채워 넣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엉터리로 채워 넣었을 가능성은 없었다.
에일은 갑자기 등장한 지도를 유심히 바라봤고, 원래의 짐작대로 이곳 지하 던전은 커다란 원형 구조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한 가지 예상 못 한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던전 정중앙에 커다란 빈 공간이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이건…….”
“역시 안목이 좋으시네.”
빈 공간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에일의 모습에 로덴이 감탄했다.
어지간한 던전들의 구조는 죄다 머릿속에 넣어 뒀던 에일인 만큼, 각종 워로드 던전들의 대략적인 패턴에 대해선 베테랑 랭커들 이상으로 훤히 꿰뚫고 있었고, 수상쩍은 부분이라면 단번에 포착해 내는 것이 가능했다.
“닳고 닳은 곳도 아니고 이번에 새로 나타난 신규 던전인데 전체를 다 뒤져 볼 동안 아무것도 없었어요. 누군가가 털어간 흔적도 없고, 마법진을 발견한 것 외에는 자잘한 아이템이 전부. 혹시나 숨겨진 통로가 있나 의심 가는 곳들을 샅샅이 뒤져 봤는데 없더라고요. 하지만 여기. 딱 봐도 뭔가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로덴이 의심이 가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가리켰다.
“아무래도 마법진 네 곳을 해제하는 게 선행조건인 것처럼 보이는데, 방금 그 검은 구슬같이 생긴 아이템으로 봐서는 관련 퀘스트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 같아요. 퀘스트가 없는 제 입장에서는 던전의 끝을 보려면 그쪽하고 힘을 합쳐야 한다는 소리죠.”
‘던전의 끝이라…….’
에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일린에게서 받아들인 의뢰의 내용은 마법진의 조사까지가 끝이었으니 이미 퀘스트는 완료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신규 던전의 끝을 본다는 것은 쉽게 뿌리칠 수 있는 제안이 아니었다.
이만한 규모의 던전이라면 높은 확률로 큰 보상이 따를 것이었고, 한 시라도 빨리 앞서나간 유저들을 따라잡아야 하는 에일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좋은 기회였다.
더군다나 모든 마법진을 미리 제거해 둔다면 퀘스트에 대해서도 추가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번 퀘스트의 의뢰자이자, 교단의 거물인 집행관에게 눈도장을 찍어 둘 기회이기도 했다.
“확실히…….”
“구미가 당기죠?”
로덴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