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광기에게 광기가 (6)
“휴, 여긴가?”
윗 층계에 올라선 남자가 기둥 뒤에 기댄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던전을 탐사하던 도중, 갑자기 급격히 늘어난 몬스터 떼에 이상을 느낀 로덴은 놈들의 흔적을 쫓아왔고, 스컬 하운드들을 끊임없이 뱉어내고 있는 마법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뭔가 재밌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골치 아픈 일이 터졌음에도, 오히려 구미가 당긴 로덴은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동료도 없이 혼자 발을 들인 그를 노리고 덤벼든 몇몇 플레이어 파티가 있었지만, 낮은 레벨대 탓인지 시시하기 짝이 없었고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수준 높은 싸움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즐거운 싸움을 기대했는데, 이곳 던전의 유저들로는 한참이나 성에 차지 않았다.
‘아르메니아 시절이 좋았지……. 언제 또 레벨 올리나.’
잠시 한숨을 푹 내쉰 로덴은 금세 고개를 털더니 검을 쥐었다.
마법진 주변엔 많은 수의 몬스터가 바글거렸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뛰어들어 모두 해치워 버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갑자기 반대편 난간에서 모습을 드러낸 에일이 아래를 향해 힘껏 뛰어내렸다.
‘으음?’
다른 유저가 반대편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는 건 둘째 치고, 저 아래로 혼자 뛰어든다는 것에 적잖이 놀랐다.
거기다 그는 계획 없이 무모한 싸움을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마법 스크롤을 사용해 주변 몬스터들의 개입을 틀어막았고, 범위 안의 몬스터들을 상대로도 압도적인 전투를 선보였다.
거의 쓸어버린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이런 곳에도 쓸 만한 실력자가 있었네.’
전투를 풀어 나가는 에일의 모습에 로덴은 눈을 빛냈다.
그간 육성을 꽤나 잘해 놓은 건지 화력이 아주 뛰어난 데다가, 무엇보다도 실력 자체가 이곳에서 상대하던 어중이떠중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장검이 머금은 강렬한 백색 불꽃은 결코 흔한 전투 방식이 아니었고, 자연스레 누군가가 연상되었다.
‘잠깐, 이단심판관……? 설마 워튜브에서 봤던 그 미친 심판관인가?’
로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왠지 모르게 눈에 익다 싶었더니 최근 화제가 된 에스마이어 지역의 광신도 플레이어가 맞는 듯했다.
그는 지역 사이를 이동하는 사이에 지루함을 달래려 워로드 사이트들을 뒤지는 흔한 버릇이 있었는데, 뇌리에 박히는 강렬한 컨셉 덕에 영상 속 주인공을 굉장히 인상 깊게 봤었던 기억이 있었다.
비록 비공개 처리되었던 얼굴은 알 수 없었지만, 장착하고 있는 방어구가 거의 똑같아 보였다.
무엇보다도 얼마 전 워튜브에 업로드되었던 영상 속에서 산적 산채를 털어 버리며 보여 줬던 전투 방식과도 아주 닮은 모습이었다.
중요 전력을 감추고 편집을 곁들인 탓에 일반 유저라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는 부분이겠지만, 그의 날카로운 눈썰미는 아주 작은 부분조차 놓치지 않았다.
“하하,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세상 참 좁아.”
로덴은 검을 쥔 자신의 손에 은근히 힘이 들어간 것을 느끼며, 구경을 계속 이어 나갔다.
자신과 비슷한 레벨대라는 걸 알고선 한번 직접 봤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진짜로 이루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조금 무섭긴 하지만…….’
영상 속 에일의 광적인 행동들을 모두 봤던 로덴이었으니, 혹시라도 그에게 당한다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는 점은 확실히 꺼림칙했다.
하지만 그때 로덴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변수가 생겨났다.
분명 이미 죽었던 유저들이 언데드가 되어 일어선 것이다.
그것도 언데드가 된 자들은 실제 유저가 조작이라도 하듯이 전략적인 움직임을 보였고, 가지고 있던 스킬까지 써 가며 그를 압박했다.
실제로 잘 짜여진 하나의 파티를 상대로 싸우는 것과 다를 게 없는 모습.
게다가 마법진 아래에서 계속해서 소환되고 있는 몬스터들까지 그를 물고늘어졌으니 혼자 상대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더욱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한들 혼자라는 한계를 극복하기는 어려운 일이었고, 되살아난 파티원들이 평균 이상의 전력인 데다가 방해자의 숫자까지 많았다.
누구라 해도 쉽지 않은 구도였고, 에일 또한 곤경에 처한 모습이었다.
“이걸 어쩐다…….”
* * *
쩌엉!
“크윽……!”
강한 충격을 받은 에일이 주춤 물러섰다.
예상외로 언데드가 된 유저들의 실력이 상당했다.
일반적인 30레벨대 유저의 수준은 아니었다.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압박하면서 무리한 공격을 펼치지도 않고, 한 명뿐인 검사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확실히 PVP에 대한 기본기는 충실히 갖추고 있는 자들이었다.
게다가 그들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뒤편에서 계속 생겨나고 있는 스컬 하운드들까지 달려들고 있는 마당이었으니, 예상 밖의 난적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젠장,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단발성 마법 스크롤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이번 ‘결투의 원’ 마법도 유지 시간이 긴 편은 아니었다.
이대로 질질 시간을 끌리다간 바깥의 몬스터들까지 일제히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길 것이다.
언데드화된 유저들을 피해 마법진을 먼저 노려보려 해도 그들은 물론 몬스터들까지 마법진을 보호하는 모양새로 진형을 짜 둔 터라 마땅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천 포인트나 써 버리면 수지가 안 맞아.’
가급적이면 공헌도의 과소비는 피하는 편이 좋았고, 에일은 조금 더 과감한 움직임을 보였다.
최우선 목표는 물론 거슬리는 마법사.
공격에 가장 취약한 클래스이기도 했고, 상대 파티에 힐러가 없는 이상 당연히 첫째로 노려지는 역할군이었다.
그리고 그건 모든 유저가 알고 있는 사실인바, 어김없이 에일을 마크한 탱커가 길을 막아섰다.
하지만 기사의 검이 내려치는 순간, 에일은 역극으로 공격을 회피하는 동시에 그의 뒤로 돌았고, 가속된 움직임을 그대로 가져가며 마법사에게로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촤악!
에일은 길을 막던 스컬 하운드 둘을 호쾌하게 베어 버렸다.
하지만 곧바로 양옆에서 달려드는 두 전사 유저는 한 번에 정리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렇다면 피한다.’
에일은 미리 품속에서 꺼내 뒀던 작은 포션을 단숨에 삼켰다.
[포션의 효과로 ‘순간 가속’ 상태가 적용됩니다!]
[속도가 일시적으로 대폭 상승했습니다!]
파앗!
비약적으로 속도가 상승한 에일은 그들을 순식간에 따돌렸고, 후방에 있던 마법사에게까지 쇄도해 단숨에 베어 버렸다.
일반적인 도핑 포션과는 확연히 다른 효과.
보다 짧은 지속 시간을 지닌 대신, 스탯 상승 폭을 훨씬 증가시킨 특수 도핑 포션이었다.
효과가 지속되는 시간이 너무 짧아 실전에 활용하기 곤란하다는 평도 있는 물건이었지만, 높은 동조율을 바탕으로 그 까다로운 무기 스왑까지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에일에게는 포션을 꺼내드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기다 치유 포션의 경우 마셔야 하는 내용물이 비교적 많아 치열한 전투 중에는 사용하기 곤란했지만, 들어 있는 병의 크기부터가 훨씬 작은 도핑 포션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콰악!
그렇게 성공적으로 빈틈을 잡아낸 에일은 마법사의 목을 통째로 베어 버렸다.
그리곤 진짜 목표를 향해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발을 뻗었다.
지금도 몬스터를 뱉어내고 있는 마법진을 우선적으로 파괴해야 했고, 마법진만 무력화시킨 뒤 적당히 몸을 피해도 목적은 달성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에일은 순간 자신의 몸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포션의 효과가 끝나고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다.
방금의 속도는 물론, 포션을 마시기 전보다도 움직임이 느려진 에일은 이를 꽉 물었다.
랭커들마저도 꺼리는 장비 스왑까지는 아니더라도, 소형 포션 활용 정도는 가능한 실력자들의 숫자는 많았다.
하지만 그런 이들 사이에서도 단발성 특수 도핑 포션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 이유, 순간적으로 스탯을 폭발시켜 주는 포션들은 하나같이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반동을 지니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에일도 그 사실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고, 뭔가 적극적인 변수가 필요한 게 아닌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이번 전투에 포션을 사용했다는 것은 효과 뒤에 일어날 반동까지 모두 계산이 끝났다는 것이다.
두웅!
[마법진이 일시적으로 무력화되었습니다. 파괴가 모두 끝날 때까지 몬스터들로부터 영혼 결정을 방어해 내십시오.]
[마법진 파괴까지 남은 시간 ‘00:05:28’]
“뭐……?”
이미 충분히 확보해 둔 거리 덕에 순식간에 몬스터들을 돌파해 낸 에일은 검은 구슬을 마법진 중앙에 꽂아 넣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앞에 나타난 메시지는 예상과 다른 것이었다.
‘5분을 막아 내라고?’
“크르르륵…….”
홀 안에 있는 수많은 언데드의 시선이 모두 한데로 쏠렸다.
무려 5분이 넘는 시간 동안 마법진 해체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것.
일시적 무력화라는 말답게 스컬 하운드의 리젠은 멈췄지만, 그 시간 동안 저 모든 몬스터를 상대하며 버텨내야 한다는 말이었다.
결투의 원 마법의 효과 지속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데다가, 퀘스트를 위해 마법진만 해결하고 적당히 몸을 빼내려던 에일의 계획이 틀어져 반동이 고스란히 몸에 남아 있었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
아직 네 명 남은 언데드 유저들이 천천히 거리를 좁혀 왔다.
‘젠장…….’
이대로라면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고, 공헌도를 비롯해 많은 지출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서걱!
난데없이 위층계에서 뛰어내려 나타난 한 명의 플레이어가 언데드가 된 두 명의 파티원을 단숨에 베어 버리고는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사방에서 달려드는 스컬 하운드들을 베어 가며 에일의 앞까지 도착하기까지, 한 치의 군더더기 없는 간결하고 담백한 동작으로 돌파해 냈다.
그 깔끔한 솜씨에 에일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앞에 선 로덴은 그에게 등을 보인 채 주위를 둘러싼 몬스터들에게로 검을 치켜들었다.
“퀘스트 진행 중이죠? 저도 발 좀 걸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