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광기에게 광기가 (5)
쿠구구궁!
던전 전체를 한차례 뒤흔든 진동은 내부에 있던 모든 유저가 눈치챌 만큼 크게 생겨났고, 그중엔 중심부에 가까워져 있던 에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복도를 채운 광신도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벽면의 얇은 디딤대에 붙어 움직이고 있던 에일은 순간 균형을 잃을 뻔했지만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떨어질 뻔했네……. 무슨 일이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자기 던전이 뒤흔들렸을 리는 없다.
아마 누군가가 새로운 이벤트가 활성화될 만한 트리거를 건드린 모양인데, 에일로서는 그리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뭔가 사건이 터졌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에일은 신경을 곤두세웠고, 곧 요란하게 들려오는 소리와 마주할 수 있었다.
콰앙!
키에에에엑!
‘미친……!’
복도 한 면의 문이 박살 나며 나타난 괴물들의 모습에 기겁한 에일은 바짝 몸을 숨겼다.
엄청난 수의 몬스터 떼가 아래를 지났고, 주변을 초토화시키며 질주를 이어 나갔다.
느닷없이 등장한 이 정체불명의 언데드 몬스터들은 끌려가던 주민들을 공격함은 물론 황혼회의 광신도들마저 집어삼켰다.
원체 많은 수에 광신도들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휩쓸려 나갔고, 에일은 멍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내려다봤다.
에일은 서둘러 복도를 가득 채운 괴물의 정보를 확인했다.
놈들의 이름은 스컬 하운드, 누더기가 된 살갗 탓에 하얀 뼈가 군데군데 훤히 드러나 보이는 30레벨의 짐승형 언데드 몬스터였다.
‘이런 몬스터가 있다는 소리는 없었는데… 대체 무슨 짓을 벌여 놓은 거지.’
딱 봐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고, 에일은 느닷없이 생긴 변수에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히 몬스터가 나타난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마치 안개가 끼듯 바닥을 통해 낮게 깔려온 정체모를 검은 기운이 주변에 자리 잡았다.
그러더니 괴물들이 한차례 지나간 자리에서, 분명히 죽었던 광신도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으어어…….”
‘이건 또 무슨……?’
검은 기운을 머금은 광신도들이 언데드가 된 채 되살아났다.
정보창 상으로 보이는 레벨과 이름은 그대로였지만, 속성이 변하면서 외형이 확연히 변했기에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창백해진 피부와 충혈된 눈동자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단순히 죽은 자가 되살아났다는 사실을 제하고도, 전체적으로 인스턴스 던전인 ‘음모자의 동굴’에서 마주한 도적단의 부활 패턴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설마 저번의 월드 퀘스트와 관련되어 있는 건가. 하긴… 불가능한 소리는 아니지.’
에일은 운 좋게 얻은 퀘스트 아이템을 통해 블러디 핸즈와 엮여 퀘스트에 발을 들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굉장히 방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월드 퀘스트라면 지역 곳곳에 온갖 사건들이 엮여 있는 게 당연했다.
물론 아직 확신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지만, 에일의 촉이 반응하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한다…….’
에일이 흐느적거리는 광신도들을 내려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아직 제대로 밝혀진 바도 없는 신규 던전에서 이런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대책 없이 던전의 장치를 잘못 건드렸다면 경우에 따라선 안에 있는 유저들이 전멸할 만한 상황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었고, 원래대로라면 괜한 일에 휘말리기 전에 빠져나가는 것이 안전했다.
하지만 지금의 에일로서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일단 교단의 집행관에게서 받은 중요한 퀘스트가 달려 있는 데다가 월드 퀘스트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도 생겼다.
당연히 이를 포기하고 나갈 수는 없었고, 직접 문제를 해결해 내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마법진에 대한 조사만큼은 확실하게 끝마치기 위해 에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변수, 아무래도 마법진이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높겠지.’
몬스터들의 시선을 끌지 않도록 기척을 감춘 에일은 검은 기운이 스며들어 왔던 방향으로 이동했다.
움직일수록 점점 짙어지는 기운으로 보아 원인에 가까워지고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많은 수의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처음엔 단순히 나타난 몬스터의 숫자가 많다 정도로 생각했는데, 가면 갈수록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게 오래 방치했다간 이 넓은 지하 던전을 통째로 채울 기세였다.
‘설마 소환되는 몬스터에 숫자 제한도 안 걸려 있는 건가.’
반대편에선 유저들의 비명이 희미하게 들려오는 걸 보니 희생양이 되어 버린 듯했다.
숫자로 보아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리젠이라고 보긴 어려웠고, 아무래도 몬스터가 나타나는 근원지를 직접 찾아 멈춰야 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최악의 패턴이 걸렸군. 조금 서둘러야겠어.’
* * *
키에에엑!
마법진 아래에 뚫린 검은 구멍 속에서 스컬 하운드들이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홀 안은 이미 괴물들로 한가득 차있었다.
하지만 놈들은 1층을 채우고 서 있거나 사방으로 흩어질 뿐, 위쪽은 신경 쓰지 않았고 홀의 윗층 난간 위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에일은 다행히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역시… 먼저 들어온 파티가 마법진을 건드려 버린 건가.’
커다란 마법진을 발견한 에일이 눈빛을 빛냈다.
아무래도 광신도들이 제물을 바치며 오랜 기간 준비해 놓은 고위 소환진인 듯했는데, 개체수에 한도가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정말 세상을 뒤덮을 만큼 끝도 없이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지금의 기세로 보아 던전 하나를 가득 채우는 건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워로드의 흑마법에서 사람의 영혼은 상당히 연비가 좋은 재료였으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에일의 입장에서 그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저 많은 몬스터를 뚫고서 소환진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머리를 굴렸다.
우우웅!
그때, 사냥터 지역에 입장하기 전, 미리 품에 넣어 뒀던 검은 구슬이 강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꺼림칙하긴 했지만 구슬을 꺼내 든 에일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흑마법사들의 영혼을 갈아 넣었다던 검은 구슬은 울음을 멈추지 않으며 마법진과 공명 반응을 일으켰고, 서로를 끌어당기려 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걸 사용하라는 건가.’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기에 보호용도인 줄 알았건만, 이번 퀘스트에선 조금 다른 방식의 쓸모가 있는 모양이었다.
계산을 끝낸 그는 검은 구슬을 바로 쥐더니 난간을 뛰어넘었다.
타악!
힘껏 뛴 에일은 마법진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착지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탓에 홀 안을 가득 채운 몬스터들의 시선이 온통 바닥에 내려선 에일에게로 향했다.
놈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새로운 창을 띄운 에일의 손이 화면을 조작했다.
[사도 특전, ‘공헌도 상점’이 열립니다!]
[사도의 자격으로 지역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검색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보유 공헌도: 5,410]
[구매가 완료되었습니다!]
[상급 결투의 원 스크롤 - 35Lv]
[공헌도, 500포인트를 소모하였습니다.]
빛과 함께 나타나 왼손에 쥐인 백색의 스크롤.
에일은 아래로 주르륵 펼쳐진 스크롤을 곧바로 검으로 찢어 발동시켰다.
화아악!
백색의 원이 바닥에 생겨났고, 둥그런 가장자리에 일렁이는 성화의 벽이 생겨났다.
에일을 중심으로 주변을 둘러싼 화염벽은 그 모양새대로 바깥의 스컬 하운드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투의 원.
시전자를 주변의 방해로부터 차단해 주는 신성 마법이었다.
다만 접근을 막을 뿐 원거리 공격을 틀어막지는 못하기에 한계가 뚜렷했고 대중적인 방식은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적당한 때에 사용하면 충분히 제값을 해내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결투의 원은 범위 안에 있는 적들에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고, 직접 손을 써야만 했다.
“키이이익!”
스컬 하운드들이 에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홀 전체에 있던 놈들에 비하면 확연히 적긴 해도, 범위 안에 들어 있는 몬스터들만 따져도 꽤나 부담이 갈만큼 많은 수였다.
하지만 녀석들을 앞에 둔 에일은 가벼운 마음으로 검을 뻗었다.
화르르륵!
성화가 타오른 장검이 스컬 하운드들을 갈랐고, 놈들은 베이는 족족 화염에 휩쓸리며 나가떨어졌다.
저 숫자에 부담을 가질 만한 건 일반적인 케이스일 때의 이야기였고, 에일은 그에 해당되지 않았다.
상대에 비해 높은 레벨과 속성에서 비롯된 상성의 우위는 일 대 다 싸움을 훨씬 더 수월하게 만들어 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에일이 지니고 있는 무기.
영웅급 무기 아이템, 누이르 장검의 화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기본 스펙이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장검에 부가된 특수 효과 ‘만월’은 기본적으로 에일이 가하는 모든 성속성 공격의 데미지를 15퍼센트 증가시키는 데다가, 언데드를 대상으로 35퍼센트의 추가 데미지까지 입히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합연산 방식을 따르는 워로드의 시스템상, 무기 효과만으로 언데드에겐 1.5배의 데미지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탓에 몬스터들은 성화에 당하는 순간 살살 녹아내리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투의 원 내부에 있던 스컬 하운드들의 수는 빠르게 줄어나갔다.
마법진에서 몬스터들이 소환되는 속도가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다.
쩌엉!
갑작스레 측면에서 날아든 검을 에일이 장검을 들어 막았다.
‘유저……?’
습격자의 정체를 확인한 에일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몬스터들 아래에 쓰러져 있어 전멸한 줄만 알았던 유저들이 하나둘 일어났고, 에일을 향해 무기를 집어 들었다.
‘아니, 언데드군.’
에일은 그들 파티가 모두 언데드로 변했다는 걸 곧바로 눈치챘다.
광신도들이 되살아났을 때처럼 똑같은 변화가 눈에 보였다.
붉은 안광을 빛내는 다섯 명의 유저를 마주한 에일은 일이 조금 귀찮게 되었음을 직감하고 검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그 순간, 정면에 서 있던 탱커가 예상 밖의 움직임을 보였다.
콰앙!
순식간에 발을 박차며 거리를 좁혀든 그는 힘차게 충돌해 에일을 튕겨냈다.
‘스킬이라고……?’
바닥을 구른 에일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기사 클래스들이 많이들 가지고 있는 돌진 계열의 스킬, 상대의 직업과 대조해 조금만 더 생각한다면 예상 못 할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PVP 상황에서의 이야기였다.
아무리 유저의 시체가 되살아났다 해도 자아를 잃고 언데드가 된 이상, 몬스터의 방식을 따르게 되기 마련이었고 스펙 좋은 좀비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대는 아예 유저로서 보유한 스킬을 직접 사용했다.
유저의 시체가 되살아나 언데드가 된다는 상황 자체도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은 아예 유래가 없는 경우였다.
‘설마 월드 퀘스트와 관련이 있는 건가?’
화르르륵!
길게 고민할 새도 없이 후방의 마법사가 쏘아 보낸 불덩이가 날아들었다.
기겁한 에일은 급히 몸을 날려 광역 마법을 피했고, 옆에서 달려드는 스컬 하운드 하나를 베어 갈랐다.
‘만약 시스템상으로도 몬스터가 아니라 유저 취급이라면…….’
그 짧은 틈에 한 가지 가설을 떠올린 에일은 곧바로 스킬을 발동시켰다.
사도 전용 스킬, 이단 지정.
치이잉!
언데드가 된 유저들의 머리 위에 선명한 이단의 낙인이 새겨졌다.
그들이 일반 몬스터 취급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이야기.
에일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기왕이면 아이템도 PVP처럼 두둑이 챙겨 줬으면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