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광기에게 광기가 (4)
유저의 손이 타지 않은 필드 던전은 온갖 아이템과 보상들을 머금고 있다는 건 워로드의 기본 상식이다.
탐험을 업으로 하는 이들이 최초 발견에 목을 메고, 파악된 정보가 없어 위험한 신규 던전을 모두가 앞다퉈 탐사하려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에일은 쪼그려 앉은 채 텅 빈 상자만을 마주하고 있었다.
“여기도 없군.”
원래 아이템이 한가득 들어 있었을 법한 이 붉은 상자엔 잠금 장치가 인위적으로 따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즉, 애초부터 텅 비어 있던 게 아니라는 것.
누군가 이 방에 들어와 전리품들을 이미 챙겨갔다는 뜻이다.
단지 여기뿐만이 아니라 다른 방도 마찬가지였고, 던전 안 온갖 공간에 유저가 지나간 흔적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이 정도면 한두 팀이 아니야. 최소 열 팀은 들어와 있다고 봐야 해. 다른 유저들이 바보도 아니고, 일주일이나 지난 지역이라 느낌이 쎄하긴 했지만……. 이거 위험할 수도 있겠어.’
에일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던전의 아이템이 탐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어서 빨리 마법진의 조사를 끝내 두는 편이 좋아 보였다.
교단과 이단심문소는 물론 집행관과의 관계도까지 걸려 있는 퀘스트였으니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다.
끼익!
에일은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던전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음침한 공간이었지만, 몇몇 군데를 제외하면 움직이는 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광신도들의 눈을 피해 다니기에 도움이 되었다.
아무리 에일이라도 혼자서 저 많은 광신도들을 다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
정체불명의 마법진 조사까지가 맡은 임무였으니 불필요하거나 무리한 전투는 자제할 계획이었다.
콰악!
“커흡……!”
입구를 지키고 있던 광신도의 허리춤에 장검이 틀어박혔고, 에일은 그의 입을 틀어막은 뒤 파고든 검을 비틀었다.
장검이 빙글 돌아가면서 광신도가 마구 몸부림쳤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어느새 축 늘어진 시체를 적당히 보이지 않을 구석에 던져두고, 에일은 더 안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부를 탐사하면서 아이템만 뒤지고 있던 게 아니었다.
이곳 지하 던전이 중심을 빙 둘러싼 원형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내부로 향할수록 광신도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중앙 부근에 뭔가가 있을 거라는 것쯤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도 던전의 보스몹 혹은 중요 아이템이 그곳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에일이 찾고 있는 마법진 또한 거기 있을 가능성도 매우 높았다,
‘우연히 들어온 경우였다면 고생길이 훤했겠지만…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지.’
던전 구조가 상당히 크고 복잡한 데다가, 몬스터들의 개체수도 많아 탐사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에일은 교단의 집행관인 아일린에게서 퀘스트를 받은 입장이었고, 미리 이단심문소의 정보원이 이곳의 동태를 파악해 보고서로 남겨 둔 덕에 약간의 길목과 지름길들에 대해 숙지하고 있었다.
물론 파악된 길목은 몇몇 군데일 뿐, 자세한 지리까지는 정보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에일이 스스로 찾아가야 했다.
다만 불평할 입장은 결코 아니었다.
먼저 이곳에 발을 들인 다른 유저들에 비해 훨씬 후한 어드밴티지를 받은 부분이었고, 에일에겐 이만한 정보만으로도 던전을 돌파할 만한 능력이 있었다.
‘어디 속도를 내 볼까.’
* * *
“제발…….”
“끄아아악!”
넓은 홀 가운데에서 주민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사람들은 광신도들의 손에 이끌려 무릎이 꿇려졌고, 저항하는 이들은 가차없이 창에 꿰뚫렸다.
제물로 사용하기 위해 납치당한 이들은 그대로 검은 마법진 위에 주르륵 놓였다.
파아앗!
검은 복면을 뒤집어 쓴 광신도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마법진에서 섬뜩한 붉은빛이 솟아나 홀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주민들은 심한 고통에 몸부림쳤고, 그들의 영혼이 마법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싸늘한 주검이 된 주민들은 바닥에 널브러졌다.
황혼회의 광신도들은 그들의 시체를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갔고, 마법진에 먹일 다음 제물을 데려오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한편에선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으아, 살벌한데?”
“광신도들 아니랄까 봐 단단히 미친 짓거리를 벌이고 있네.”
홀 위의 난간에 몸을 숨긴 채, 그 광경을 바라보던 파티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장 먼저 숨겨진 던전을 발견하고, 선두로 내부에 진입한 그들 파티는 바깥 조사를 마치고 깊숙한 곳까지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저 마법진이 뭔가 열쇠 같은데.”
“그래. 확실해 보여.”
파티원들이 피를 머금은 마법진을 보며 시선을 나눴다.
제물을 바치고 있는 저 수상한 마법진은 던전 안에 네 개나 존재했고, 하나같이 쉽게 찾을 수 없도록 깊숙한 내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다 제물 공양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조차 최소 서른 명 가까이 되는 광신도가 그 주위를 지키고 있었다.
웬만하면 맞닥뜨리지 않는 게 좋은 숫자였지만, 오히려 역으로 생각하면 마법진 주위를 지키고 있는 놈들의 모습은 수상하게 여길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 파티는 다른 곳들을 포함해 던전의 거의 모든 곳을 조사했는데도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누군가 이미 던전을 털어 간 흔적이 있던 것도 아니고, 저 마법진을 조사해 보는 수밖에 없는 상황.
2세대 게임 아르메니아에서부터 시작해 나름 많은 경험을 함께 쌓아 온 그들은 다음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다.
“론, 캐스팅 시작해. 한 방 크게 먹이고 시작하자고.”
“오케이.”
파티장의 지시에 론이라 불린 마법사 플레이어는 곧바로 자세를 취했다.
일반적인 마법사 계열은 한 방을 준비하는 캐스팅 시간이 오래 걸리는 대신, 그만큼 강력한 위력의 공격을 구사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다른 직업군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효율적인 대단위 범위 공격 또한 얼마든지 가능했고, 기습적인 선제공격이 이루어질 경우 가장 강력한 클래스이기도 했다.
화아악!
정신을 집중한 마법사의 캐스팅이 끝나자 강렬한 열기가 스태프의 끝에서 퍼져 나왔다.
곧 이글거리는 커다란 불덩이가 공중에서 생겨났고, 마법진 주위에 서 있던 광신도들에게 떨어졌다.
콰아아앙!
오래 공을 들인 캐스팅 시간과 많은 마나 소모량에 걸맞게 그가 쏘아 보낸 광역 마법의 위력은 굉장했다.
불덩이에 직격당한 수 명의 광신도는 그대로 숨이 끊어졌고, 후폭풍에 휩쓸린 자들은 불꽃에 타오르며 마구 바닥을 뒹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방심하고 있었으니, 갑작스러운 대형 범위 마법에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터엉!
그때 난간에서 뛰어내린 파티원들이 일제히 광신도들에게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기사 클래스의 탱커가 돌진 스킬을 사용해 그들의 진형을 붕괴시켰고, 그 틈에 다른 파티원들이 놈들을 베어 갈랐다.
“기… 기습이다!”
“크아악!”
무기를 빼 든 광신도들이 뒤늦게 대응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이 던전 심층부에 가장 먼저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건 요행이 아니었다.
불가피한 사정 탓에 다음 세대인 워로드로 넘어오는 시기가 늦어졌기에 그렇지, 지금의 파티원들은 모두 충분한 실력자였고, 오픈 당시부터 워로드를 플레이했다면 훨씬 더 높은 레벨을 가지고 있을 자들이었다.
불과 다섯 명의 인원이었지만 효율적인 움직임과 좋은 팀워크를 보여 줬고, 기습의 효과를 살리며 놈들을 정리해 나갔다.
화르르륵!
마법사의 두 번째 캐스팅이 끝나자 다음 마법이 광신도들을 삼켰다.
퍼져 나온 불길이 잔당을 휩쓸었고, 그를 마지막으로 혼란했던 전투가 단숨에 끝이 났다.
불과 1분, 서른이 넘는 몬스터를 모두 정리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달칵!
숨을 돌리며 두터운 투구를 벗어든 파티장은 가장 먼저 홀의 중앙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의 영혼을 삼켰던 검은 마법진이 큼직하게 그려져 있었다.
“론, 이제 그만 내려와!”
“알았어!”
전투 중 홀로 난간 위에 남아 있던 마법사도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자 광신도들의 시체를 열심히 루팅하던 팀원들도 곧 그에게로 다가왔다.
“어때? 뭔가 있어 보여?”
“글쎄. 보기만 해서는 모르겠는데.”
파티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관련 퀘스트나 단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기사클래스인 그의 눈만으로는 뭔가를 알아내긴 힘들었다.
그러자 마법진을 둘러싼 파티원들의 시선은 자연히 그들 중 유일한 마법사 클래스인 론에게로 향했다.
“악마 계통의 흑마법이라서 나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알 방법이 없어. 하지만 직접 발동을 시킬 순 있을 거 같네.”
“이걸 발동시킨다고?”
“위험할 거 같은데…….”
파티원들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마법진을 내려다봤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사람의 영혼을 흡수하던 마법진이다.
딱 봐도 위험한 장치임은 자명했고, 사전 정보도 없이 섣불리 건드렸다간 위기에 빠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었다.
“뭔가 꺼림칙하긴 하다만……. 기껏 여기까지 와서 가만히 물러날 순 없잖아? 모험을 해 봐야지.”
“론 말이 맞아. 네 개의 마법진 말고는 별다른 단서도 없고, 던전의 퍼스트 클리어가 걸려 있는 문제야. 이만한 리스크는 충분히 감당할 만해.”
파티장이 그의 뜻에 동조하며 의견을 거들었다.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파티원들은 하나둘 결정을 받아들였고, 뜻이 한데로 모아졌다.
“그럼 시작한다.”
앞으로 나선 마법사가 마나를 불어넣으며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쿠구구궁!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지하 던전 전체가 한차례 뒤흔들렸다.
갑작스러운 진동에 파티원들은 우르르 물러섰고, 커다란 마법진이 자리 잡고 있던 자리에선 검은 구멍이 뚫렸다.
“뭔가 나오려는 건가……?”
“다들 준비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파티원들은 무기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은 구멍 안에서 언데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키이이익!
“웨이브 디펜스인가?”
“다들 버텨!”
시커먼 괴물들이 파티원들을 향해 달려들었고, 격렬한 전투가 시작됐다.
몬스터들은 검은 구멍 사이로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은 엄청난 수의 적을 상대해야만 했다.
쏟아지는 몬스터들을 막아 내야 하는 몬스터 웨이브.
워로드의 던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패턴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게임에서 많이들 사용되는 개념이었다.
정해진 시간 동안 쓰러지지 않고 버티거나, 통로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을 모두 쓰러뜨리는 것이 일반적인 두 패턴.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검은 통로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을 계속해서 베어 나갔음에도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끄아아악!”
“젠장, 론이 당했어!”
다수를 상대로 한 만큼 후방 보호에도 한계가 있었고, 공격에 취약한 마법사가 먼저 쓰러졌다.
아무리 실력과 팀워크가 좋다한들 체력과 집중력엔 한계가 있는 법.
“대체 이건 언제 멈추는 거야?”
“조금만… 조금만 더 버…….”
퍼억!
몬스터의 수는 계속해서 불어나는 상황에서 파티원 하나가 쓰러지자 균형은 급속도로 무너졌다.
파티원들이 하나둘 바닥에 쓰러졌고, 괴물들의 발아래에 짓밟혔다.
“크헉…….”
“말도 안 돼. 이런 걸 어떻게 깨라는…….”
콰직!
전위를 막아서던 기사의 투구가 매섭게 찌그러졌다.
체력이 바닥난 파티장은 무릎을 꿇고 쓰러졌고, 그를 마지막으로 모두가 전멸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몬스터들의 웨이브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고, 던전 안을 계속해서 채워 나갔다.
스스스.
통로에서 풀풀 흘러나오던 검은 기운이 사망한 파티원들의 시체로 흘러들어갔다.
창백해진 피부가 썩어 들어간 유저의 시체들은 곧 뒤틀린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으으…….”
유저의 텅 빈 눈빛이 허공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