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광기에게 광기가 (3)
“후우, 푹푹 찌네 날씨가.”
수풀 사이를 헤쳐 나가던 에일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는 버려진 사원이 위치한 지역인 울창한 밀림 사이를 걷고 있었고, 갑자기 확 올라간 기온에 고생을 하던 중이었다.
수통을 들이켠 에일은 열을 식히기 위해 머리 위에도 물을 뿌렸다.
흥건해진 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긴 에일은 지도를 펼쳐들었다.
밀림 지역 내부를 자세히 비추도록 확대해 둔 지도는 에일이 미리 구역마다 쳐 둔 동그라미로 표시가 새겨져 있었다.
‘그래도 얼마 안 남았군.’
에일은 다시 방향을 고쳐 점찍어 둔 목적지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런 빽빽한 밀림 속에서 방향을 찾기는 쉽지 않았지만, 자신의 현재 위치가 지도 위에 표시되어 있으니 방향감각이 뛰어난 편인 에일의 입장에서는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신규 사냥터, 버려진 사원.
정말 말 그대로 사원 자체만을 뜻하는 단어는 아니었다.
중심부에 위치한 사원을 둘러싼 이 광활한 밀림 지역까지도 버려진 사원 지역이자 사냥터로통칭 되었고, 실제로 이곳 전체엔 황혼회의 광신도들이 침입자들을 습격하려 바글바글 숨어 있었다.
바로 이 녀석들처럼.
“죽어라!”
무기를 뽑아든 광신도들이 수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곳곳에 매복해 있던 검은 로브의 광신도들은 일곱을 넘었다.
기척을 숨긴 채 감쪽같이 숨어 있던 자들이라 당황할 만도 했지만, 에일은 당황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만 벌써 수십 번 겪은 듯한 패턴이었다.
콰직!
앞서 뛰쳐온 광신도의 머리가 반으로 쪼개졌다.
굳이 성화 스킬을 사용도 하지 않았음에도 적중 부위에 따라 한 방에 정리가 되었다.
이번에 루에게서 얻은 아슬론 장검은 역시 영웅이라는 등급에 걸맞게 절륜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사이 단검 하나가 허리춤을 스쳐 지나갔지만, 에일은 여유롭게 놈의 멱살을 덥석 잡더니 반대편에서 달려들고 있던 광신도에게로 그대로 던져 버렸다.
꽈당!
그렇게 남자 둘이 한데 엉켜 있는 사이, 에일은 나머지 녀석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
에일의 레벨은 35이었고, 이곳 광신도들의 평균 레벨은 34.
이제 동레벨대의 일반 몬스터 정도로는 총애와 광기 스탯의 높은 보너스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끄아악!”
등에 검이 박힌 마지막 광신도가 바닥에 쓰러짐으로서 싸움은 금세 끝이 났다.
일방적인 결과였다.
가볍게 모두를 제압하고, 그중 다섯은 의도적으로 목숨을 끊지 않고 생포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의 운명은 모두 똑같았다.
빈사 상태인 그들의 목 위에 밧줄을 곱게 매어 준 뒤, 나무 위에 주렁주렁 매달아 두었다.
투욱, 버둥거리던 광신도들의 움직임이 금세 멎었다.
[신앙심이 한층 더 깊어짐을 느낍니다.]
[신앙심 스탯 +0.1]
[광기 스탯 +0.1]
‘확실히 사람들한테 많이 보여지는 처형 방식이 효과가 좋은 것 같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본 에일이 생각했다.
그는 일반 몬스터들을 사냥하면서도 언제나 틈틈이 스탯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체감상 사람들의 눈에 많이 띄었을 때 더 빨리 스탯이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특히 관련 작업을 하고 있지 않을 때도 갑자기 스탯이 오른 적이 있던 걸 본 뒤, 에일은 형벌 집행 후 남겨 둔 흔적들도 스탯 상승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챌 수 있었다.
집행관 아일린이 자신에게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경외를 주는 것 또한 이단심판관의 사명이라면 이런 현상도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
‘집행 장소를 잘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겠어.’
아무래도 도시 한복판에서 이 난리를 치는 건 무리가 있어 보였지만, 그래고 기왕이면 같은 사냥터라도 조금 더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닐 자리에서 집행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물론 아무래도 한눈에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건 화형이 제격이긴 했지만,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이곳에서 화형까지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거의 다 왔는데…….’
에일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입구를 찾았다.
지도에 표시해 둔 목적지가 바로 이 부근에 있었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유저는 사원 내부나 외곽 지역을 위주로 돌아다니고 있겠지만, 에일의 목적은 사원이 아닌 지하의 비밀 시설이었다.
사냥을 하러 온 게 아닌 이상, 남들이 가는 방향으로 향할 이유는 없었다.
“찾았다.”
두터운 나무 뒤에 숨겨져 있던 단단한 두 개의 바위 사이, 그 틈 속에 숨겨진 입구가 뚫려 있었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만한 크기에 나무 밑동엔 작은 표식이 그려져 있었다.
임무에 앞서 아일린에게 전해 들었던 사항 그대로였다.
걱정을 접어 둔 에일은 주저하지 않고 그리로 몸을 던졌다.
통로 내부엔 밑으로 향하는 미끄러운 경사면이 존재했고, 에일은 균형을 잡아 가며 그를 타고 내려갔다.
타악!
숨겨진 던전의 내부는 조용했다.
지하 시설 내에 엄청난 수의 광신도가 있을 거라 했지만, 지금은 띄엄띄엄 놓여 있는 횃불과 비춰지고 있는 낡은 시설밖에 없었다.
에일이 방금 들어온 통로는 개미굴처럼 시설 내부로 이어지는 수많은 비밀 입구 중 한 곳에 불과했고, 그래서 특별히 입구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보초는 없던 것이다.
‘촬영 시작.’
안으로 들어선 에일은 곧바로 녹화를 시작했다.
워튜브에 올릴 다음 영상이 필요했고, 이번 퀘스트의 광신도들을 상대로 영상을 건지려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에일의 영상 업로드는 장기적인 계획을 두고 행한 일인 만큼, 유명세를 모아 뭔가를 본격적으로 써먹어 보려면 지금 정도의 단발성 화제에 그치는 것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스스로 원하던 수준의 유의미한 효과를 거두려면 빠른 성장과 업로드를 병행하며 이미지를 계속 쌓아 나가야 했다.
이제 막 발걸음을 뗀 수준에 뭔가를 바라기는 무리였으니, 당연한 것이다.
‘괜찮은 영상이 뽑혀 줘야 할 텐데.’
녹화본 전체를 올리는 것도 아니고 편집 작업이 들어가니 부담은 없었지만, 영상에 쓸 만한 소스를 뽑는 건 중요했다.
하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지금은 새로운 스킬과 무기, 장비들로 인해 스펙 바짝 올린 상태였고, 몬스터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곳은 아직 유저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던전이었다.
퀘스트를 받을 때 들었던 마법진에 대한 언급으로 보아 내용물도 범상치 않아 보였는데,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 만한 요소는 충분해 보였다.
‘뭐, 영상이야 부차적인 문제고. 일단 서둘러야겠어.’
시간을 힐끗 확인한 에일은 서둘러 발을 뗐다.
여유 있게 영상 퀄리티나 걱정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사원 지하에 위치한 이 거대한 시설은 숨겨진 던전이기는 했지만, 인스턴스 던전은 아니었다.
출입에 제한이 없으니, 에일이 먼저 던전에 발을 들였다 해 봤자 누구든 뒤이어 자유롭게 안팎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
어쩌면 벌써 던전을 발견한 뒤였을지도 몰랐다.
금지 구역이 해제되어 유저들이 몰린 지 일주일이나 지난 데다가, 입구도 한두 곳이 아니었으니 다른 유저들이 내부에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못했다.
만약 그렇다하면 에일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퀘스트 목표인 마법진을 망쳐 놓거나, 광신도들을 자극해 변수가 생기다 보면 의뢰를 실패할 수도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시간을 끌리지 않고, 최대한 빨리 퀘스트 공략을 끝내는 게 상책.
에일은 횃불의 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 * *
“어때?”
“방금 다 지나갔어.”
“휴우…….”
탐지 스킬을 사용한 도적의 말에 모퉁이 뒤에 숨어 있던 파티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전, 우연히 버려진 사원의 지하 시설을 발견한 그들 파티는 내부 탐사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아직까지도 탐사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나름 준수한 전력의 유저가 다섯이 모였음에도 상당한 수의 광신도 무리 탓에 쉽게 길을 뚫지 못했다.
“인간형 몬스터가 이렇게 많은 곳은 처음 봤네. 던전 크기도 보통이 아닌 거 같고.”
“우리한테는 좋은 일이지. 다른 놈들도 아니고 악마 숭배자들이 득실거리는 던전이야. 이런 던전에 아무것도 없는 건 말이 안 되고… 분명 뭔가가 있을걸? 악마가 내린 아티팩트 같은 게 꽂혀 있다거나.”
“그래, 맞아. 혹시 베나론의 이름이 수식어로 붙어 있는 아이템이라도 나오면 최소 영웅에서 유일 등급 사이 아이템일 테고, 당분간 우리들 골드 걱정은 싹 사라지는 거지.”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상상에 파티원 몇몇이 실실 웃기 시작했다.
평소대로라면 그들 중 누군가 설레발 떨지 말라면서 태클을 걸 시점이었지만, 이곳만큼은 누가 보더라도 심상치 않았다.
이제 막 개방된 지역의 히든 던전인 데다가 규모와 배경 설정도 좋았다.
척 보기에도 레어 아이템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곳.
최초로 클리어하는 데만 성공한다면 무조건 대박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우리처럼 생각하는 게 한둘이 아닌 거 같다는 거지만.”
“그래, 낙관적으로 보기엔 일러. 벌써 우리가 확인한 파티만 넷이잖아? 그중 하나는 전멸해 있던 걸 보면 양아치들도 섞여 있다는 건데.”
“확실히… 조심해야겠지.”
지하 던전을 발견할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파티가 내부에 들어와 탐사를 진행 중이었고, 서로의 존재에 대해서까지 눈치챈 상황이었다.
이 히든 던전의 끝을 어떻게든 가장 먼저 보기 위해 경쟁 중이었다.
“여기 있는 유저들은 다 경쟁자야. 다들 PK도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이봐, 알겠으니 빨리 움직이자고. 아까 지나갔던 광신도들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
재촉하는 도적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린 파티원들은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퉁이 앞의 기다란 홀을 지나 건너편 방으로 이동했다.
혹시나 광신도들이 발견할까 급히 문을 닫은 그들은 어두운 방안을 수색하기 위해 작은 램프를 꺼내 들었다.
파앗!
일부러 밝기를 낮춰 둔 램프에 불이 들어왔고, 희미한 빛이 방 안을 밝혔다.
혹시나 내부에 몬스터가 있을까 긴장을 놓지 않았던 파티원들은 곧바로 방 안에 누군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검을 지고 있는 한 명의 유저.
무기에선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그의 발치엔 네 구의 시체가 형편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누… 누구냐!”
“잠깐, 저 사람들…….”
파티원이 시체들을 가리켰다.
전멸해있는 네 명의 사람은 전부 광신도가 아닌 플레이어였고, 심지어 그들과 한 번 마주쳤던 적이 있는 4인 파티였다.
“한 명한테 당했다고?”
“대체 무슨 속임수를……!”
기겁한 파티원들이 남자를 적대하며 무기를 치켜세웠다.
살벌한 분위기 속 정작 다섯을 앞에 둔 남자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내가 먼저 시비 건 게 아닌데.”
“웃기지 마. 갑자기 뒤통수친 게 아니라면 어떻게 혼자서 네 명을 죽여? 변명은 게임 밖에서나 하든가!”
카앙!
땅을 박차고 달려든 파티원 하나가 무게가 실린 묵직한 일격을 날렸다.
하지만 부드럽게 검을 쥔 남자는 공격을 슬쩍 흘려내더니, 그대로 그를 반대편으로 튕겨보냈다.
“크윽……!”
바닥을 뒹군 파티원은 이를 빠득 갈며 일어섰고, 다른 파티원들도 일제히 달려들기 위해 자세를 취했다.
홀로 방 안에 둘러싸인 그로서는 궁지에 몰린 상황.
“5명이라… 5 대 1이면 아까보단 할 만하려나.”
남자는 오히려 재밌게 되었다는 듯 검을 빙글 돌렸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후방의 힐러는 잠시 머뭇거렸고, 그제야 램프의 희미한 빛이 비춘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 아니, 그를 넘어 모르며 해도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상대는…….
“자, 잠깐! 다들 멈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힐러가 소리쳤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파티원들은 이미 그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고, 남자는 손에 쥔 작은 돌멩이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싸움은 너희가 걸었다?”
콰직!
램프가 박살 나며 어둠이 방 안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