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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이단심판관-79화 (79/227)

79화 광기에게 광기가 (2)

그동안 에일은 플레이를 하며 워로드를 막 시작했을 때를 제외하곤 교단에 단 한 번도 들르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소속된 교단에 대해 아무런 관계를 만들어 두지도 않았고, 무언가 퀘스트를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신앙을 가진 플레이어들은 대개 규모 있는 길드에 가입하지 못하는 대신, 교단과 밀접한 관계라도 맺길 바랐는데 에일의 경우는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것도 없는 플레이어가 처음부터 교단과 관계를 만들어 두려면, 온갖 잡다한 허드렛일을 거들며 관계도를 올려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에일에겐 당연히 그럴 시간이 없었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시간 낭비를 하지 않으며 교단과 교류를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누적 공헌도를 충분히 쌓는 것.

활발히 활동하며 공헌도를 1만 이상 누적해서 쌓았다면, 교단을 위한 공헌이 인정되어 앞선 일련의 과정들은 가뿐히 건너뛸 수 있었다.

시간을 잡아먹는 일 없이, 퀘스트 수령을 비롯한 교단 내 모든 활동을 이어 나갈 수 있었으니 에일 또한 처음부터 노렸던 방법이었다.

이번 멸망의 마을 던전을 해결하면서 에일의 누적 공헌도가 무려 8,000을 넘어섰으니 얼마 남지 않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에일의 교단 방문이 더 일찍 당겨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두 번째 방법이었던, 외부에서 교단과 연관된 퀘스트를 얻어내는 경우를 얻어걸린 덕분이었다.

원래 진행하던 하얀 숲의 퀘스트 라인에서 반대편 진영과 악마 숭배자들이 접점이 있었고, 그들이 준비해 뒀던 함정인 멸망의 마을 던전을 격파하면서 에일은 핏빛 황혼회 추적 퀘스트로 자연히 연계되어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에일이 즐거운 마음으로 이단심문소에 발을 들이고 보니 심란해지기 시작했다.

빛의 교단의 신도들이 제정신이 아닌 것쯤이야 알고 있었고, 그에 따른 각오도 모두 해 둔 뒤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이들은 상상 이상으로 미친놈들이었다.

‘끌려온 입장이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에일이 앞서 걷고 있는 여성 심판관, 아일린을 바라봤다.

그가 처음 그녀를 이단심문소의 입구 앞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순찰을 돌고 있는 평범한 심판관 중 한 명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그녀는 오히려 에스마이어 지역 전체를 책임지는 이단심문소장이었다.

워로드엔 왕도를 포함해 총 15개의 지역이 존재했고, 각 지역마다 교단의 심판관들이 활동하는 이단심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당연히 해당 지역의 이단심판관 중 가장 뛰어나고 믿음이 신실한 자가 이단심문소를 대표하는 역을 맡았고, 서글서글한 웃음을 보이던 그녀의 능력과 손속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몇이나 되는 이단이 그녀의 손에 불타 사라졌을지, 그 숫자를 세는 건 그녀 스스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의 정체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뒤늦은 소개에서 밝힌 아일린이라는 이름, 그리고 에스마이어의 이단심문소장이라는 위치.

비록 처음 마주했을 때 얼굴만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 사실들을 알게 된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대륙에 오직 다섯뿐인 ‘루의 집행관’ 중 한 명이었다.

‘설마 입구에서 우연히 마주친 NPC가 교단의 집행관이었을 줄이야.’

빛의 교단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기관은 단연 전원이 전용 직업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단심문소였다.

언제나 이단을 척결하는 데 앞장서고, 여신에 대한 신앙심이 하늘을 찌르는 무력 집단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리고 그 이단심판관들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서 있는 직위가 바로 ‘집행관’이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교단 내에서 가장 큰 입지를 가진 자들이었다.

‘빛의 교단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강자……. 이름을 들었다면 바로 알았을 텐데.’

입지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어딘가 나사가 빠진 대신, NPC들의 평균 무력만큼은 가장 높기로 소문난 빛의 교단이었다.

집행관들은 그런 교단을 대표하는 강자였고, 전원이 200레벨 정도는 가뿐히 넘어서는 최상위 네임드 NPC들이었다.

에일이 그동안 마주친 세베라와 알룬드가 지역 내 네임드 NPC였다면, 그녀를 비롯한 집행관들은 전 대륙급의 거물들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직접 현장에 나가 있느라 심문소 내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들었는데… 운이 좋았군.’

자신이 루의 사도라는 사실은 아직 숨겨야 하는 상황.

이단심문소에 향하면서도 집행관인 아일린을 특별히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던 에일이었다.

하지만 마침 타이밍 좋게 그녀를 만날 수 있었고, 생각도 안하던 좋은 기회가 굴러들어온 셈이었다.

달칵!

“형제님께서 이단심문소에 찾아오신 이유라면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와 관련해 드릴 부탁 또한 있고요.”

아무도 없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아일린은 본론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에일의 용건을 예상했듯, 에일 또한 어떤 말이 나올지 쉽게 예측이 가능했다.

‘핏빛 황혼회에 대한 연계 퀘스트겠지.’

이단이라면 질색을 하는 빛의 교단에서 악마추종자인 그들을 가만히 두고 볼 리 없는 건 당연한 일.

이단심판관은 물론 사제와 성기사들까지 동원해 가며 그들을 토벌하는 데 언제나 힘써 왔고, 여전히 추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에일은 그런 자들을 상대로 본거지에 쳐들어가 제단과 하수인을 박살 내는 데 성공했다.

탐욕의 악마 베나론과 단단히 척을 지게 된 상황에서, 이단심문소 측이 에일에게 우선적으로 부여할 퀘스트라면 당연히 놈들과 관련된 일밖에 없었다.

“제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면 뭐든 말씀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형제님께서는 혹시 락포터 서남부 지역의 버려진 사원에 대해 들어 보셨습니까?”

“버려진 사원이라 하면…….”

에일이 말을 늘이며 기억을 상기시켰다.

버려진 사원이라면 불과 일주일 전에 새롭게 생긴 34레벨대 사냥터였다.

물론 없었던 지형이 난데없이 불쑥 튀어나온 것은 아니었고, 원래는 왕국에서 지정한 금지 구역으로 유저들이 출입할 수 없던 곳이었다.

하지만 일주일 전, 갑자기 구역에 걸려 있던 통제가 풀리더니 사원 주변에서 상당수의 광신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본래 아무도 찾지 않던 버려진 사원은 많은 몬스터 개체와 괜찮은 효율의 보상 덕에 유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지금은 나름 많은 이가 찾는 사냥터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따로 있었다.

그 광신도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베나론의 추종자, 핏빛 황혼회였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베나론의 광신도들이 사원에 나타난 지 대략 일주일쯤 지났던 것 같은데, 어째서 교단이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나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던 참입니다.”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사원 아래에 숨어 있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 저희지요.”

아일린이 책상 아래에서 붉은 인장이 찍힌 서류 몇 장을 꺼내 들어 보였다.

버려진 사원과 금지 구역 지정에 대한 조사관의 보고서였다.

“왕국에서 지정한 금지 구역 안에 악마숭배자들이 숨어 있던 것은 우연히 아니었습니다. 제대로 관리가 이루어졌다면 그들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었을 테죠. 저희는 수상한 낌새가 보이던 서남부 일대를 추적했고, 황혼회의 뒤를 봐주던 부패한 왕국 관리를 색출해 내 심판대에 세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왕가와 약간의 마찰이 발생하긴 했지만 그런 건 중요한 일이 아니지요.”

아일린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지만, 보나마나 미리 언질도 없이 쳐들어가 관리를 붙잡은 뒤 광장 한복판에서 불태워 버렸을 것이다.

그러니 왕국이 교단의 과격한 행동에 반발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자가 악마숭배자 집단과 연결되어 있었으니, 왕국 입장에서도 그 이상 뭐라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빛의 교단이 그런 일들을 벌이는 게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임에도 참 대책 없게 느껴지는 일 처리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런 속마음을 한켠에 눌러 담은 에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즉시 그들을 토벌하지 않은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이번에 드러난 황혼회의 본거지는 한 곳만이 아닙니다. 수십 곳이 넘는 거처를 비밀리에 알아냈고, 놈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동시에 손을 쓸 계획이죠. 버려진 사원의 경우 구역 통제가 풀린 뒤 모험가들이 나서 황혼회의 활동을 억제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냥터 하나가 통째로 증발해 버리겠군.’

이단심문소가 직접 나선다는 건, 그 지역에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단순히 효율 좋은 신규 사냥터인 줄 알고 버려진 사원에서 자리를 잡은 유저들은 조만간 하루아침에 사냥터가 증발한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밀어붙이기에 앞서, 사원의 지하에 숨겨진 거대한 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어두운 기운이 풍기는 대형 마법진이 있는 걸 보아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모양인데, 무턱대고 진입했다간 큰 피해를 입을까 걱정되는 상황입니다.”

“놈들이 무슨 꿍꿍이인지 조사를 해 달라는 말씀이시겠군요.”

“맞습니다. 마음 같아선 제가 직접 가고 싶지만, 근래들어 사악한 세력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져 인력이 부족해진 시점입니다. 형제님께서는 베나론의 하수인을 처치할 정도의 실력을 가지신 분이니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아일린이 그에 대한 신뢰감을 드러내며 말했다.

에일이 홀로 하수인을 잡아낸 것을 굉장히 높게 쳐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실 악마의 하수인을 처치한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라 교단 내 어디를 가더라도 인정받을 만한 공적이었다.

개체마다 천차만별로 편차가 존재하긴 했지만, 어느 레벨대건 하나같이 쉽지 않은 적이라는 건 마찬가지였다.

에일이 상대했던 말라고스 또한 소환 의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중단된 탓에 그나마 약화된 것이었다.

만약 원래대로 정해진 제물들을 모두 녀석이 먹어치워 의식이 끝까지 이루어졌다면 에일이 홀로 놈을 쓰러뜨리기는 무리였을 것이다.

“아마 내부엔 굉장히 많은 수의 광신도가 숨어 있을 겁니다. 전력 또한 아직 상세히 파악되지 않았으니 무리할 필요 없이 마법진에 대한 조사만 진행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건 최소한의 안전장치입니다.”

터억!

품을 뒤적이던 아일린이 검은 구슬을 꺼내더니 에일의 손바닥 위로 건네주었다.

깊숙한 지하 감옥 안에서 그녀가 직접 챙겨 왔던 정체 모를 물건.

꺼림직한 기운을 풀풀 풍기고 있는 구체는 생긴 것에 비해 상당히 묵직했고, 쥐고 있는 동안 왠지 모를 조그마한 비명들이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나빠지는 이 기이한 물건에 에일은 저도 모르게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뭐죠?”

“황혼회의 흑마법사에게서 추출한 마력 결정입니다. 신성 마법으로 약간의 변형을 준 물건이죠. 그들의 마법진과 비슷한 성질의 마력을 지니고 있어 형제님을 지켜 줄 겁니다.”

“그자들이 순순히 마력을 넘겨주던가요?”

악마에게 복종하는 추종자 무리는 하나같이 죽음과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실제 에일이 맞닥뜨린 황혼회의 광신도들도 간부 한 명을 지키려 불나방처럼 몸을 날리던 걸 보면 헛소문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조직의 흑마법사씩이나 되는 자들이 마력을 넘기는 행위에 쉽게 협력했을 리 없을 터.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마력을 넘기겠다고 매달렸습니다만, 그건 저희가 거절했습니다. 스스로 마력을 넘기는 과정에서 교묘한 술수를 써 놓을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글쎄요, 이번 추출 작업은 심문소에서도 꽤나 실험적인 방식이라 마땅히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군요. 조금 단순하게 말하자면 영혼째 한데 갈아 넣었다, 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

에일은 간신히 구슬을 내팽개치고 싶은 충동을 눌러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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