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광기에게 광기가
[방어 분쇄(유일)]
- 이단심판관 전용 스킬
- 갑옷과 방패, 그 무엇도 죄인을 향한 심판관의 철퇴를 막을 순 없습니다!
- 방어구 관통력이 40% 상승하며, 장비에 입히는 내구도 피해가 소폭 증가합니다.
“…….”
에일이 멍하니 눈앞의 화면을 내려다봤다.
벌써 10분도 넘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스킬 설명창이었지만, 그는 쉽사리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유일 등급.
희귀와 영웅을 넘어선 최상위 등급이자, 평범한 상황의 유저라면 몇 년을 플레이한다해도 한 번 보는 것조차 불가능할 만큼 희소성 있는 등급이었다.
지금 한참을 앞서가고 있는 랭커와 그 자리를 노리는 최상위 플레이어들조차도 이 유일 등급 스킬의 개수가 전력을 객관화시키는 데 유의미한 지표 역할을 할 정도였으니 더 이상 말이 필요할 리 없었다.
전설 스킬의 소유자야 워로드 전체로 따져도 극소수에 불과했고, 사실상 그 바로 아래인 유일 등급이 랭커들의 주력이라고 봐야 했다.
그리고, 그런 엄청난 스킬이 에일의 스킬창 한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방어 관통이 40퍼센트라니……. 이거 하나만으로도 거의 탱커들을 갈아 마시는 수준이잖아.’
심지어 단순히 등급만 높은 것이 아니었다.
스킬에 붙어 있는 ‘방어구 관통력’이라는 옵션은 적의 방어력을 무시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였다.
예를 들어 공격자가 20%의 방어력 관통력을 갖추고 있다면, 상대가 100의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다 해도 실제로는 80의 방어력만이 적용되어 데미지가 산출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물리 공격력을 바탕으로 하는 유저들은 어떻게든 확보하고 싶어하는 옵션이었고, 특히 서로의 스펙이 가파르게 올라가는 상위권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요소였다.
거기다 방어 관통 효과에 비해선 소소하지만, 부가적으로 장비의 내구도에 입히는 피해량 증가까지도 붙어 있었다.
일단 유저를 대상으로 한 경우, 오랫동안 장비를 수리하지 않고 방치한 경우가 아니라면 장비의 내구도가 웬만해선 바닥나지 않아, 유저 간 PVP 상황엔 큰 의미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내구도 피해량 증가가 빛나는 순간은 보스 몬스터를 상대로 갑옷을 벗겨 내는 작업이 필요할 때였다.
단단한 중갑을 두른 몇몇 보스는 본격적인 공략에 앞서 반드시 갑옷을 먼저 부숴야 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존재했고, 내구도 피해는 이런 작업을 빠르게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일명 보스 몬스터의 ‘부위 파괴’를 더욱 수월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라는 것이다.
“정신 차리자.”
숨을 내쉰 에일이 자신의 뺨을 찰싹 때렸다.
아직 이렇게 호들갑 떨 때가 아니었다.
예상하지도 않았던 커다란 수확에 당황하긴 했지만, 자신의 만족치를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면 안 된다.
앞서간 랭커들을 따라잡으려면 지금처럼 최대한 많은 유일과 영웅 등급 스킬들을 확보해 둘 필요가 있었다.
‘…….’
하지만 곁눈질로 슬쩍 상태창을 확인한 에일의 입가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유저 정보>
이름: 에일
칭호: 여신의 대행자
세력: 빛의 교단
레벨: 35
직업: 이단심판관
주요 능력치
힘: 85(+50) 민첩: 72(+31) 체력: 73(+23) 마력: 20(+20) 신앙심: 74.0(+20) 광기: 68.6(+20)
패시브
[광적인 순교자(기초)], [증오의 칼날(기초)], [방어 분쇄(유일)]
액티브
[성화(기초)], [형벌 선고(사도)], [이단 지정(사도)], [역극(희귀)], [일섬(영웅)]
‘여신의 대행자’ 칭호 효과 - 모든 스탯 +20, 이단 상대 데미지 +5%
경갑 방어구 세트 효과 - 민첩성 +3%, 방어력 +10%
신앙: 정의와 빛, 광기의 여신
직책: 루의 사도
여신의 총애: 61.25%
공헌도: 5,410 (누적 8,060)
* * *
덜커덕!
목적지에 도착한 마차가 멈춰 섰다.
아직 에일이 향하려는 목적지에 완전히 도착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앞으로는 마차가 다닐 길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더 이상 들어가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목적지는 이곳에서부터 걸어도 금방 닿을 만큼 멀지 않았다.
가볍게 마차 아래로 내려선 에일은 울창한 숲속을 걷기 시작했다.
40레벨대 중반의 까다로운 정예 몬스터, 크림슨 베어가 나타나는 영역이었지만 그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냥을 하러 이곳에 온 것도 아니었고, 재수 없게 마주친다 한들 위험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까악-!
그때, 숲속 어디선가 짐승의 소리가 들려왔다.
크림슨 베어의 소리는 아니었다.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어.”
날아든 하얀 까마귀가 에일의 팔에 올라탔다.
이번에도 녀석은 다리에 묶여 있는 편지를 자랑스레 들어 올렸고, 에일은 그를 받아 눈앞에서 펼쳐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하얀 숲의 알룬드에게 온 전언이었다.
에일은 ‘멸망의 마을’ 던전을 무사히 클리어해 낸 뒤, 하얀 숲에 따로 까마귀를 보내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전했다.
지금 온 편지는 알룬드의 답장이었고, 그들 대신 외부 조사를 진행해 준 에일에 대해 감사의 뜻을 담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즉, 퀘스트의 완료라는 것이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편지가 묶여 있던 반대편 다리엔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고, 그 안엔 적당한 양의 금화와 은화가 섞여 들어 있었다.
따로 다른 아이템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엘프들답게 넘겨진 골드만으로도 충분히 후한 액수였다.
“흐음…….”
보상엔 충분히 만족한 에일은 혹시 다른 내용은 없나 편지의 뒷장을 살펴보았다.
텅 빈 양피지엔 다음 의뢰와 관련된 내용은 전무했다.
곧바로 이어질 연계 퀘스트는 없다는 뜻.
하지만 에일은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무사히 퀘스트를 클리어하긴 했지만 결국 확실한 배후는 찾지 못했어. 이대로 흐지부지될 만한 건수는 아닐 테고. 블러디 핸즈, 하얀숲, 황혼회까지. 당분간 퀘스트가 부족할 일은 없겠군.’
* * *
“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복도를 걷는 에일은 한 이단심판관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고, 주변의 광경이 생생히 눈에 들어왔다.
오른편엔 죄인을 가둔 철창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었고, 왼편 아래엔 처형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발을 들였을 뿐임에도 절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이곳은 ‘이단심문소’.
에스마이어 지역 내에서 활동하는 모든 심판관의 근거지이자, 빛의 교단이 지닌 강력한 집행 기관이었다.
대개 도시 안에 자리잡고 있는 신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고, 심문소를 상징하는 붉은 장식의 깃발이 펄럭였다.
‘이야기야 이미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강도 높은 심문에 에일은 진땀을 삐질 흘렸다.
붙잡힌 죄인들이라면 모조리 처형당해 텅 비어 있던 듀벨의 신전과 달리, 굉장히 넓은 공간을 거의 가득 채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동시에, 화형대에서 타오르고 있는 죄인들의 비명도 끊임없이 들려왔다.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사방에서 이 난리였으니, 게임 속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에일조차도 곧바로 적응하기는 무리였다.
“괜찮으신가요? 어딘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안으로 안내하던 심판관이 에일의 안색을 살피고는 물어왔다.
그녀는 금발을 늘어뜨린 서글서글한 인상의 여성이었는데, 깔끔하게 차려입은 정갈한 갑옷 차림과 대조되어 얼굴과 갑옷에 눌어붙어 있는 붉은 핏자국들은 섬뜩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심판관의 물음에 에일이 손을 저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슨 연유인지 알겠다는 듯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형제님께서는 이단심판관으로서의 길을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으셨지요. 베나론의 하수인을 단죄하신 분이라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이런 광경이 거북하게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겁니다. 화형장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저 남자에게 연민의 감정이 느껴지시나요?”
“연민이 아닙니다. 그저… 약간의 적응이 필요할 뿐이죠.”
“굳은 심지를 가지고 계시다니 다행입니다. 방금 지나간 남성은 지난 한 달간 도심 뒷골목에서 마흔 명을 도살해 인육을 공급한 살인마입니다. 독특한 식성의 거래자들을 모두 자백하고, 참회의 불길에 발을 들이는 중이지요. 저기 말뚝에 박혀 있는 여성은 보이십니까? 거짓 종교를 포교해 사람들을 홀린 뒤, 제물이 필요한 악마 숭배자들에게 돈을 받고 팔아넘긴 자입니다. 다행히 다음 의식에 사용될 예정이었던 어린아이들은 구출해 냈지만, 부모와 형제들은 모두 악마의 먹이가 되었죠.”
터엉!
그사이, 처형장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죄인 하나가 참수되어 머리가 날아갔다.
“지금 언급한 이들은 그나마 덜한 편입니다. 교리를 어긴 대부분의 죄인들은 그 자리에서 처형되거나 신전에서 처리를 마칩니다. 한데 이 이단심문소의 지하 감옥에까지 끌려온 자들은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울 만큼 끔찍한 죄질의 소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연민을 가지기엔 과분한 자들이지요.”
“…그렇군요.”
“형제님께서는 신앙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로, 교단에 들르신 적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물론 여신의 뜻을 따르는 일은 교단 밖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만, 심판관의 율법과 교리에 대해선 자연히 접할 기회가 적었겠지요.”
촤르르륵!
묵직한 쇠사슬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또 다른 문이 열리며 아래로 향하는 깊은 계단이 드러났다.
잠시 멈춰선 채, 고개를 돌린 그녀는 에일에게 질문을 던졌다.
“베나론의 제단을 파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많은 희생자가 있었습니다. 아마 무고한 자들이 대부분이었을 테죠.”
“그럴 겁니다. 악마의 무리들은 약자에게 더욱 가혹한 법이니까요.”
그녀는 계단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에일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은 그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악에 물든 자들이 세상을 활개 치며 많은 희생자를 낳고 있으니, 저희는 심판관으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형제님께서는 혹시 저희의 사명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까?”
“물론입니다. 교리를 어긴 죄인들을 찾아내 심판하는 것이죠.”
“맞습니다. 심판관은 여신의 검이자 불꽃. 그분을 대신해 세상의 악을 단죄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을 처형대 위에 세우는지도 아시는지요?”
“회개를 논하기엔 너무 늦었고, 오직 죽음만이 그들의 죗값에 맞는 합당한 처벌이기 때문입니다.”
에일이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교단 내 기본적인 상식에 대해선 이미 조사를 해 두었기 때문에, 이정도 질문쯤이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이단은 죽음으로써 씻을 수 없는 죄를 속죄합니다. 하지만 모두의 앞에서 화형대를 불태우고, 목을 베어 걸어 둘 필요가 있을까요? 오히려 사람들이 거부감을 보이지 않습니까. 선량한 이들조차도 우리를 향해 광신도라며 손가락질하는 지경인데, 그렇게까지 가혹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우리는 어째서 이러한 일들을 자처하는 것일까요.”
“그건…….”
그녀의 질문에 에일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심판관들이 언제나 과시하듯 이단들을 처형하는 이유에 대해 묻다니.
그저 미친 광신도들이 벌이기에 딱 좋은 일이라 여겼을 뿐, 그런 식의 접근으로는 생각해 보지 않은 부분이었다.
키이이익!
그때 갑자기 흉측한 울음소리가 통로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무슨……!’
계단 저 아래에서 들려온 소름 끼치는 소리에 깜짝 놀란 에일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앞서 걷던 그녀는 오히려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바로 두려움입니다. 심연의 피조물들조차도 느끼는 감정이죠. 여신의 자애로운 말씀이 닿지 않는 자들도 턱밑을 겨눈 칼끝에게만큼은 순종적이게 됩니다. 공포가 곧 질서이고, 세상을 지탱하는 기둥입니다. 그렇기에 심판관은 마땅히 모든 이에게 두려움을 안겨 줄 필요가 있습니다. 죄악에 발을 들인 자들의 말로가 어떤지, 심문소의 지하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지, 세상 모든 이가 알게끔 말입니다.”
계단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고, 변함없이 상냥한 그녀의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섬뜩함을 풍겨 왔다.
“형제님, 어깨를 펴고 정당한 심판을 내리십시오. 애원하는 이단을 불태우고, 추레한 악마가 눈물을 흘릴 때까지 검을 쑤셔 넣는 겁니다. 죄 없는 이들과, 빛을 따르는 신도들조차도 공포에 순종하며 여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그들이 죄악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말이지요.”
화아아악!
그녀를 따라 계단의 끝에 들어선 에일의 앞에 후끈한 열기가 휘몰아쳤다.
겹겹이 쌓인 죄인들의 시체가 불구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양옆의 시뻘건 불길이 춤을 추듯 일렁였다.
죄수들이 내뱉는 비명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며, 딛고 있는 바닥에서는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철창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그리로 연결된 깊고 어두운 감옥 아래.
키에에엑!
쿠웅!
수십 갈래의 거대한 쇠사슬이 온몸에 박힌 채 갇혀 있는 끔찍한 괴물들이 몸부림치며 고통에 울부짖었다.
뜨겁게 달궈진 족쇄가 살갗을 태우며 사지를 얽매고 있었고, 말뚝이 꽂힌 괴물들의 눈에선 붉은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곳은 이단심문소. 심연의 공포이자 모든 죄악의 종착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