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빛과 그림자 (8)
둘은 어둡고 긴 동굴을 횃불에 의지한 채 나아갔다.
동굴은 일직선상으로 이어져 있어 복잡하지 않은 구조 덕에 길을 헤매는 일 없이 끝까지 다다를 수 있었고, 통로의 끝에서 새어 나오는 밝은 햇살이 그들을 비췄다.
“후, 드디어 빠져나왔네.”
먼저 동굴 밖으로 나온 에일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들어섰던 높다란 절벽과는 달리, 출구는 계곡 아래의 구석과 이어져 있었다.
복잡한 주변 지형 탓에 들킬 가능성도 적어 보였고, 아마 핏빛 황혼회의 신도들은 이곳을 오가는 통로로 사용한 듯했다.
“어느 쪽?”
두 갈래로 나뉜 길 앞에서 에일이 물었다.
손가락을 들어 올린 네슈아는 묵묵히 왼쪽 방향을 가리켰다.
에일과는 반대 방향이었고, 그들은 가벼운 작별 인사를 나누곤 돌아섰다.
하나의 퀘스트 라인에 함께 묶인 이상, 서로가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고, 굳이 긴 인사는 필요 없었다.
하지만 잠시 자리에 멈춰선 에일은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복수하는 거 도와줄까?”
“……?”
“너도 이쪽 퀘스트로 건너오는 건 어때?”
어떤 자들인지는 몰라도 에일과 함께 그를 죽이려고까지 든 걸 보면 좋은 마무리는 이미 물 건너간 상황.
만약 역으로 파괴된 이곳의 소식을 듣게 된다면 네슈아를 추적해 암살하려 들지도 몰랐다.
원래의 진영에게 배신당한 이상, 네슈아에게 남겨진 가장 좋은 선택지는 그들과 적대하는 반대 진영과 결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 에일은 관계가 맺어진 하얀 숲의 퀘스트를 가지고 있었다.
함께 파티를 맺고 퀘스트를 진행하면 자연히 배신자들에게 복수할 기회가 생기는데다가, 하이 엘프들의 도움까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네슈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와 만난 뒤 처음으로 보는 웃음이었다.
“…….”
무언가를 끄적이던 네슈아는 어색한 지 양피지를 꾸깃 접었고, 팔을 휘휘 저으며 자리를 떠났다.
* * *
‘다시 보니까 더 엄청나네.’
에일은 계곡 아래의 마을에서 다음 행선지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탄 뒤, 본격적으로 자신이 얻었던 보상을 재확인하고 있었다.
[보유 공헌도: 5,410]
말라고스를 상대로 소모했던 공헌도는 총 1,650. 던전을 클리어하며 획득한 공헌도는 4,600.
불과 단 한 번의 던전 공략으로 얻은 막대한 양의 공헌도였다.
신성모독자인 동시에 악마형 몬스터이며 베나론의 하수인이기까지 한 말라고스는 그야말로 빛의 교단이 질색하는 요소는 죄다 때려박아 넣은 생명체나 다름없었다.
그런 몬스터를 상대로 루의 특별 퀘스트까지 받아들였고, 정석적인 던전의 시나리오를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해치운 것이었으니 가산이 더해졌다.
더불어 58퍼센트대였던 총애 스탯은 현재 61.25퍼센트의 수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60퍼센트를 넘어선 것은 충분히 유의미한 일로, 평범한 대다수의 이단심판관 유저들은 이 수치를 유지하냐 못 하냐를 성공적인 총애도 유지의 기준으로 삼을 정도였다.
‘칭호도 마침 좋은 게 나와 줬고.’
[‘여신의 대행자’ 칭호가 적용되었습니다!]
[모든 스탯 +20, 이단 상대 데미지 +5%]
이번에 새로 얻게 된 칭호 ‘여신의 대행자’는 전에 얻었던 ‘신성징벌자’의 상위 호환격인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
신성징벌자 칭호보다 모든 스탯을 10씩 더 올려 줬고, 이단을 상대로 한 공격의 데미지는 2퍼센트를 더 증가시켜 주는 강력한 효과의 칭호였다.
‘루의 보상으로 장비 아이템을 받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지.’
에일이 자신의 다리 위에 올려져 있는 백색 장검을 내려다봤다.
[달빛이 서린 누이르 장검]
- 등급: 영웅
- 종류: 장검
- 제한: 레벨 34 이상
- 물리 공격력 50
- 힘 +15, 민첩 +8
- 특수 효과 ‘만월’: 성 속성 공격의 데미지를 15% 증가시킵니다. 언데드를 대상으로 35%의 추가 데미지를 입힙니다.
“…….”
무려 영웅 등급의 장검.
하지만 굳이 그런 수식어가 필요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스펙의 무기였다.
공격력과 부가 스탯, 특수 효과까지 삼위일체로 완벽했다.
그뿐만 아니라 여신이 직접 하사한 무기답게 디자인조차 깔끔한 흰색에 붉은 장식이 잘 어울려져 멋스러움을 뽐냈다.
안 그래도 슬슬 무기를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끼던 시점이었는데, 마침 이런 보상을 내려 주니 루에 대한 신앙심이 무럭무럭 피어오를 정도였다.
짤막하게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린 에일은 다음 수확을 확인하려 눈을 떴다.
‘제일 궁금하던 거였지.’
파앗!
인벤토리를 연 에일이 팔을 움직이며 화면을 조작했다.
말라고스를 처치하고서 얻었던 아이템의 목록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던전이 무너지는 통에 보스의 시체를 해체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미처 아이템을 확인하지도 못했었다.
‘어디보자…….’
에일은 인벤토리를 하나하나 정리하며 이번에 새롭게 얻은 아이템들을 분류해 체크하기 시작했다.
상점에 내다 팔 용도인 이런저런 잡템들.
나쁘지 않은 옵션의 상급 둔기.
마법 저항 효과를 지닌 희귀급 방패.
장비 제련의 재료로 사용되는 금속들.
전반적으로 평이한 방어구와 장신구 네 피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빛 스킬북.
“검은빛 스킬북?!”
에일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놀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험가님, 갑자기 마차 위에서 날뛰시면 위험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마부의 질책 섞인 말에 에일은 도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두근거리는 심장은 아직도 잠잠해지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자신의 눈을 의심한 에일이 눈가를 세게 비볐다.
검은빛을 띠는 스킬북이라면 저번에 얻었던 보랏빛 스킬북보다도 위 단계인 데다가, 워로드의 스킬북 중 가장 높은 등급인 황금빛 스킬북의 바로 아래 단계에 위치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정말 에일의 인벤토리 한 자리엔 검은빛 스킬북이 들어 있었다.
던전 클리어 한 번에 주어진 엄청난 보상들에 더해 상위 스킬북까지 등장하자, 정신이 혼미해진 에일은 갈팡질팡했다.
‘이게 가능한 일이라고? 아니… 가능하기야 하지. 2인용으로 설계된 던전 주제에 난이도는 엄청 높아서 어지간한 유저라면 버티지 못하고 죽었을 테니까. 게다가 원래 정해졌던 시나리오까지 깨고 잡은 보스잖아?’
[‘빛의 심판자, 루’가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봅니다.]
잠자코 그를 구경하고 있던 루의 메시지까지 나타났다.
검은색 스킬북의 등장에 흥미가 동한 듯했다.
하지만 오히려 에일은 스스로 머리를 잠시 식혔다.
이만한 등급의 스킬북이 나타난 것은 분명히 호재였다.
하지만 높은 등급의 스킬북이라 한들, 좋은 스킬이 나타날 확률과 한도가 높아질 뿐. 저번처럼 재수가 없다면 최하 등급 스킬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 차오르고 있는 기대감을 약간은 누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젠 무조건 높은 등급의 스킬만 바랄 게 아니야. 스킬 간의 밸런스를 맞춰 나가야 할 시점이다.’
등급에 눈이 먼 많은 유저가 간과하는 사실이었지만, 스킬 세팅의 진정한 핵심은 적절한 밸런스를 갖추어 나가는 것이었다.
개별적으로 봤을 땐 아무리 좋은 스킬이더라도, 정작 한데 모인 스킬 간의 시너지가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다.
전설 등급 스킬들을 떡칠해 놓는다 해도, 정작 스킬창이 단순 공격기로만 가득 차 있다면 그 유저는 육성에 대실패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스킬의 종류는 공격기, 방어기, 회피기를 제외하고도 버프와 디버프, 군중제어기 등을 비롯해 세부적으로 어마어마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심지어 ‘공격기’라는 같은 범주 내에서도 다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쿨타임의 길이가 긴지 짧은지, 어떤 선행 동작이 필요한지, 어떤 부가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 단일 대상인지 광역 범위인지에 따라 모두 역할을 달리했다.
예를 들어 에일은 지금 일섬이라는 훌륭한 순간 폭딜 스킬이 존재했는데, 또다시 아무런 부가 효과가 없는 순수 공격 스킬을 배웠다간, 두 스킬의 역할이 겹쳐 버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
스킬 하나하나가 중요할 중저레벨 단계에서는 가급적 피해야 할 상황.
더군다나 에일은 그동안 스킬북으로는 액티브 스킬만 연달아 얻었고, 이제 슬슬 쓸 만한 패시브를 채워 넣어야 했다.
‘워로드에서 패시브 스킬은 기본기, 액티브 스킬은 변수 창출이라는 말이 있지. 아주 정확한 표현이야.’
버프나 토글 형식이 아닌 이상에야 액티브 스킬은 발동시킬 때에만 위력을 발휘하고, 또 사용 후 쿨타임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패시브 스킬은 기본 공격을 하건 다른 스킬을 사용하건 언제나 캐릭터에 적용되는 ‘기본기’였다.
스펙을 뒤받쳐 줄 패시브 스킬이 부족하면 아무리 액티브 스킬이 많아 화려한 전투가 가능하더라도 막상 실속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패시브가 액티브 스킬에 비해 우월한 입장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액티브 스킬을 등한시하고 패시브에만 치중하게 되면 변수를 만들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효율적인 전투가 불가능하다.
단순히 검을 뻗고 주먹을 휘두르는 것 외엔 공격 수단이 없으니, 몬스터든 유저든 그를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대처하기 아주 손쉬워지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스킬들 간의 밸런스, 시너지가 중요하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했다.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패시브 스킬, 내실을 확실히 다져 둘 필요가 있다. 특히 기존 스킬과 역할이 겹치는 녀석이라도 나왔다간 과감히 포기해야 할 수도 있어.’
에일이 손에 쥐어진 스킬북을 앞에 두고 생각했다.
긴장되는 가운데 에일은 스킬북을 개봉하기 전에 먼저 인벤토리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내들었다.
영롱한 기운이 감도는 붉은 보석.
멸망의 마을에서 붉은빛의 언데드들을 해체하고 얻은 행운석이었다.
콰직!
[행운석의 효력이 발동됩니다!]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습니다.]
움켜쥔 에일의 손에 행운석이 산산히 부서지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행운석의 효과는 이름 그대로 잠시 동안 사용자의 행운을 ‘약간’이나마 올려 준다는 것이었다.
워로드 안에선 행운이라는 수치조차 대부분의 경우는 시스템 적으로 보정이 가능한 만큼, 높은 수치가 아님에도 많은 이가 탐내는 희귀한 아이템이었다.
다만 그런 행운석의 효력이 유지되는 시간 자체는 10분이 채 되지 않았다.
이러한 짧은 유지 시간 탓에 다른 상황엔 효율적으로 쓰기 힘들었고, 보스 아이템을 루팅하기 전이나, 던전의 보물 상자를 열기 전, 혹은 지금의 에일처럼 스킬북을 열기 직전에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다. 이제 남은 건 간절히 기도를 하는 것뿐.’
심호흡을 한 에일은 천천히 팔을 뻗어 스킬북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검은빛의 스킬북이 반응했고, 주위로 환한 빛이 뻗어져 나왔다.
파아앗!
* * *
“하… 미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