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빛과 그림자 (7)
‘해냈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공략이 끝이 났다.
그것도 엄청난 수확들을 거두고서.
대량의 공헌도와 보너스 스탯, 새로운 칭호들, 60퍼센트를 단숨에 넘긴 총애도, 교단과의 관계 진전.
레벨은 한 번에 무려 네 단계나 올라가 35레벨에 달했고, 퀘스트 보상으로 새로운 무기까지 얻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열거하기가 더 힘들 정도였으니, 일반적인 경우를 한참이나 벗어난 케이스임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뭣보다… 레이드 중에 움직임이 조금씩 좋아졌어.’
왠지 모르게 가벼워진 몸놀림 정도는 에일도 당연히 체감했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움직임을 몸이 전보다 잘 따라와 주는 느낌이었다.
물론 미세하게 올라간 동조율에 대해선 에일도 알 수 없었다.
단순히 가상현실에 대한 경험이 쌓여 실력이 조금이나마 발전했다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빛의 심판자, 루’가 당신의 활약에 기꺼이 경의를 표합니다.]
[빛의 교단 공헌도 +100]
이번에 엄청난 양의 퀘스트 보상을 건네준 여신이 또다시 에일에게 공헌도를 건네줬다.
역시나 그의 활약에 진심으로 만족한 듯한 모습이었고, 에일은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을 여신에게 슬쩍 웃어보였다.
파스스!
소환되었던 불의 정령 이그리스가 다시 재로 돌아갔다.
스크롤로 계약 소환된 소환수인 만큼 전투가 끝나자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훌륭한 마법 공격력과는 달리 생존 능력은 바닥을 치는지라, 보스의 시선이 그리로 향하지 않도록 고생을 하긴 했지만, 원거리 딜러로서 훌륭한 역할을 다해 줬다.
“후…….”
에일은 집중의 여운 탓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아 가며 곤죽이 된 말라고스의 시체에게 다가섰다.
아직 은은한 빛이 머물러 있는 시체에 손을 뻗자, 그가 떨어뜨린 아이템을 루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아이템을 얻었는지 확인할 새도 없었다.
쿠구구궁!
사방의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빛의 심판자, 루’가 당신에게 서두르라고 말합니다!]
[던전 붕괴까지 남은 시간 ‘00:01:04’]
주어졌던 시간은 어느새 1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시설은 급속도로 붕괴 중이었고, 에일은 서둘러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이미 붕괴된 지 오래였다.
다른 곳을 찾아보려 해도 얼마 가지 않아 잔해들이 쌓여 막혀 있었고, 다른 곳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는 뻥 뚫린 천장뿐이었다.
하지만 한 층의 높이가 낮지 않은 데다가 쉴 틈 없이 붕괴 중인 내부 탓에 벽과 잔해를 타고 오르기엔 무리가 있었다.
즉, 사실상 도주로가 완전히 차단된 상황이라는 것.
이런 깊은 던전 전체가 모두 무너지면, 저번처럼 검은 수정 장신구의 세트 효과로 충격을 흡수한다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뭐, 첫 죽음치고는 나쁘지 않네.”
자리에 선 에일이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과감히 투자한 뒤, 놀라운 성과를 낸 덕에 여기서 죽는다 해도 손해라고 볼 수는 없었다.
한 번에 무려 4레벨이나 오른 덕에 레벨 페널티는 두려운 문제가 아니었고, 획득한 공헌도도 엄청난 폭의 흑자였다.
물론 이틀이라는 접속 페널티가 뼈아프긴 하지만 도망쳤다면 대폭 떨어질 수 있었던 여신의 총애도 지켜냈고, 아무런 페널티도 없었다.
외통수나 다름없이 주어졌던 상황에 비해서, 이만하면 훌륭한 방어 및 득점이었다.
아쉽긴 했지만, 그렇게 만족하려 했다.
뻥 뚫린 천장 위에서 네슈아가 뛰어내려 오기 전까진.
터억!
갑자기 그의 앞에 나타난 네슈아가 부드럽게 바닥에 착지했고, 쓰러져 있는 말라고스의 시체와 에일을 번갈아 바라봤다.
정말 불과 17분 안에 혼자서 말라고스를 잡은 것에 대해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란 건 예상치 못한 등장에 당황한 에일이었다.
“너, 아직도 안 나가고 뭐 했어?”
다가선 에일이 네슈아를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출구의 바로 앞에 있다 해도 위험할 상황에, 고립된 위치로 뛰어내리기까지 했으니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이대로 사이좋게 다 같이 죽을 위기였다.
하지만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은 네슈아는 난데없이 에일의 다리를 걸었다.
“컥……?”
당연히 그를 예상하지 못했던 에일은 꼼짝없이 앞으로 고꾸라지려 했고, 살짝 자세를 숙인 네슈아는 그런 그를 붙잡아 어깨 위에 걸쳐 맸다.
그리곤 에일이 무슨 짓이냐 묻기도 전에, 네슈아가 한 가지 스킬을 발동했다.
스스슷!
발밑의 검은 그림자가 네슈아의 두 다리에 휘감겼다.
‘이건…….’
에일조차도 처음 보는 스킬의 이펙트였다.
직업마다 스킬의 수가 워낙 많은 워로드에선, 이단심판관이나 그림자 파수꾼 같은 비주류 직업의 ‘전용 스킬’들이 높은 등급으로 갈수록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앞서 네슈아가 가지고 있는 공용 스킬 두 가지는 이미 본 적이 있었고, 아마 30레벨에 새로 배운 듯한 스킬.
파앗!
에일을 지고 있던 그의 몸이 높이 떠올랐다.
그렇게 한참을 도약한 네슈아는 반쯤 무너진 벽을 디딤대로 밟고서 한차례 더 뛰어올랐다.
단숨에 지하 두 번째 층을 넘어 첫 번째 층까지 돌파한 네슈아는 그대로 멈추지 않고 달렸다.
영웅급 전용 스킬인 ‘나이트 워커’의 효과를 받은 그의 속도는 굉장했다.
무너지는 바닥과 떨어지는 잔해들을 피해 가며 전력으로 질주한 그가 향하는 곳은 처음에 전투가 일어났던 제단이었다.
막혀 있던 지하 둘째 층의 통로를 비롯해 눈에 띄던 대부분의 통로들은 실제 바깥으로 향할 수 있는 출구가 아니었고, 그저 눈속임에 불과했다.
그래서 에일이 말라고스와 싸우고 있는 동안, 네슈아는 제단 근처에 숨겨진 진짜 출구를 찾아 둔 것이었다.
콰앙!
제단 아래의 단단한 벽처럼 보이는 곳을 네슈아가 힘껏 발로 차며 몸을 던졌고, 그와 동시에 광신도들의 지하 시설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둘다 저 아래에 깔려 죽었을 것이다.
땀을 삐질 흘린 네슈아는 들쳐 업었던 에일을 패대기쳤다.
“켁!”
에일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졌다.
축축한 동굴 바닥이 그의 얼굴을 반겼다.
“곱게 내려놔 주면 어디가 덧나나…….”
「돌발 행동을 하려면 말부터 해라」
네슈아가 내민 양피지의 내용에 에일은 쩝 입맛을 다셨다.
그 부분에 대해선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음… 아무튼 고마워. 덕분에 살았네.”
「일단 나가지」
“그래 일단…….”
싸아아아!
말을 잇던 에일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갑자기 동굴 안을 덮친 싸늘한 기운으로 인해 온몸에 소름이 끼쳐왔다.
일어선 상태에서 가위라도 눌린 듯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었고, 오직 눈동자만이 바쁘게 돌아갔다.
[‘탐욕의 악마, 베나론’의 속삭임이 들려옵니다.]
키기기기긱!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에일 주변의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악마라는 상위의 존재가 손을 뻗어 세상에 직접 영향력을 끼치고 있기에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곧 동굴 안에 몰려든 깊은 어둠이 에일을 제외한 모든 것을 삼키고 공간을 잠식시켰다.
- 이대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베나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악한 성정을 숨기고 있는 묵직한 음성이 동굴을 울렸다.
- 나의 영역에 발을 들였지. 의식을 방해하고 제단을 파괴했다. 갈기갈기 찢어 죽여 마땅하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성난 황소가 내는 듯한 사나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당장이라도 위해를 가해 올 듯이 진득한 살기가 담긴 말들.
하지만 베나론은 곧 태도를 바꿨다.
- 하나 네놈은 최초이자, 유일한 사도. 가치는 충분하다. 나를 따르는 신도가 되어라.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힘을 약속할 테니. 세상이 네 발밑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내 아래의 모든 존재가 너를 따를 것이다.
베나론은 노골적으로 속삭이며 에일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어진 선택지에 대해 에일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
츠츠츠츳!
에일의 몸 주위에 전기가 튀며 화면이 뭉개진 듯한 노이즈가 발생했다.
천장을 뚫고 내려온 환한 빛줄기가 주변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묵직하게 진동했다.
[‘빛의 심판자, 루’의 개입이 태초의 어둠을 강타합니다!]
[‘탐욕의 악마, 베나론’이 거칠게 저항하며 포효합니다!]
키기기기긱!
두 거대한 존재의 충돌.
빛이 번쩍이며 사방에 온통 심한 노이즈가 끼기 시작했다.
막강한 여신의 힘이 세상에 개입해 영향력을 발휘했고, 베나론이 몰고 왔던 검은 기운 또한 거세게 요동쳤다.
때 아닌 ‘사도’를 발견한 베나론은 쉽게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루는 막 깨어났을 무렵, 영향력이 부족하다며 궁상맞던 모습을 보일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정의와 빛, 광기의 주인인 그녀는 워로드에 단 일곱뿐인 정당한 신격.
당연히 악마에 불과한 베나론과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한데 고작 악마 나부랭이 하나가 자신의 사도를 건드렸고, 그녀의 성격상 이런 일을 좋게 넘어갈 리 없었다.
키이이이익!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공간의 일그러짐이 점점 더 심해졌고, 일그러진 공간 너머에서 악마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옅게 들려왔다.
화악!
점점 커지던 소리가 뚝 멎어 사라졌다.
일그러졌던 공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히 돌아와 있었다.
[던전을 잠식하던 ‘탐욕의 악마, 베나론’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
순간 벙한 채 서 있던 에일은 뒤늦게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를 옆에서 지켜본 네슈아는 그 모습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방금 일어난 일련의 일들은 모두 에일의 시야 안에서만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네슈아로서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악마가 깨어 있었다고……?’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가까스로 정신을 환기시킨 에일은 조용히 이마를 감싸 쥐었다.
워로드 세계관 속 악마들의 설정이라면 에일도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신격들에게 반기를 드는 대척점들이자, 영원의 적.
하지만 그들 역시 신격과 마찬가지로 ‘잠들어 있어야 할 존재’임은 마찬가지였다.
절반쯤 잠든 상태에서 이렇게 세상에 개입하며 직접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불가능했어야 했고, 실제로 지금까지는 다른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이러한 움직임을 보인 적은 목격된 바 없었다.
루가 깨어난 나비효과가 다른 상위의 존재들에게까지 퍼져 나간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 건지.
에일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