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빛과 그림자 (5)
대부분의 유저가 알다시피 워로드엔 총 일곱의 신격이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신격’이란 모두에게 정식으로 인정받는 초월 개체들만을 따진 것이다.
지상의 필멸자들과는 다른 한 차원 위의 존재.
대륙 내에 실제 존재하는 초월체는 그 이상으로, 워로드의 여덟 악마가 대표적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들을 따라 엇나간 길을 걷는 자들 역시 필연적으로 존재했다.
“핏빛 황혼회.”
시체를 살핀 에일이 중얼거렸다.
갑자기 달려든 정체불명의 남자는 에일의 손에 쓰러졌고, 검은 로브에 찍힌 문장을 볼 수 있었다.
탐욕의 악마 ‘베나론’의 문장.
악마숭배자 집단인 핏빛 황혼회가 사용하는 표식이었다.
사악한 여덟 악마 중 하나인 베나론을 추종하는 그들은 유저들 사이에서도 꽤나 인지도 있는 광신도 집단이었다.
대륙 전역에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며 일곱 신격과 교단 모두를 적대하는 자들로, 에일이 속한 빛의 교단과도 극도로 좋지 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설마 이렇게 엮이게 될 줄이야.’
에일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들었다.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제단과 널브러진 사람의 시체들.
곳곳에 선명한 핏자국이 흩뿌려져 있었고, 학살의 현장이 생생히 남아 있었다.
명백한 인신공양의 흔적이었다.
남아있는 피 냄새와 그리 오래되지 않은 흔적들로 보아 이곳에 있던 마을 주민들을 제외하고도, 최근까지 바깥에 있던 외부인들을 끌고 와 제물로 삼은 듯했다.
[‘빛의 심판자, 루’가 참혹한 현장에 분노합니다!]
정의의 여신이기도 한 루로서는 당연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
물론 빛의 교단도 이단을 상대로 한 잔혹함이라면 어딜 가도 뒤지지 않지만, 여기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대상의 차이였다.
베나론의 추종자들은 아무런 연관도 없는 민간인들을 잡아다 제물로 바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자신들의 정의에 심취한 빛의 교단 소속의 성직자들이라면 그들을 보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다.
“왜 이런 녀석들을 믿은 거야?”
흥미로운 눈으로 제단을 살펴보고 있는 네슈아에게 에일이 물었다.
플레이어가 퀘스트를 받아들일 때 팩션의 제약 같은 건 없었지만, 이런 뒤가 구린 세력의 의뢰를 맡았다가는 뒤통수를 맞을 확률이 높은 게 당연했다.
하지만 네슈아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핏빛 황혼회에게서 의뢰를 받은 게 아니라는 뜻.
‘하긴, 굳이 빛의 교단이 아니더라도 교단들에겐 공공의 적이나 다름없는 세력이니까. 힌의 신도가 놈들하고 함께할 리가 없지. 황혼회의 입장에서도 굳이 하이엘프들을 방해하며 심기를 건드릴 이유가 없을 테고. 그렇다면 황혼회의 힘까지 빌린 누군가라는 건가…….’
공동의 목표가 있는 동업자 관계, 혹은 단순한 거래만 오간 사이일 수도 있었다.
물론 가장 확실한 건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었지만, 네슈아는 어떤 자들에게 의뢰를 받은 것인지 알려 주려 하지 않았다.
배신을 당했을 확률이 높긴 했어도 아직 그의 입장에서 100퍼센트 확신할 단계까지는 아니었고, 배신이 맞다한들 스스로 해결할 모양이었다.
어쩌면 누설 방지를 위한 계약이라도 따로 맺어 놨다든가.
[퀘스트 목표에 대한 추가 현상금 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추가 보상이라… 좋은데?’
메시지를 확인한 에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띄워졌다.
서로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은 관계라는 건, 다시 말하면 상대의 파멸을 더욱 반길 관계라는 말이기도 했다.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여신이 대뜸 퀘스트의 추가 보상을 추가해 집어넣은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잘만 하면 교단과의 관계도 뚫어 둘 수 있겠어.’
드르륵!
그때 숨겨져 있던 사방의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이교도들이 몰려나왔다.
똑같은 문양의 검은 로브를 입고 있는 걸 보아, 놈들 모두 황혼회의 광신도 무리였다.
“놈들을 죽여! 놓치면 안 된다!”
에일과 네슈아를 가리키며 노인이 소리쳤다.
그러자 제단의 꼭대기 위에서 조사를 하고 있던 그들을 향해 사방의 광신도들이 제단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눈이 벌게진 채 좀비떼처럼 몰려드는 광신도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광기에 사로잡힌 이들 같았다.
“이게 세 번째 난관인 건가.”
에일은 팔꿈치로 네슈아를 슬쩍 건드렸다.
“어떻게 할래. 앞? 아니면 뒤?”
「뒤」
“좋아.”
* * *
“크허억……!”
달아나던 노인의 등에 단검이 박혔다.
노인은 바닥에 쓰러졌고, 뒤따라온 네슈아가 다가와 단검을 회수하며 그의 숨통을 마저 끊었다.
사방에서 몰려들던 광신도의 무리를 모두 척살한 그들은 지하 세 번째 층까지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곳의 책임자로 보이는 노인이 계속해서 시설 안의 광신도들을 불러 모으며, 그들을 방패막이로 사용해 달아나는 통에 잡아내는 데까지 꽤나 애를 먹기는 했다.
하지만 에일과 네슈아는 아예 길을 막는 이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서 모두 제거해 버렸으니 더 이상 달아날 방도가 없었다.
-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출구의 열쇠(퀘스트)]
‘이번에도 다음 장소로 향하는 아이템인데……. 출구라고 써져 있는 걸 보면 이번이 마지막 시나리오였다는 건가? 아니, 어쩌면 보스전이 아직 남아 있을지도.’
루팅한 아이템을 확인한 에일이 생각했다.
이것으로 끝이 난 건지 아니면 뭔가가 더 남아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어도, 던전의 끝을 앞두고 있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위치한 지하 세 번째 층은 계단으로 이어진 마지막 층수인 데다가, 어딘가로 향할 만한 출구가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여기까지 내려오면서 달아나던 늙은 추종자를 쫓느라 빼놓고 지나친 구조가 없을 정도였고, 그 말은 즉 지금까지 지나쳐 온 부근에 출구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잠깐 혼자서 고민해 보던 에일은 확실한 답이 떠오르지 않자, 뒤를 돌아 네슈아에게 물었다.
“혹시 오는 동안 빠져나갈 출구같이 생긴 곳 못 봤어?”
「둘째 층 구석에 막혀 있던 통로」
떠올리기 위한 머뭇거림도 잠시, 출구로 의심 가는 곳 하나를 기억해낸 네슈아가 글자를 끄적였다.
“아아, 거기일 수도 있겠네.”
장소를 떠올린 에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세 번째 시나리오가 완료되었습니다!]
[부분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세 번째 시나리오가 완료되었고, 이제 남은 건 출구를 찾는 일뿐.
하지만 바로 그때.
구구구궁!
천장이 요란하게 울리며 부스러기들이 떨어졌고, 심상치 않은 진동이 땅을 타고 전해져 왔다.
[마지막 시나리오가 시작되었습니다!]
[제단이 파괴되어 또 다른 위협이 드러났습니다. 탐욕의 하수인 ‘말라고스’로부터 달아나 무사히 던전을 빠져나가십시오!]
[던전 붕괴까지 남은 시간 ‘00:17:59’]
“뭐……?”
당황한 에일이 흠칫 놀라 메시지창을 바라봤다.
아직 여신이 퀘스트를 부여했던 신성모독자를 마주치지도 못한 상황에서, 시간 내에 붙잡히지 말고 빠져나가라는 퀘스트가 생겨나 버렸다.
더욱이 던전 붕괴까지 주어진 시간은 18분.
그 안에 베나론의 하수인을 따돌리고서 던전을 빠져나가야 했다.
콰아앙!
천장 한쪽이 강한 폭발과 함께 허물어지더니, 그리로 커다란 몸집의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툭 튀어나와 있는 송곳니와 불그스름한 피부를 가진 험상궂은 악마형 몬스터.
녀석은 한 손에 꽉 들어차는 큼직한 몽둥이를 짊어지고 있었다.
[죄악의 존재, 신성모독자를 발견했습니다!]
[사악한 악마의 종복이자 교리를 모독하는 신성모독자 ‘말라고스’와 마주하였습니다. 반드시 그들이 죗값을 치르게 만드십시오!]
[임무에 실패할 경우 커다란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젠장, 설마 했는데…….’
하필이면 던전 시나리오의 설계상 도망쳐야 할 대상이 빛의 교단에겐 등을 보여선 안 될 숙적이었다.
그야말로 최악의 시나리오.
던전의 신성모독자를 제거하라는 루의 퀘스트까지 받게 된 이상 등을 보이고 도망친다면, 기껏 58퍼센트 넘게 올려 놓았던 총애 스탯이 대폭 증발해 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놈과 맞서 싸우는 것 역시 무모했다.
시나리오의 내용상, 보스를 공략하는 것이 아닌 도망치라고 되어 있는 걸 보면 웬만한 전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적이라는 소리였다.
게다가 18분이라는 시간제한까지 있으니 에일로서는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지.’
아무리 던전의 시나리오가 한 방향으로 존재한다 해도, 워로드에 무조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보창으로 보이는 적의 레벨은 35.
놈이 얼마나 강한지 세부 스탯은 알아낼 수 없었으나, 최소한 던전의 레벨대 근처의 적이었다.
만약 레벨부터 압도적인 몬스터가 등장한 것이었으면 31레벨에 불과한 에일의 공격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데미지가 들어가지 않았겠지만, 그런 경우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먼저 나가 있어. 저 녀석만 해치우고 뒤따라갈 테니까…….”
「시나리오는 그게 아니야!」
어깨를 덥석 잡은 네슈아가 에일의 눈앞에 양피지를 들이밀었다.
급하게 휘갈겨 쓴 글씨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찌푸려진 표정.
당연한 반응이었다.
달아나야 하는 시나리오에서 보스와 맞서 싸우겠다니, 에일이 반대의 입장이었어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쿵쿵쿵!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도 몬스터는 빠르게 다가왔고, 자세히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더욱이, 이런 확률 낮은 싸움에 누군가를 끌어들일 염치는 더더욱 없다.
[공격력이 일시적으로 상승했습니다!]
[방어력이 일시적으로 상승했습니다!]
[속도가 일시적으로 상승했습니다!]
[최대 체력이 일시적으로 상승했습니다!]
[재생 속도가 일시적으로 상승했습니다!]
[충격 내성이 일시적으로 상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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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그랑!
각종 포션을 담고 있던 병들이 바닥에 떨어졌고, 도핑을 끝낸 에일은 가볍게 입가를 닦으며 입을 열었다.
“빨리 가라. 보상은 나 혼자 다 챙겨 버릴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