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빛과 그림자 (4)
“꾸어어억!”
침입자를 발견한 비계 덩어리가 포효했다.
그리고는 통로를 메운 자신의 커다란 몸을 이끌며 그가 있는 쪽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미친……!’
기겁한 에일은 재빨리 놈의 정보창을 살폈다.
30레벨의 정예 몬스터, 포식귀.
처음 보는 몬스터이기에 자세한 스펙이나 특징 같은 건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준보스 수준인 정예몹을 공격 한 번에 제압하는 것은 당연히 무리였고, 놈의 덩치로 보아 움직임을 저지하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콰드드득!
자신의 살점을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포식귀가 다가왔다.
절로 헛구역질이 나오게 만드는 역한 악취는 둘째 치고, 일직선상의 구조라 옆이나 뒤쪽으로 빠져나갈 구멍도 없었다.
어설프게 맞서거나 우물쭈물하다간 저 비계 덩어리 밑에 깔려 찍소리도 못 하고 압사할 게 뻔했다.
주저하지 않고 등을 돌린 에일은 다시 위로 올라가기 위해 사다리를 집었다.
“……?”
하지만 그사이 뒤따라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고 있던 네슈아가 있었다.
괴물의 존재도 모르고 거의 바닥 부근까지 내려온 그는 의도치 않게 에일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
“그, 그만! 다시 올라가!”
“꾸어어억!”
바로 뒤까지 쫓아온 포식귀에 급해진 에일은 네슈아의 다리를 위로 밀어 넣으며 사다리 위쪽에 매달렸다.
콰과과광!
포식귀가 요란한 소리를 일으키며 통로의 끝에 부딪혔다.
그러자 에일은 밀어 넣었던 그의 다리를 다시 아래로 끌고 내려갔고, 한데 엉킨 둘은 바닥에 형편없이 엎어졌다.
머리에 묻은 끈적한 진흙을 털어낸 네슈아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으며 에일을 쏘아봤다.
하지만 둘의 바로 뒤, 벽 끝에 포식귀가 머리를 처박고 있었고 설명할 시간 따윈 없었다.
“빨리 가기나 해!”
재빨리 일어난 에일은 네슈아의 등을 떠밀었다.
포식귀가 돌진해 반대편에 머리를 처박아 준 덕에, 놈이 막고 있던 길이 잠시나마 뚫렸다.
이 틈에 빨리 통로 밖으로 빠져나가야 했다.
“꾸워이익!”
포식귀는 한층 더 기괴해진 소리를 내뿜으며 그들을 뒤쫓아왔다.
몸집에 비해 은근히 빠른 놈의 속도에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에일과 네슈아도 레벨대에 비해 빠른 축에 속했고 겨우 붙잡히지 않고 일자형 수로의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탁 트인 공간이 앞에 나타났고, 바깥으로 겨우 빠져나온 둘은 각각 양옆으로 몸을 날렸다.
쿠구구궁!
입구를 반쯤 박살 내며 뛰쳐나온 포식귀는 제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었다.
놈이 바닥을 한차례 미끄러지는 동안, 에일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네모난 방 안에는 두터운 기둥들과 넓은 공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쇠로 된 커다란 대문이 반대편에 놓여 있었는데, 그 너머에선 더욱 심해진 피 냄새가 풀풀 풍겨왔다.
“꾸워어어억!”
그사이, 포식귀가 힘겹게 균형을 잡으며 일어났다.
지방 아래에 파묻혀 있던 뚱뚱한 두 다리가 모습을 드러냈고, 놈의 키는 방금 전보다 더욱 커져 천장에 머리가 닿을 지경이었다.
쿠웅!
힘껏 팔을 휘두른 포식귀가 바닥을 한차례 뒤집어 놓았다.
사방으로 날카로운 파편이 튀며 시야를 방해했다.
하지만 이미 앞으로 달려가고 있던 에일은 개의치 않고 놈의 큰 동작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포식귀의 옆구리에 성화를 먹인 검을 꽂아 넣었다.
푸욱!
화르르륵!
장검이 박히며 포식귀의 몸에 백색 불꽃이 타올랐다.
녀석의 두터운 지방이 악취와 함께 태워졌고, 반대된 속성의 데미지가 확실히 들어갔다.
생겨먹은 대로 체력과 방어력은 높은 녀석이었지만, 이미 놈의 머리 위엔 이단의 낙인이 큼지막이 찍혀 있었고, 에일이 뽑아낼 수 있는 최대한의 데미지가 박혀 들어갔다.
그리고 여기서 한 번 더.
휘릭!
옆구리에 꽂혔던 장검이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에일의 손에 예리한 생김새의 청색 창이 쥐어졌다.
‘독사의 창’.
단검을 잃어버린 대신, 저번 도시의 경매장에서 구매해 뒀던 양손창이다.
이단심판관의 무기에 달려 있는 제한은 오직 근접이어야 한다는 조건뿐이었기에, 창이든 단검이든 보조 무기를 선택할 때 자유로울 수 있었다.
콰악!
[특수 효과 ‘중독’이 발동되었습니다!]
- 피격당한 몬스터의 체력이 일정 시간마다 서서히 감소합니다.
녀석의 다리에 꽂아 넣은 창의 효과가 발동되었다.
화상과 중독, 체력을 갉아먹는 두 가지 효과가 동시에 발동되자 포식귀의 체력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육중한 몸으로 덮치려 포식귀가 반격했지만, 에일은 이미 창을 회수한 채 훌쩍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히든 던전의 엘리트 몬스터인 녀석은 생각만큼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치이익!
금세 상처 부위가 끓어오르더니, 그 안에서 살들이 꾸역꾸역 부풀어 오르며 상처를 덮어 버렸다.
‘재생력이 높은 타입인가……!’
단순히 출혈이 멈추거나 상처가 가려진 선에서 그친 게 아니었다.
실제 정보창의 툴팁상으로도 떨어졌던 체력이 다시 차오르고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나마 화상과 독이 회복을 상쇄하고 있을 뿐.
체력과 방어력까지도 높은 놈의 특성상, 미리 알고서 대처를 해 온 게 아닌 이상에야 에일 혼자만의 힘으로 쓰러뜨리기엔 절대 무리나 다름없었다.
물론 지금의 에일은 혼자가 아니었다.
파앗!
기척을 죽인 네슈아가 포식귀의 등 뒤로 뛰어들었다.
포식귀는 뒤에서 뭔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에일을 보고 있었고, 네슈아는 그 틈에 ‘약점 간파’ 스킬을 발동했다.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줄 수 있는 급소 부위를 만들어 표시해 주는 스킬.
푹! 푹! 푸욱!
단검이 정확히 급소 부위를 연달아 찔러 들어갔고, 커다란 데미지가 놈의 체력을 뭉텅뭉텅 깎아냈다.
거기다 네슈아의 단검이 찌르고 지나간 상처 주위엔 흑색 서리가 눌어붙었다.
녀석의 움직임이 느려지며 재생 속도가 반의 반토막 났다.
둔화는 물론 재생 방해 효과까지 부여하는 그림자 파수꾼의 간판 스킬, 어둠 서리의 부가 효과였다.
아찔한 고통이 느껴지자 포식귀는 급히 뒤를 돌려 했다.
하지만 녀석의 앞에 있는 이 역시 에일이었고, 에일이 가만히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둘은 포식귀를 교란하며 양쪽 반대편에서 번갈아 공격을 가했다.
고작 둘이서 막강한 정예 몬스터 하나를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호흡이었다.
“꾸워어어!”
위기감을 느낀 포식귀가 격렬하게 발버둥 치며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허공을 가를 뿐, 놈의 살갗이 맹렬하게 타오르며 방 전체에 지방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촤악!
에일과 네슈아가 동시에 포식귀의 뒤꿈치를 한쪽씩 베었고, 순간 다리에 힘을 잃은 녀석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훌쩍 뛰어오른 에일이 놈의 가슴팍에 장검을 찔러 넣었다.
정확히 심장을 꿰뚫은 장검은 거무죽죽한 피를 토해 내게 만들었다.
남은 체력, 0.31퍼센트.
포식귀는 의식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 * *
[‘형벌 선고’에 따라 지정된 형벌을 성공적으로 집행하였습니다. 스킬의 효과로 스탯 보너스가 두 배로 늘어납니다.]
[여신의 총애 +0.39% (현재 58.81%)]
[빛의 교단 공헌도 +85]
[신앙심 스탯 +2]
[광기 스탯 +2]
[참수형 집행으로 인해 심판관의 속도가 60분간 10% 증가합니다.]
“오케이.”
장검을 어깨에 기댄 에일이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몸통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악취를 뿜어내고 있는 포식귀의 목을 한쪽 구석으로 뻥 차냈다.
-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탐식의 대검(희귀)]
[녹슨 철제 반지(하급)]
[정제되지 않은 회색 결정(일반) x 4]
[꿈틀거리는 덩어리(하급) x 33]
.
.
.
[61실링 4크론]
에일은 몬스터의 시체를 루팅한 뒤 해체 작업까지 마쳤고, 포식귀는 까다로운 정예 몬스터답게 많은 아이템을 떨어뜨렸다.
그중에서 단연 눈이 가는 것은 희귀 등급의 무기, ‘탐식의 대검’.
에일은 지체할 것 없이 인벤토리에 들어왔던 대검을 꺼내 들었다.
‘엄청 크잖아?’
예상 이상으로 묵직한 무게감에 놀란 에일이 양손 위에 올려진 대검을 바라봤다.
일반적인 무기들에 비해 큰 편인 ‘장검’을 사용하던 에일이었지만, 지금 손에 쥐인 대검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장검이 길고 예리한 검신을 지니고 있었다면, 대검은 길고 두꺼운 데다가 묵직한 무게까지 갖춘 녀석이었다.
더군다나 ‘탐식의 대검’은 일반적인 대검의 디자인보다도 약간 더 커다란 크기를 지니고 있었으니, 처음으로 대검을 집어 보는 에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검을 사용하는 클래스들의 움직임이 괜히 느리다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못 쓸 만한 수준은 결코 아니야.’
기본적으로 대검 무기들은 약점도 여럿 있긴 했지만, 누가 뭐래도 단순 공격력만큼은 대형 둔기류와 함께 근접 무기 최고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이번 ‘탐식의 대검’에 부여되어 있는 부가 효과.
첫 공격에 한정, 1.5배의 데미지를 적에게 준다는 것.
한 전투에서 똑같은 적에게 두 번 이상의 공격을 가한다면, 그때부터는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1.5배라는 수치는 그를 가볍게 무시하고도 남을 만큼 굉장한 메리트였다.
더욱이 보조 무기로 사용하기엔 딱 좋은 효과.
“…정말 필요없어?”
대검을 쥐어 든 에일은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러자 팔짱을 끼고 있던 네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보스몹에게 나온 아이템이라 해도, 어지간한 레어 아이템이나 스킬북이 아니라면 관심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다면야.”
어깨를 으쓱인 에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굳게 닫혀 있던 반대편 쇠문으로 다가가, 가운데 파여 있는 홈에 열쇠를 집어넣었다.
해체한 포식귀의 뱃속에서 나온 열쇠였다.
철컹!
내부로 통하는 입구가 열렸다.
철문 너머엔 깊은 구멍이 아래로 뻥 뚫려있었고, 기다란 계단이 그를 따라 이어져 있었다.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의 통로 사이엔 악마의 형상을 띠고 있는 석상들이 여기저기 늘어서 있었다.
‘네크로맨서들과 관련된 던전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군.’
더욱 짙어진 진득한 혈향에 에일이 인상을 찌푸렸다.
코를 찌르는 피 냄새의 진원지가 저 아래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