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빛과 그림자
대부분의 RPG 게임에서 무력의 척도를 가장 쉽게 가리는 법은 아무래도 레벨의 높낮이다.
레벨이 오르면 기본적인 스탯 자체가 오르는 동시에 더욱 좋은 장비들을 장착할 수 있게 되고, 자연히 저레벨 유저와는 확연한 격차가 발생하게 된다.
이는 워로드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렇다고 워로드의 육성에서 단순히 빠른 레벨 업만이 전부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동일 실력이라 한들, 단순히 레벨이 10이나 20 넘게 차이 나는 것보다 오히려 해당 유저가 그동안 어떤 스킬을 조합하고 세팅했는지가 훨씬 더 많은 것을 가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런 만큼 육성에서 상위 등급 스킬북의 중요성은 매우 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에일이 이 고생을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으그극!”
이를 꽉 깨문 에일이 팔을 위로 뻗었다.
가파른 절벽에 매달려 있는 에일은 돌출된 부분들을 잡아 가며 위를 향해 오르고 있었고, 발아래로는 바위 부스러기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에일은 저 깊은 계곡 아래로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의식하며, 계속해서 부지런히 팔을 움직였다.
굉장히 높은 위치 탓에 일단 떨어졌다간 예외 없이 죽는다고 보면 됐다.
난데없이 에일이 이런 위험한 절벽에 매달려 익스트림 스포츠를 하고 있는 이유.
바로 하이엘프들에게서 받은 퀘스트 때문이었다.
하얀 숲에서 날아온 전언에 따르면 로툼족에게서 받았던 고대 정령석을 다시금 빼앗으려 잠입한 침입자가 있었다고 한다.
하얀 숲에 발을 들인 겁 없는 도둑은 당연히 벌집이 되었고, 그에게서 얻은 비밀 문서를 토대로 다음 접선 장소를 알아내 에일에게 보내며 조사를 요청한 것이다.
저번 사건의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거라며 추적해 달라는 의뢰.
웬만해서는 자신들의 영역에서 나오지 않으려 하는 하이 엘프들인지라 대신 에일에게 부탁한 것이었고, 정령의 숲에서 있던 일과 연계된 연계 퀘스트이기도 했다.
마침 다음 행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에일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양질의 퀘스트는 많은 경험치를 주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좋은 스킬북 수급처가 되어 주기도 했다.
보상이 훌륭하다고 유명한 퀘스트들은 대개 임무 중에 만나게 되는 보스가 드랍을 하건, 아니면 완료 보상으로 NPC가 건네주건, 높은 등급의 스킬북과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 엘프들이 맡기는 퀘스트의 보상이 좋기다는 말도 후한 스킬북 보상을 주는 편이 많았기 때문에 있는 말인 만큼, 이번 의뢰 또한 잘만 성공시킨다면 보상으로 상위 스킬북을 기대해 볼 수 있었다.
터억!
에일이 마지막으로 힘껏 팔을 뻗었고, 가파른 절벽 사이에 뭉툭 튀어나와 있는 동굴의 입구 앞에 설 수 있었다.
“어우, 힘들어 죽겠네.”
동굴의 앞에서 주저앉은 에일은 잠시 땀을 닦으며 숨을 돌렸다.
아무리 스탯을 비롯한 시스템상의 보정이 들어가 있다 한들, 이런 아찔한 절벽을 타고 오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난 에일은 절벽에 나 있는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이 근방에 사냥터나 특이한 장소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다. 이렇게 대놓고 입구가 나 있는 동굴이 미발견일 리도 없을 테고.’
그렇다면 갑자기 몬스터나 새로운 던전이 엮이기보다는, 접선 장소라는 말 그대로 적대 NPC나 유저를 상대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정령의 숲에서 마주했던 그 플레이어가 이 자리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장검을 미리 빼든 에일은 안으로 들어가자 듬성듬성 놓여 있는 횃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지……?’
동굴의 끝에 선 에일이 당혹감을 느끼며 멈춰 섰다.
동굴은 깊게 이어지지 않았고, 얼마 들어가지 않아 막다른 길이 나타났다.
하지만 정작 그럴 동안 내부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사람의 형체를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이고, 횃불을 제외하면 인위적인 구조물조차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스륵.
그때, 갑자기 에일의 뒤편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갑자기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검은 후드의 남자.
어쩌면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정령의 숲에서의 그 플레이어가 맞았다.
자발적으로 나선 걸 보아 기습을 할 생각을 한 건 아닌 것처럼 보였는데,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는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었다.
아무리 미리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고는 하나, 에일이 바보같이 방심을 하고 있던 것도 아니고, 지나치며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는데 이상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를 마주하게 된 지금, 그런 잡념은 잠시 뒤로 미뤄둬야 했다.
“또 만났군.”
에일이 장검을 치켜들자, 남자도 아무 말 없이 단검을 뽑아 들었다.
이미 한 번 싸움을 벌여 보았음에도 서로에게 악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양쪽 모두 중요한 퀘스트에서 완전히 반대의 입장에 서게 된 만큼, 싸움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세 번째 스킬을 얻지 못한 상황에 마주한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파앗!
둘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세차게 내딛던 둘의 발이 움푹 꺼지며 바닥이 내려앉았고, 두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닌 엉뚱한 소리가 들려왔다.
덜컹!
에일은 이런 소리가 주로 어떤 일에 들려오는 효과음인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함정……!’
당했다, 라는 생각과 함께 낭패감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미처 에일의 얼굴이 다 일그러지기도 전에 남자의 표정 또한 볼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당혹감에 물든 건 상대의 표정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준비해 둔 함정이 아니라고……?’
콰드드득!
딛고 있던 바닥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파편 덩어리들과 함께 둘은 속수무책으로 아래로 빨려 들어갔고, 곧 또 다른 바닥과 금세 마주할 수 있었다.
쿠웅!
“어우 씨…….”
형편없이 떨어진 에일이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얼마나 아래로 떨어진 건지 위를 올려다보려 했지만, 이미 무언가 컴컴한 장막 같은 것에 막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다시 위를 통해 나가는 건 무리처럼 보였다.
그때, 함께 떨어졌을 사내가 생각난 에일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누구 할 것 없이 엉망으로 굴러떨어진지라, 눌러쓰고 있던 그의 검은 후드가 뒤로 벗겨져 있었고, 가려져 있던 얼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차분한 인상의 얼굴, 그리고 헝클어진 잿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쿠에에에엑!
저편에서 쩌렁쩌렁 울려오는 몬스터들의 울음소리.
둘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고, 곧 다른 곳과 이어진 통로에서 엄청난 숫자의 괴물들이 몰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소리를 듣고서 먹잇감을 찾아 몰려드는 몬스터 무리에 에일은 재빨리 인벤토리를 열어 성수를 꺼냈다.
그리고 꺼내 든 성수를 힘껏 휘둘러 입구 앞에 기다랗게 뿌렸고, 그 위에 스킬을 발동해 성화의 불씨를 놓았다.
화르르륵!
바닥에 흩뿌려진 성수에 불씨가 닿자, 순식간에 몸집을 불린 백색 불꽃이 기름에 붙은 불길처럼 거세게 타올랐다.
미친 듯이 달려오던 괴물들은 강한 불길 앞에서 멈춰서 머뭇거렸고, 그를 무리하여 넘으려는 녀석들은 거센 성화에 휘말려 자멸했다.
“후우…….”
에일은 잠시 한숨을 돌렸다.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었지만, 최소한 불길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넘어오지 못할 것이다.
“설마 함정에 대해 몰랐던 건 아니겠지?”
뒤를 돌아본 에일이 잿빛 머리의 사내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허…….”
에일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먼저 여기서 접선을 기다리고 있던 주제에 함정에 대해선 몰랐다니.
그렇다면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의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여긴 너희 쪽 접선 장소잖아. 그러면 당연히 너한테 지시를 했던 NPC가 이런 걸 꾸며 놓은 걸 테고. 구분 없이 함께 죽이려고 한 걸 보니까 아무래도 네가 배신당한 거 같은데…….”
에일이 반쯤 확신한 추측을 그에게 말했다.
일단 무너져 내린 곳에 생긴 정체불명의 장막으로 보아, 다시 위쪽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누군가 마법적으로 조치를 해 둔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그가 미리 도착해 혼자 있을 때는 발동되지 않다가 에일이 도착한 뒤에야 발동하도록 하는 조건까지 걸려 있던 함정이었다.
단순히 우연한 균열이나 함정이라고는 볼 수 없었고, 답은 이번에도 영악한 워로드의 NPC가 플레이어를 배신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러웠다.
‘어쩐지 그 악명 높은 하얀 숲에 고대 정령석같이 중요한 물건을 훔치려 했으면서, 달랑 도둑 하나만 보낸 게 이상하다 싶었어.’
그가 어떤 자들의 사주를 받고 움직인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부러 하이 엘프들에게 접선 장소에 대한 정보를 흘렸고, 일을 방해했던 자신을 꾀어 죽이려 한 거라는 추측이 에일의 머릿속에서 줄줄이 떠올랐다.
어쩌면 앞에 선 사내도 저번 임무에서 실패한 것 때문에 배신당했을지 몰랐다.
“…….”
인상을 찌푸린 남자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은 채 잠시 생각에 빠졌다.
유저도 아니고 NPC들에게 배신을 당했다면 혼란스럽거나, 더욱 불쾌감을 느낄 게 당연했다.
하지만 눈앞에 선 사내의 기색은 두 가지 모두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의 어색한 침묵.
에일은 아까부터 말 한마디 않는 그를 약간은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봤고,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그는 갑자기 무릎을 굽힌 채 쪼그려 앉았다.
그리곤 쥐고 있던 단검으로 바닥에 쓱쓱 글씨를 써 내려갔다.
「일리 있는 말」
“…내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에일이 황당해하며 물었고, 이번에도 사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인 에일은 마찬가지로 그의 앞에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이름은?”
「네슈아, 그쪽은」
“에일. 그런데 굳이 이런 상황에서도 컨셉질을 해야겠어? 바로 옆에 몬스터가 득실거리고 있는데 말이야.”
「어쩔 수 없어」
어깨를 으쓱인 사내가 묵묵히 글자를 마저 적었다.
그리고는 글씨를 적던 단검을 마치 보라는 듯이 들어 보였고, 예리한 단검의 날을 가볍게 손으로 훑었다.
스스스!
쩌저저적!
짙은 냉기와 함께 칠흑같이 검은 서리가 단검에 피어올랐고, 에일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