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운칠기삼 (7)
일방적인 추격전이 벌어지던 상황이 단번에 180도 뒤바뀌었다.
살벌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그를 지켜보고 있는 에일의 이마에서 땀이 삐질 흘러나올 정도였다.
“이번에 스왈로우에서 떨어져 나와 들여온 신입이다. 아직 상황 파악에 미숙하다 보니 실수를 저질렀군. 대신 사과하지.”
툴론이 나서 뒤늦게 수습에 나섰다.
얼마 전 망해 버린 스왈로우라는 청부 길드에서 뿔뿔이 흩어진 길드원들 중 실력 있는 자들을 아마란스에서 데려와 영입했고, 루카스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전의 잡다한 청부 길드에 몸담고 있을 당시엔 6대 길드와 굳이 마주칠 일 자체가 없었고, 아직 완전히 적응도 하지 못해 아마란스의 일원답지 않게 대처에 미숙한 실수를 저질러 버린 것이다.
사정을 들은 타샤는 피식 웃으며 무기를 거뒀고, 싸늘한 시체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장비는 잘 챙겨서 전해줘. 교육도 좀 확실히 시켜 두고.”
“…나이트메어의 일을 방해하는 일은 없을 거다.”
조심스럽게 물러선 툴론은 루카스의 시체에서 아이템을 루팅한 뒤, 빈사 상태가 되어 쓰러져 있던 조원을 회복시켰다.
그리곤 바로 눈앞에 있는 에일에게는 그 어떠한 미련도 없이 거리에서 사라졌다.
그동안 집요하게 쫓아오던 걸 생각하면 놀랍도록 빠른 단념이었다.
“저쪽으로 갔어!”
“괜찮으십니까?”
멀찍이서 달려오던 경비병들이 다가와 그녀의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애초에 선공을 가한 건 아마란스 쪽인 데다가, 설령 그 반대의 상황이라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이곳 도시를 지키는 NPC들조차 나이트메어 길드의 소속이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굳이 추적할 필요는 없어요.”
“아, 알겠습니다.”
회수한 창의 피를 쓱쓱 닦고 있던 타샤가 말하자, 사라진 툴론을 쫓으려던 경비병들은 일제히 멈춰 섰다.
경비병들은 거리에 널브러진 시체의 뒤처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에일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가득 차 돌아다녔다.
다른 유저도 아니고 하필 나이트메어의 길드원이 왜 갑자기 그들 사이에 끼어든 것인지 쉽게 추측이 되지 않았다.
아무런 연관점도 없던 상황에서 자신에게서 무얼 원하는 건지, 단순한 동정심이나 여흥이었던 건지, 아니면 그가 모를 이유가 있던 건지.
에일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큰일 날 뻔했는데 다행이네요. 아, 어차피 혼자서도 충분히 빠져나가실 수 있으셨으려나.”
“아뇨,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타샤의 말에 손을 저은 에일은 감사를 표했다.
스스로 빠져나갈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이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의 말은 예의상 하는 소리가 아닌 진심이었다.
그녀가 직접 에일을 위해 나섰다는 건, 단순히 이 자리에서 위기를 모면하는 것 이상의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방금 그거 봤어?”
“뭐야, 무슨 일이야……?”
거리에 선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이 느껴졌다.
일을 이렇게나 벌려 놓았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고, 타샤 또한 그를 느꼈는지 에일에게 빙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일단 자리를 옮길까요?”
* * *
“이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쪽지를 받아 든 에일이 놀라 중얼거렸다.
그녀가 건넨 것은 나이트메어의 연락처가 적힌 조그만 쪽지.
하지만 단순히 실제 번호로 이루어져 있는 공식 연락처가 아닌, 영문과 숫자로 조합된 워로드 내 메신저의 채널 번호였다.
일반적인 공식 번호로는 길드에서 고용한 게임 바깥의 상담 직원과 통화가 될 뿐이었지만, 이런 비공식 라인을 통하면 곧장 나이트메어 길드 내의 직속 담당팀과 연결이 된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는 확연한 차이였다.
평범한 문의나 형식적인 내용 따위가 아닌, 길드 차원에서 어느 정도 가치 있는 연락을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채널이었다.
아무나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제안받은 것에 대해 굉장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에일은 쪽지를 내려놓고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고작 29레벨짜리 초짜가 6대 길드 안에서 뭘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물론 무리겠죠. 너무 늦은 시작점이 안타까운 이유가 바로 그거고요. 하지만 굳이 길드에 직접 들어오는 게 아니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협력할 길이야 많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에일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6대 길드는 기본적으로 모두 철저한 정예의 모임이었다.
방금 보았다시피 한 명 한 명이 준랭커급의 최상위 유저들이었고, 여타 길드와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질적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다수의 길드 인원 중 허수가 단 한 명도 없는 강력한 무력 집단.
때문에 그 아래를 구성해 줄 수많은 산하 길드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겨우 그것 때문일 리는 없고…….’
나이트메어의 길드원씩이나 되는 자가 고작 산하 길드에 들일 인재를 구하기 위해 직접 다른 길드와의 분쟁에 끼어들고, 시간까지 내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물론, 하위 길드에 대해 말하는 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에일이 반응을 보이자,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소속되는 것도, 그 산하 길드에 대한 스카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이트메어에서 직속 채널 코드를 뚫어 줄 만한 경우라면, 길드의 외부 협력 관계에 놓으려는 플레이어들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간과하는 사실이었지만, 길드가 아닌 개인의 입장에서도 거대 길드들과 동업자 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6대 길드라는 초거대 길드를 상대로 제시할 만한 협상 카드를 지니고 있을 때의 이야기.
대표적으로 워로드 최고의 대장장이로 유명한 ‘케니스’가 6대 길드를 비롯한 수많은 대형 길드의 러브콜을 받으며 외주를 맡는 것처럼, 각종 생활 컨텐츠에서 높은 랭크의 생산 기술을 가지고 있는 유저들이 그들과 그런 관계를 맺고는 했다.
거기에 드물긴 하지만 랭커 수준의 몇몇 강자는 개인으로 활동하며, 여러 길드를 상대로 용병이나 해결사 같은 역할을 맡아 돈을 챙기기도 했다.
하지만 생활 컨텐츠엔 전혀 손을 대지 않은 데다가, 레벨까지 낮은 에일의 경우엔 둘 중 어느 쪽에도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생각하자면 6대 길드의 외부 협력 관계에 대한 건은 에일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였다.
“쓸 만한 길드 중에 받아 주는 곳이 없는 건 아닐 테고……. 사정이 있어 길드에 들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1년이나 늦은 후발주자로서 혼자서 계속 버티기엔 힘이 부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건 늦게 시작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
“아시다시피 지금 워로드는 온갖 길드로 넘쳐나고 있어요.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생존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죠. 영지를 차지하고 있는 대형 길드건, 뒷골목 구석의 중소 길드건,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깔아뭉개는 걸 주저하지 않아요. 감상에 빠져 있기엔 너무나도 많은 돈이 걸려 있는 판이고, 그것들은 오직 승자만의 차지니까요. 뒷배경 없이 그들을 상대로 살아남으려면, 단순히 개인의 실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거예요.”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타샤가 에일을 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자,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있나요? 워로드 굴지의 거대 길드들조차 탐낼 만한 무언가가.”
이채를 띤 타샤의 눈동자가 에일을 꿰뚫었고,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린 에일은 자기 자신도 느끼지 못할 만큼 미세하게 입꼬리가 비틀렸다.
‘과연 6대 길드쯤 되면 다르다 이건가…….’
워로드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이후, 에일이 항상 한쪽에 생각해 두고 있던 점을 그녀가 정확하게 짚었다.
방금 처음 본 사이인 데다 길지 않은 대화였음에도, 그가 처했을 상황에 대해 훤히 읽고서 말한 것이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에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하필 저에게 이런 제안을 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제 소개로 길드하고 잘 이어지면, 그 건도 실적으로 인정받거든요. 하하!”
타샤가 장난 섞인 말투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물론 그런 경우가 눈에 띄게 드물긴 하지만… 그쪽에게 아무것도 없을 거란 생각은 왠지 들지 않아서요.”
‘가능성을 봤다는 건가…….’
“안 내키신다면 얼마든지 무시해도 괜찮아요. 가는 사람 붙잡고 늘어지는 그런 곳은 아니니까. 그럼 전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볼게요. 혹시 길드와 이야기하게 되면 제 이름 꼭 말해 주세요?”
“아, 네… 그렇게 하죠.”
유쾌하게 말을 마치며 일어난 타샤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누거나 설득할 것도 없이 쿨하게 사라졌고, 에일도 그녀에게 뭔가를 더 물어보려 하지 않았다.
양쪽 모두 서로의 의도와 의중에 대해 충분히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런 방식으로 해결될 줄은 몰랐는데.’
정말 의외의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하게 된 에일은 잠시 그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일단 나이트메어의 길드원이 직접 나선 이상, 아마란스 쪽은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에일이 아직 그들과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고는 해도, 그걸 아마란스의 입장에서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6대 길드와 조금이라도 엮인 이상 그들은 쉽게 행동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방금의 대화에서 그녀가 말했듯이, 이번이 끝이라고 볼 수 없었고 오히려 시작에 가까울 것이다.
‘일단 워로드에서 경쟁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인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마찰은 불가피하다. 당장의 위기는 어떻게 넘기게 됐지만, 시비가 붙을 때마다 이 짓을 반복할 수는 없어.’
워로드를 오롯이 혼자의 힘만으로 헤쳐 나가기는 무리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이번 기회에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이번 사건은 에일에게는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사도의 신분으로 길드 아래에 들어갈 생각 따윈 없지만… 대형 길드들과의 관계를 만들어 둘 필요는 있어.’
비단 나이트메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의 일원에게 도움을 받고 비공식 채널 코드까지 받아내는 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오히려 개인으로 활동하는 입장에선 한쪽하고만 거래를 주고받는 것보단, 믿을 만한 거래처가 많이 만들어 둘수록 좋았다.
그렇다면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경쟁력’을 찾아야 했다.
‘어차피 당장은 채널을 통해 연락해 봤자 아무런 수확도 얻을 수 없다.’
막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거대 길드들은 기본적으로 철저한 갑이었다.
위상의 차이가 엄청나니 아쉬운 쪽은 에일뿐이었고, 최소한 어느 정도 동등한 입장에서 주장을 내세울 수 있을 만큼 이쪽의 가치를 올려놔야 했다.
다만 저쪽에 자신의 사도 시스템에 대해 알릴 수는 없는 데다가, 시작이 한참 늦은 만큼 실력을 내세울 수도 없었다.
애초에 ‘레벨에 비해서 잘한다.’ 정도는 6대 길드를 상대하는 입장에선 아무런 이점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에일이 처한 지금의 상황에서, 거대 길드를 대상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래, 결국 나에게 남는 건… 캐릭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