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운칠기삼 (5)
“에일이라는 이름의 이단심판관이다. 혹시 근래에 본적이 없나?”
“이단심판관? 빛의 교단 놈들을 말하는 건가?”
“그래 본 적 있는 거야?”
“아니, 전혀. 그런 미치광이들이 우리 구역에 들렀다면 기억했을걸.”
“하, 이런 빌어먹을…….”
한숨을 내쉰 루카스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번에도 꽝이었다.
에일에게 당했던 루카스와 조원들은 페널티가 끝나자마자 부활한 뒤, 그에 대해 조사를 하고 다녔지만 예상만큼 쉽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무려 아마란스의 두 조가 나섰음에도 진척 상황은 답답했다.
아마란스는 물론이고 그 전 청부 길드에 몸을 담고 있을 때조차, 고작 저레벨 유저 하나에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경우는 정말 흔치 않았다.
‘그 자식은 무조건 내가 잡는다. 20레벨짜리한테 개망신을 당했는데 그냥 넘어갈 수야 없지…….’
시체굴에서의 굴욕적인 죽음.
아직도 그때의 분이 안 풀린 루카스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자… 잠깐!”
루카스가 보여 줬던 에일의 사진을 회수하고 자리를 뜨려 하자, 마주하고 있던 남자는 그를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아마란스에서는 이쪽 일에 관심 없나? 그쪽이 마음만 먹으면 돈 꽤나 만질 수 있을 텐데 말이지…….”
“뭐? 우리 정도 규모에 마약 나르다 걸리면 왕가한테 찍혀서 모가지 날아가는 거 몰라?”
“그러지 말고… 새로 나온 신상이 있는데 이게 요즘 정말 짭짤하다니까? 다른 길드들도 하나둘 발 들이고 있는데.”
“됐어. 장사나 잘하쇼.”
루카스가 미련 없이 등을 돌리자, 남자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이쪽도 오래는 못 가겠구만. 하던 대로 무기 암거래나 하고 있을 것이지.”
루카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이야기를 듣자하니 암거래상 NPC 주제에 대규모 마약 유통에까지 손을 댄 모양이었는데, 설마 자신들에게까지 제안을 해 올 줄은 몰랐다.
밀수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마약 문제만큼은 왕가에서 엄격하게 규제를 가하는 사안이었다.
물론 플레이어에게는 아무런 효과도 없는 잡동사니에 불과했지만, 뒷골목의 NPC들에겐 굉장한 아이템이라 유통에 개입한다면 많은 수익을 남길 수 있었다.
당장 돈이 급하거나, 리스크를 겁내지 않은 자잘한 조직들이 주로 손을 대는 부분이었는데, 저렇게 대책 없이 사업을 늘려나가다간 어지간히 운이 좋지 않은 이상, 얼마 가지 못해 쓸려나갈 것이다.
아무래도 이들을 대체할 정보망을 새로 구해야 한다고 보고를 해 두는 게 좋아 보였다.
“루카스! 당장 출발한다.”
뒤에서 나타난 툴론이 그를 불렀다.
다급한 말투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껴졌다.
“갑자기 어딜 가는 겁니까? 혹시 그 자식이라도 발견된 겁니까?”
루카스가 서둘러 움직이고 있는 툴론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비슷하다. 이번엔 놈이 먼저 움직였어.”
“먼저……?”
이번 일을 맡긴 의뢰인, 베켄에게서 도착한 뜬금없는 답장.
하지만 정작 아마란스에서는 그에게 우편 같은 걸 보낸 적이 없었다.
생뚱맞은 답장의 내용으로 보아, 아마란스 길드를 자칭하는 누군가에게 뒷골목으로 오라는 서신을 받은 듯했는데, 보나마나 그를 유인하려는 에일에게 사칭을 당한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마 그런 멍청한 수에 속아 넘어갔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의뢰인들을 우리 기준에서 생각하지 마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라고 생각하는 편이 편할 정도니까.”
청부업에 몸을 담고서 온갖 PVP 상황을 겪으며 구르던 그들과, 그런 것 없이 사냥 위주로 플레이하는 자들.
당연히 같은 시간을 플레이한 유저라 해도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하물며 고작 20레벨 수준의 유저에게 뭔가를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의뢰인이 그들과 꽤나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점.
하지만 시체굴에서 보였던 타깃의 실력을 보아 지금쯤 붙잡혀 있을 거라 생각해 두는 편이 좋았다.
“서신이 발송됐던 우편함의 위치로 보아 도시의 동쪽 구역 내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가능하면 의뢰인을 살리는 방향으로 가고, 발견하면 곧바로 연락해라.”
“알겠습니다!”
* * *
삐걱삐걱!
의자에 묶인 베켄이 거세게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를 얽맨 밧줄은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고, 그러다 균형만 잃고서 바닥에 넘어져 머리를 정면으로 박았다.
“끄웁……!”
입까지 막혀 있어 비명도 지르지 못한 베켄은 정신을 못 차리고 해롱거렸다.
“거참, 가만히 좀 있으라니까.”
다른 일 처리를 위해 잠시 나갔다 들어온 에일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입을 막고 있던 재갈을 풀어 줬다.
“야이 XXXXXX 우웁……!”
막혔던 입이 뚫리자마자 상스러운 말들이 터져 나왔고 그에 기겁한 에일이 다시 그에게 재갈을 물렸다.
“어우, 무슨 입에 걸레를 물었나. 말 좀 이쁘게 하고 살자.”
“읍읍! 읍읍븝!”
에일의 얼굴을 보자 또다시 열불이 치솟아 올랐는지 의자가 덜컹거릴 정도로 날뛰었다.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러나 에일은 별 신경이 쓰이지 않는지, 그저 느긋한 자세로 씩씩거리고 있는 베켄의 성질이 누그러들기를 기다렸다.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은 듯한 기색이 보이자 그의 재갈을 다시 풀어 줬다.
“푸하! 내가 누굴 만나러 여기에 온 건지나 알고 있는 거야!”
“그래, 오지도 않을 아마란스를 보러 온 거겠지.”
“뭐, 뭐야?”
아마란스의 길드원을 만나러 향하던 길이었다는 걸 에일이 알고 있자, 베켄은 화들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사실은 당연한 부분이었다.
아마란스를 사칭해 지체하지 말고 곧바로 여기로 오라는 우편을 보낸 건 바로 에일이었으니까.
에일은 베켄이 있을 만한 위치를 추적해 이 도시에 도착했고, 베켄의 뒤를 밟으며 기회를 엿봤다.
만약 조금이라도 머리가 굴러간다면, 아마란스에서 원래의 연락망을 두고서 갑자기 우편을 보낼 이유가 없다는 걸 알고 수상한 낌새를 느꼈겠지만, 베켄에게 그런 머리가 있을 리 없었다.
경비병에게 들키지 않도록 인적 드문 뒷골목으로 유인한 뒤, 그를 제압하는 건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마냥 여유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베켄이 우편함 앞에서 작성한 답장이 아마란스에게도 갔을 것이었고, 그들 정도의 눈치라면 베켄을 자신이 속여 넘겼을 거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두 추적자 무리가 어디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이 도시를 향해 서둘러 오고 있을 것이었으니 최대한 빨리 끝내는 편이 이로웠다.
“내가 시간이 많지 않아서 말이야. 10분 안에 해결이 안 나면 널 죽이고 갈 거야.”
“해결? 무슨 해결을 하겠단 거냐? 감히 나를 건드려 놓고 멀쩡히 넘어가겠다고!”
선후관계를 완전히 잊어버린 듯한 모습에 에일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고는 베켄의 목에 들이밀었다.
서늘한 칼날이 목에 닿자 베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며 움츠렸다.
“더 이상 긴 말 안 해. 의뢰를 취소하던가 아니면 여기서 죽던가.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다.”
“흐하하하!”
베켄이 광포한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네 말을 들을 것 같냐? 뭐가 무서워서?”
“끝까지 가보겠다고?”
“그래, 이 XX야. 어디 한번 백날 천날 죽여 봐. 난 네가 죽어 나가는 꼴을 봐야겠으니까. 물론 니 놈이 날 죽일 수 있을 때 이야기지.”
베켄의 눈이 시뻘겋게 번들거리며 빛났다.
콧대가 하늘을 찌르던 그는 에일에게 한 번 당하고 나서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으아아아!”
베켄이 대책 없이 날뛰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날뛰는 탓에 의자가 심하게 덜컥거렸고, 당황한 에일이 미처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사건이 터졌다.
푸욱!
“커헉… 끄억…….”
베켄의 목 한가운데에 깊숙이 검이 박혔고, 그의 체력이 주르륵 줄어들었다.
제압하는 과정에서 이미 체력을 한참 낮춰 놨기 때문에 칼을 찔리자마자 사망했고, 결국 혼자서 발광하다 죽은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미, 미친…….”
에일은 감출 수 없는 당혹스러움에 우두커니 자리에 섰다.
베켄에게 직접 찾아간다는 것부터 워낙에 변수가 많은 선택지이긴 했지만, 이건 철저히 예상 밖의 사태였다.
그리고 그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뒤에서 정체모를 인기척이 느껴졌다.
콰앙!
잠겨 있던 문짝이 강한 충격에 사정없이 뜯겨져 나가 바닥을 굴렀다.
그를 추적해 온 아마란스 길드원 셋이 동시에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문을 발로 차 뜯어낸 루카스가 가장 먼저 들어와 곧바로 활시위를 당겼고, 에일은 그를 보자마자 창문을 깨고 달아났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에일의 몸이 건물의 1층 뒷마당에 안착했다.
뒤에선 추적자들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고, 에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길로 빠졌다.
‘젠장, 벌써 여기까지 쫓아 올 줄이야.’
계획을 짜며 나름 여유 있게 잡은 시간대였는데, 예상 이상으로 아마란스의 대처가 빨랐다.
‘하지만 이렇게 될 가능성도 계산 못 하고 온 건 아니다.’
비록 일이 꼬여 바로 뒤에 추적자들이 붙게 되었다고는 하나, 이대로 끝장날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상대해 봤던 경험이 있어 그들의 스킬까지도 모두 파악하고 있는 에일은 그들에게서 도망칠 자신이 충분히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의 환경상, 시체굴과 같은 던전에 있을 때와는 이야기가 달랐다.
경비병들이 있는 도시에선 함부로 화살을 날린다는 둥의 선공을 하지 못한다.
확실한 끝을 맺을 공격이 아니라면 괜히 경비병들의 시선만 끌게 되어, 오히려 그들이 쫓기는 관계가 될 수 있었다.
추적자들의 입장에서는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을 때 에일을 공격해 목숨을 끊은 뒤, 경비병들에게 붙잡히거나 현상금이 붙지 않도록 적당히 따돌려 도시를 빠져나가기까지 해야 했으니, 이것저것 생각할 게 훨씬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또 이용할 수 있는 에일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던전을 채웠던 조잡한 함정들보다도 더욱 강력한 무기가 되어 줄 수 있었다.
‘그래… 어디 한번 쫓아와 보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