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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이단심판관-63화 (63/227)

63화 운칠기삼 (3)

파티가 전멸할 수도 있었던 위기가 순식간에 마무리된 상황.

하지만 쓰러뜨린 몬스터가 무색하게, 그들 파티엔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단람과 퓨리온은 에일이 보인 스킬과 행동으로 빛의 교단 소속의 이단심판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분명 검사 직업이라며 들어왔고, 명백히 거짓말을 해 그들을 속인 것이었다.

“…….”

바짝 긴장한 그들이 에일의 눈치를 살피며 곁눈질했다.

빛의 교단 소속의 플레이어들이 온갖 미친 짓을 벌인다는 건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 목숨을 빚져 화를 내기도 뭐한 데다가, 그들은 에일이 보여 준 모습에 완전히 압도되어 있었다.

‘다행히 예상대로 흘러가는 흐름인걸.’

둘의 기색을 살핀 에일이 생각했다.

자신이 별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분위기가 바뀌었다.

파티의 주도권이 단숨에 에일에게로 넘어온 것이다.

에일도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 예상하고서, 심판관의 전용 스킬들을 처음부터 보이지 않고 조금 뒤에 선보인 것이었다.

굳이 일반 몬스터의 목을 참수해 버리는 약간의 쇼맨십과 함께.

“단람 님, 저는 보호해 주실 필요 없으니까 퓨리온 님 쪽으로 몬스터가 붙으면 단람 님이 곧바로 케어해 주세요. 몬스터를 최대한 뒤로 안 흘리는 게 1순위지만 갑자기 네다섯이 달려들면 어쩔 수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미리 예상했어야 하는데 너무 당황해서… 면목 없네요.”

“괜찮습니다. 죽은 사람도 없는데 다가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 방금의 전투로 확실히 알았으니까요. 아, 그리고 퓨리온 님은 전투가 시작될 때 미리 속박 마법으로 한 마리 정도는 묶어 주세요. 숫자가 하나 줄어들면 앞 라인 부담이 덜해 훨씬 수월할 겁니다.”

“그렇군요…….”

“에일 님, 혹시 파티장 권한 드릴까요?”

파티장을 맡고 있던 단람이 순순히 에일의 뜻을 물었다.

하지만 에일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상황마다 제 지시엔 어느 정도 따라주세요. 쉽게 볼 만한 사냥터가 아니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 파티원들은 에일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혹시나 거슬려 할까 그의 직업에 대해선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빛의 교단 유저들은 시스템적으로 교리에 어긋난 유저들을 가차 없이 공격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다행히 자신들이 범위 내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할 뿐이었다.

다음에 그들 파티가 마주한 구울의 수는 총 다섯.

위험했던 방금 전 사냥 때보다도 더 많은 숫자였다.

하지만 이번은 에일이 이단심판관으로서의 능력을 숨기지 않았고, 상황에 맞춰 파티원들에게 하나하나 지시해 나가며 공략을 진행했다.

그러자 오히려 몬스터의 숫자가 늘어났음에도, 위험한 순간이 나오지 않고서 전보다 순조롭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마지막 녀석 잡았습니다!”

“허… 아까보다 훨씬 나은데요?”

‘역시 실력이 형편없는 사람들은 아니야.’

방금 전에는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해서 그렇지, 기본 실력이나 센스가 부족한 경우는 아니었다.

몬스터가 보이는 패턴에 어느 정도 적응되자, 자신이 맡은 역할은 각자 기본 이상으로 충실히 해내는 중이었다.

물론 경험이 부족한 낮은 레벨 대의 유저답게 여러모로 미숙한 면을 보이긴 했지만, 에일이 직접 오더를 내리며 주도하는 사냥에서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에일의 시선에서야 조금 답답하긴 해도, 지시에 맞춰 나름대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에일의 생각일 뿐.

다른 누군가의 시선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빛의 심판자, 루’가 고구마를 먹은 듯 답답해합니다.]

[그녀는 당신이 한시라도 빨리 쓸모없는 동료들을 쳐내길 바랍니다.]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들이 에일을 독촉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동 레벨 대 유저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준수한 편이었는데, 엄연한 신격이라 그런지 역시 눈이 높았다.

아마 그들이 쓸데없이 에일의 옆에 붙어 경험치와 보상만 축낸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그들보다 더 나은 동료를 새로 구하던가, 혼자서 사냥터를 씹어 먹어야 만족할 듯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쓸모가 없다는 표현은 조금 심하지 않…….”

“예? 죄송한데 뭐라고 하셨죠?”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에일이 재빨리 말을 얼버무렸다.

딴에는 들리지 않게 조용히 말했는데 혼자서 중얼거린 것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남들 앞에 있을 때는 ‘루’와의 대화를 최대한 자제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물론 후방에 서 있는 사람이 알리사 님이었다면 속도가 훨씬 빨랐겠지.’

에일이 무심코 알리사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녀도 지금쯤이면 보랏빛 스킬북을 사용해 새로운 스킬을 배웠을 터.

단 둘이서 이곳을 찾아왔더라도 오히려 세 명으로 이루어진 지금의 파티보다 속도가 더욱 빨랐을 것이다.

하지만 에일은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생각을 떨쳐냈다.

그들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괜히 저울질을 해가며 비교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혼자서는 이곳에서 사냥을 해 봤자 부담이 커서 제 속도를 내지도 못하거나, 중간에 죽을 위험도 몇 번씩 겪어야 했을 것이다.

이들보다 나은 동료를 당장 주변에서 구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

에일이 아무 이유도 없이 먼저 나서 공짜로 남들에게 경험치와 보상을 퍼줄 만큼 허술한 것도 아니었고, 분명 필요했기 때문에 계획한 일이었다.

워로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정성으로, 한 번의 죽음조차도 치명적이었다.

실수든 자만이든 지금 에일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우측에서 구울 네 마리가 저희를 봤습니다!”

“바로 싸우죠. 아까처럼 그대로 가면 됩니다.”

방금 전투를 치렀음에도 파티는 계속해서 속도를 유지한 채 사냥을 이어갔다.

리듬감을 잃지 않고서 한번 탄 기세를 쭉 이어가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그들은 사냥터의 중심부로 나아가며 구울들과 마주하는 족족 싸웠고, 포션과 회복 마법으로 체력과 마나를 채우는 것을 빼면 조금의 틈도 없었다.

물론 험난한 강행군 속에 파티원들이 지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한껏 집중한 에일의 모습과 시종일관 진지하게 사냥에 임하는 태도 때문에 차마 이쯤에서 쉬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에일의 검이 언제든 자신들에게 날아들 수 있다고 생각한 탓에 그저 이를 악물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

파티는 바닥을 드러내려 하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사냥터에 위치한 몇 안 되는 안전지대로 빠져나왔다.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는 지점이었으니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해도 습격을 당할 걱정은 없었다.

‘인장이 영 안 나와 주네.’

에일이 입안에 든 빵을 우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직까지 ‘찢어진 왕가의 인장’ 아이템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고, 파티원들끼리 분배할 것도 없었다.

물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은 아니었다.

얻을 확률이 낮을 거라고 미리 이야기를 들었던 뒤였다.

이 방법이 생겨나고 지난 일주일이 지나도록, 실제로 인장을 완성시켜 왕가와 대면한 사람은 불과 몇 명이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다소 운이 따라줘야 하는 에일의 입장에서는 곤란한 부분이었다.

‘아무래도 좀 더 속도를 내야겠어.’

식사가 대강 마무리되자 에일은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배도 채웠고 다들 일어나죠.”

“네……? 농담이죠?”

“저희 진짜 엄청나게 돈 것 같은데 조금만 쉬죠?”

퓨리온이 간절한 눈빛으로 에일을 올려다보며 말했고, 옆에 있던 단람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세 시간 가까이 사냥터를 돌아 놓고 여기서 더 굴리겠다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에일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아주 단호하게 답했다.

“그건 안 됩니다.”

“그, 그럼 쉬는 시간은…….”

“쉬긴 뭘 쉬어요? 이제 막 시작했는데요.”

“예……?”

에일의 말을 들은 퓨리온과 단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지옥의 행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확실히 가볍게 넘길 만한 일은 아니군.”

반쯤 무너진 성채 안을 걷던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을이 사라지고 밤이 된 하늘은 어두웠지만, 아직 여기저기 살아 있는 불길에 그의 붉은 머리칼과 멋들어진 얼굴이 비쳐보였다.

남자는 확인한 보고서를 다시 금발의 여인에게 넘겼다.

“12강 길드 중 대부분은 이미 행동에 나섰습니다. 특히 얼마 전 레이드에 실패했던 붉은 달은 이쪽에 사활을 건 듯 보이고요. 왕가 측 분기점과 깊숙이 연관되어 있는 건 확실한 데다가 특히 블러디 핸즈, 검은 형제단, 모락 던. 이 3대 세력들이 일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건…….”

“그래, NPC 주제에 냄새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 녀석들이니까.”

워로드 세상을 한차례 뒤흔드는 거대한 줄기, 월드 퀘스트.

물론 월드 퀘스트야 주기적으로 늘 생겨나던 것이었지만, 이번은 여러모로 심상치 않은 조짐을 풍겨왔다.

이번 일의 중심에 서 있는 왕가는 물론, 워로드의 뒷골목을 장악한 3대 세력들이 모두 움직이기 시작했고, 거기다 인간 외 이종족 세력까지 움직이며 상당한 수의 네임드 NPC들이 엮여 들어가고 있었다.

왕국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

“오라클에서도 몇몇이 퀘스트에 관여하기 시작한 걸 보면, 여태 일어났던 월드 퀘스트들 중에서는 유례없는 규모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길드장. 원래대로라면 굳이 이런 지저분한 판에 끼어들 필요는 없겠지만…….”

“아직은 지켜봐야지. 하루 단위로 보고서 올려 보내.”

“알겠습니다. 말해 두도록 하죠.”

아직 길드 단위로 그들이 움직일 만큼 가치가 있냐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많은 세력이 엮여 들어가고 있는 만큼 특별히 주시할 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둘은 거칠게 뜯겨져 나가 있는 2차 성문을 지나친 뒤, 성채 중심부의 길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군데군데 엉망으로 부서진 건물의 내부엔 벨로나 길드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깃발이 찢겨진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상당히 유용한 영지인 ‘성채’ 하나를 자력으로 차지하고 있던 벨로나는 1,900여 명의 길드원을 거느린 대형 길드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과 13시간 전에 이루어진 선전포고가 있기 전의 이야기일 뿐.

그들의 자랑이었던 영지는 완전히 제압되어 벨로나 길드원들의 시체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 측 피해는 있었나?”

“길드 NPC 병력을 제외하면 이번 전투에 동원된 길드원 중 사망자는 총 ‘0’명입니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만… 그렇겠지.”

덜컹!

둘은 길드 건물 가운데에 위치한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적당한 크기의 방 안에는 여섯 명의 유저가 서 있었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이들을 보자마자 좌우로 길을 비켜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들의 정체는 랭커.

워로드 공식 랭킹 1,000위 안에 드는 실력자들이자, 최소 200레벨을 넘는 최상위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대형 길드조차 쉽게 대할 수 없는 거물이라는 뜻.

하지만 남자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가볍게 손짓할 뿐이었고, 그들은 고개를 끄덕인 뒤 방 안을 빠져나갔다.

“제, 제발. 영지만은…….”

집무실 한쪽에 쌓여 있는 시체들과는 다르게, 유일하게 목숨이 붙어 있던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길드장으로서 빚까지 지며 모든 걸 쏟아부었던 길드였고, 그간의 모든 노력이 담긴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순간의 안일함에 취해 고작 한 번의 실수만으로 하루아침에 모든 게 바뀌었다.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용의 꼬리를 밟아버린 것이다.

“당신들하고 관련된 물건인 줄 몰랐어… 실수였다고! 제발!”

발악하듯 말을 토해낸 사내가 위를 올려다봤다.

여명의 솔로스.

6대 길드 중 하나를 대표하는 길드장이자, 전체 랭킹 3위에 달하는 명실상부한 워로드 최강의 격투가.

하지만 그를 내려다보는 솔로스의 냉랭한 눈빛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콰악!

바닥에 흩뿌려진 진득한 핏줄기와 함께 남자의 목숨이 끊겼다.

그러자 솔로스의 옆에 선 금발의 여인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정말 몰랐을까요?”

“몰랐다면 더더욱 망해야겠지.”

그가 간단하게 답했다.

길드장이란 강하기만 하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단순히 인맥이 넓거나, 자금이 많거나, 레벨이 높은 정도로는 부족했다.

길드의 방향을 정하는 결정권자가 판을 읽는 능력이 떨어진다면 그 길드는 결코 일정 단계 이상으로 성장할 수 없다.

특히 잘못 엇나간 결정 하나로 언제 길드가 와해되어 사라질지 모르는 워로드에서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고 영지를 차지했을 정도라면, 머리 하나 제대로 못 쓰는 머저리가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리 만무했다.

분명 물건을 빼돌리는 데 제안받은 액수가 배후를 들켜 6대 길드의 눈 밖에 날 위험을 감수하고도 혹할 만큼 대단한 단위였을 것이다.

물론 결국엔 아이템의 회수도 문제없이 이루어졌고, 그들의 최후만 야기한 꼴이 되어 버렸지만.

“나이트메어가 자작극을 벌여 놓은 것만 해도 성가신데 사건이 끊이지 않는군. 다음 레이드 일정까지 얼마나 남았지?”

“두 시간 남았습니다. 바로 가실 건가요?”

“그렇게 하지.”

근처에 잡힌 레이드 일정이 하나 있었을 뿐, 애초에 이 정도 길드 하나를 밀어 버리는 것쯤은 그들이 굳이 들를 만한 사안도 아니었다.

그렇게 솔로스는 먼저 자리를 떠났고, 금발의 여인은 현장의 마무리를 위해 잠시 성채에 남았다.

어차피 남은 일을 마저 진행한다 해도 일정엔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침 건물을 나온 그녀에게 기다리고 있던 길드원들이 다가왔다.

“아리에 님,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다들 수고했어요.”

여인이 가벼운 미소를 띠며 말했고, 길드원들은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접경지역 변방의 성채.

중소규모 거점치고는 규모가 있는 편이라고는 하나, 지리적 위치가 심히 불편한 편이었고, 여명이 소유한 거점들에게서도 다소 동떨어져 있는 위치였다.

물론 영지 하나에 온갖 신경이 쏠릴 일반적인 길드들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것이 맞았다.

하지만 온갖 중심 거점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는 6대 길드, 여명의 입장에서는 관리하는 데 들어갈 비용까지 생각하면 별다른 의미가 없는 지역이었다.

오히려 나이트메어와의 전면전이 일어났을 경우, 공격에 대처하기만 어려워질 뿐.

그렇다면 처리 방법이야 간단했다.

“자, 이제 여길 지도에서 깔끔히 지워 버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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