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운칠기삼 (2)
“뭐야… 노루잖아?”
“한참 부패돼서 어디 쓰지는 못하겠네요.”
파리가 날리는 노루의 시체를 앞에 두고서 에일은 어깨를 으쓱였다.
워로드는 도시나 마을 안이 아닌 이상에야 어디서든 야생 동물을 쉽게 볼 수 있는 편이었다.
사냥터에서 직접 서식하는 몬스터가 아니더라도 주변 지역에 살던 동물이 발견되는 경우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다만 식량이 부족하다거나 가죽 아이템이 필요하다면 모를까, 생활직이 아니라 사냥을 하던 유저들한테는 별로 신경 쓸 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퓨리온은 노루의 시체 앞에서 대뜸 무릎을 꿇더니, 구울의 이빨 자국이 남은 상처를 쓰다듬었다.
“몬스터에게 당했나보구나. 안쓰럽기도 하지.”
고개를 숙인 퓨리온이 잠시 묵념했다.
정말 뜬금없는 그의 말과 행동.
감수성이 풍부하거나 특이한 성향의 사람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워로드를 플레이하는 유저라면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아니, 전용 스탯은 좀 솔플할 때 올리시죠.”
갑작스런 퓨리온의 자연 사랑 컨셉에 단람은 못 볼꼴을 봤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항의했다.
직업 전용 스탯, 혹은 5번째 스탯.
에일이 틈틈이 기도를 올릴 때마다 신앙심 스탯이 조금씩 올라가는 것처럼 다른 유저들도 마찬가지였다.
직업과 관련된 특정 행동을 반복하거나 조건을 만족하면 전용 스탯이 올라갔고, 직업 전용 스킬의 효율성이 올라갔다.
이는 워로드에 컨셉러들이 많은 이유이기도 했다.
드루이드의 전용 스탯은 전투나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스탯을 쌓는 것이었고, 퓨리온도 스탯을 올리기 위해 방금 저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
“솔플할 때라니요? 백기사야 적당히 파티 맺어서 싸우기만 하면 오르겠지만, 드루이드는 항상 이렇게 하면서 올려줘야 합니다.”
백기사 역시 전용 스탯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
파티원들을 대신해 공격을 받아 내며 막아서거나, 위기의 순간 타인을 위해 희생할 때 늘어나는 ‘기사도’ 스탯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워로드의 수많은 전용 스탯 중에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전투만으로 손쉽게 늘어나는 편이었다.
그러나 단람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드루이드도 전투가 주 수급원인 건 똑같잖아요. 그거 해 봤자 얼마나 오른다고. 오히려 전투만으로 올리는 사람들이 더 많잖습니까?”
“저기, 싸우지들 말고…….”
난처해진 에일이 끼어들며 중재를 시도했다.
멀쩡히 잘 나가던 파티에서 갑자기 균열이 생기는 것만큼은 사절이었다.
하지만 단람은 한 번 더 목소리를 높였다.
“파티하는 데 서로 민폐는 끼치지 말아야지. 길 가다 나뭇가지가 부러져 있을 때마다 멈춰 서서 불쌍하다 이럴 겁니까?”
“아, 알겠어요, 알겠어. 자제하면 되잖아요. 어쩔 수 없지.”
다행히 퓨리온이 먼저 단념하고 물러섰다.
파티원끼리 다툼이 시작되기 전에 서로 적당히 끊으며 마무리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초면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만큼 생각도 못한 곳에서 잡음이 나오거나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합의점을 찾고 넘어가려면 서로 간의 배려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좋아요. 다시 집중하고 갑시다.”
“저기……!”
단람이 손을 올려 에일의 뒤를 가리켰다.
둘의 다툼 소리를 듣고 온 건지 네 마리의 구울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원래 네다섯씩 무리를 지어 다니는 녀석들의 습성상 오히려 이쪽이 일반적인 경우였고, 출발 전부터 예상했던 범주 내였다.
하지만 실제로 살벌한 기세로 달려드는 고레벨의 괴물 무리 앞에서 긴장하지 않을 이는 많지 않았다.
[디버프, ‘위축’ 상태에 빠집니다!]
심한 레벨 차이 때문에 생겨나는 위축 효과가 이번에도 발생해 파티원들의 전체적인 능력치를 저하시켰고, 에일은 순간 얼 타고 있는 단람에게 소리쳤다.
“단람 님, 어그로 부탁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번쩍 정신을 차린 단람이 방패를 치켜들며 앞으로 나섰다.
아무리 전문 탱커라 해도 네 마리나 되는 고레벨 몬스터를 혼자 감당하기엔 무리였고, 에일도 그와 함께 전위에 섰다.
쿠웅!
거세게 달려온 구울과 부딪히며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단람과 달리 에일은 정면으로 받아 내지 않고 슬쩍 몸을 돌려 피했고, 주르륵 미끄러진 구울에게 장검을 휘둘렀다.
지금은 검사로서 파티에 들어와 있었고, 정체를 숨기느라 성화를 비롯한 심판관의 전용 스킬은 사용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의 상태보다는 많은 데미지를 줄 수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언데드 몬스터인 만큼 이미 이단의 낙인이 찍혀 있었고, 에일은 위축 디버프조차 무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파티원들에 비해 유리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총애와 광기로 올라간 전투 능력치는 무시할 수 있는 수치가 아니었다.
침착하고 능숙하게 전투를 풀어나간 에일의 검이 연달아 구울의 살과 뼈를 가르며 검은 피를 쏟아내게 만들었다.
푸욱!
장검이 구울의 안면을 파고들어가 머리를 깊숙이 쑤셨다.
그러자 녀석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몸을 비틀며 바닥에 쓰러졌다.
왼쪽 팔에 입은 작은 상처를 제외하면 에일의 몸은 멀쩡했고, 표기된 HP상으로도 90퍼센트를 웃도는 수치를 보이고 있었다.
50레벨 몬스터와 27레벨 유저 간의 대결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깔끔한 싸움.
하지만 다른 쪽에선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지 않았다.
에일이 구울 한 마리를 상대하는 동안, 탱커인 단람은 전면에 나서 구울 세 마리의 어그로를 한데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언데드치고 굉장히 민첩한 놈들의 움직임에 단람은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가 방어태세에 전념한 동안 구울 한 마리는 도중에 표적을 바꿨다.
뒤로 물러나 마법을 시전 중인 퓨리온에게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파바박!
땅을 힘껏 박찬 구울이 퓨리온을 노렸다.
그동안 캐스팅을 끝낸 그의 공격 마법이 녀석에게로 뻗어 갔지만, 구울은 마법에 직격당하고도 잠시 비틀거리기만 할 뿐 완전히 쓰러지지는 않았다.
데미지는 확실하게 들어갔지만 마무리를 짓기엔 무리였다.
키이이익!
“이 자식이……!”
구울이 더욱 매서운 기세로 달려오자, 퓨리온은 들고 있던 지팡이를 힘껏 바닥을 내려찍었다.
그러자 땅바닥에서 여러 갈래의 뿌리들이 솟아올라오더니 구울에게 휘감겨져 녀석을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붙잡힌 구울은 몸부림쳐 봤지만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일정 시간 동안 상대를 속박하는 드루이드의 전용 스킬, ‘살아 있는 뿌리’였다.
“잡몹 주제에 어딜 감히… 크헉!”
촤아악!
또 다른 구울이 갑자기 나타나 기다란 손톱을 휘둘렀고, 그에 무방비하게 맞은 퓨리온은 벌러덩 뒤로 넘어졌다.
마법으로 구울 하나를 붙잡아 두는 건 성공했지만, 그러는 사이에 단람이 붙잡고 있던 구울 한 마리가 옆으로 빠져 퓨리온을 노린 것이다.
공격을 한 번 허용하자 허약한 체력의 마법 특화 드루이드는 그것만으로도 빈사 상태 직전에 이르렀다.
앞을 책임진 메인 탱커는 빠져나간 몬스터와 당장 맡고 있는 몬스터 사이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모습이었고, 전체적으로 파티원들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몬스터에 넘어져 있는 퓨리온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구울의 다음 움직임은 재빨랐다.
마무리를 지을 괴물의 손톱이 순식간에 그의 목을 노리고 다가왔다.
“으윽!”
퓨리온은 죽음을 직감하고서 팔을 들어 올린 채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화르르륵!
퓨리온의 시야 앞을 가득 채운 건 괴물의 손아귀가 아닌 순백의 불꽃이었다.
곧게 휘둘러진 에일의 장검 궤적을 따라 성화가 사악한 언데드 몬스터를 불태웠고, 구울은 비명을 지르며 튕겨져 나갔다.
성속성과 화속성을 겸비한 성화가 이단의 낙인 효과와 합쳐져 막강한 데미지를 입힌 것이다.
키이이익!
그사이 뿌리로부터 속박이 해제된 구울이 에일의 등 뒤를 노렸다.
하지만 그를 눈치 채고서 재빨리 뒤를 돈 에일은 정확한 타이밍에 스킬 역극을 사용해 오히려 놈의 뒤를 잡았다.
순간적으로 가속된 움직임.
두 차례 휘둘러진 에일의 장검이 구울의 등을 깊이 베어 갈랐고, 불길에 휩싸인 구울은 땅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그렇게 녀석의 체력은 바닥나 목숨이 끊어졌다.
“잠깐, 그거 혹시 희귀 등급 스킬… 아니, 그보다 아까 그 하얀 불꽃은 대체……?”
뒤늦게 정신을 차린 퓨리온이 에일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말했다.
희귀 스킬 역극은 근접 클래스 전용 스킬들 사이에서 꽤나 인지도 있는 편이었고, 그도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고작 20레벨 대의 유저가 벌써부터 희귀 등급 스킬을 지니고 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
하지만 그것보다도 의문인 것은 백색 불꽃의 정체였다.
그가 알고 있기로는 ‘검사’ 직업이 가지고 있는 스킬 중에 검신에 하얀 불꽃을 일으키는 스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워로드의 직업과 스킬에 대해 넓은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퓨리온의 입장에서는 에일의 정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쿠르르륵!”
“앗! 그쪽으로 갑니다!”
이번엔 뒤쪽에서 단람과 실랑이를 하던 구울이 그를 따돌리고서 에일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공격을 맞고 날아갔던 구울까지 어느새 일어섰고, 둘의 어그로는 모두 에일을 향하고 있었다.
양쪽에서 동시에 몬스터가 달려드는 상황.
에일은 앞뒤로 시선을 오가며 둘의 체력을 가늠했다.
최대한 침착하고 느긋하게.
그리고 두 몬스터가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스킬을 발동했다.
다시 한번 사용된 역극.
그리고 일섬.
에일은 순식간에 앞에서 달려들던 몬스터의 뒤를 돌았고, 두 마리의 구울이 한데 겹치는 순간, 강력한 검격과 화염이 전방을 휩쓸었다.
콰과과과!
‘세상에…….’
그 광경을 코앞에서 목격한 단람과 퓨리온은 넋이 나간 채 자리에 굳었다.
막강한 데미지와 이펙트.
정확히 어떤 스킬을 사용한 것인지는 몰라도 일반적인 스킬은 아닐 거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상대했을 때는 몬스터 하나를 쓰러뜨리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에일은 별다른 케어도 없이 혼자의 힘만으로 몇을 베어 버렸다.
“케륵 케르륵…….”
검에 베인 뒤, 백색 화염에 휩쓸려 나간 구울들은 바닥에 나가떨어져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한 녀석은 목숨이 완전히 끊어졌지만, 뒤편에 있던 구울은 희미하게나마 숨통이 붙어 있었다.
단람과 실랑이를 하던 구울은 발이 묶였을 뿐 데미지 자체는 얼마 받지 않아, 에일의 일섬 스킬로도 한 번에 숨을 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빈사 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녀석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에일은 질질 장검을 바닥에 끌며 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스킬을 통해 왼손에 소환해 낸 법전을 펼쳤다.
“형벌 선고, 적합한 형벌은 참수형.”
파악!
높이 올라갔던 장검이 단숨에 내려 찍혔다.
발악하듯 꿈틀대던 구울의 목이 말끔히 잘려 나갔고, 바로 근처에 엎어져 있던 퓨리온의 얼굴엔 새빨간 피가 튀어 묻었다.
뜨듯한 기운과 함께 검붉은 핏줄기가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고, 그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이단심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