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운칠기삼 (1)
[에스마이어 지역 내 주요 소식 모음]
[6대 길드의 동향 파악 보고서]
[최근 갱신된 랭커 순위 변동 목록]
[신규 던전 레헬름의 세부 구조 및 공략]
[월드 퀘스트 단서 정리]
주르륵 이어진 목록들이 개인 인터페이스에 올라와 있었고, 마차 위에 올라타 있는 에일은 그를 빠짐없이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다음 목적지까지 그리 멀리 떨어진 편도 아니긴 했지만, 자투리 시간도 빠짐없이 활용했다.
살아남기 위해선 언제나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피로한 눈을 잠시 껌뻑인 뒤, 고개를 들자 어느새 가까워진 목적지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하, 절경인걸.”
눈앞에 펼쳐진 멋진 광경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여태껏 건너온 평야에서 우뚝 솟아난 협곡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양쪽으로 내려선 가파른 절벽 사이에 쳐져 있는 거대한 성벽은 웅장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거기에 중간중간 끼어 있는 뿌연 안개는 성벽의 높이를 체감시켜 주며 한층 더 운치를 더해 줬다.
퀸즈 블론드와 왕의 무덤, 하얀 숲을 비롯해 워로드를 플레이하면서 여러 멋진 경치들을 봐왔지만, 새로운 지역에 향할 때마다 매번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달그닥 달그닥!
말발굽 소리와 함께 열려 있는 성문 안으로 마차가 들어섰다.
에일이 타고 있는 마차는 개미 한 마리 정도로 보일 만큼, 협곡 사이를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양쪽을 오가고 있었다.
칼페아 관문.
락포터와 듀벨 두 대도시 사이를 잇는 중요한 중간 거점 지역이자, 근방 평원 전체를 관통하며 교통을 가로막은 절벽 지대를 손쉽게 넘나들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만큼, 많은 사람들이 들를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한쪽엔 무역을 위해 움직이던 상인 유저들이 한데 모여 앉아 쉬고 있었고, 반대편엔 검은 갑옷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성벽 위를 경계 중인 나이트메어 소속의 NPC들과 같은 자들이었는데, 접경지역 근방의 중요 거점지인 만큼 이곳을 지키는 것은 NPC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이트메어의 산하 길드인 ‘윈드시어’의 길드원 수십 명이 에일을 지나치며 우르르 말을 타고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말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드원들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지만, 에일은 그들이 타고 있는 탄탄한 군마들에 시선이 갔다.
말은 마차보다 조금 더 유연하고 빠른 이동이 가능하다 보니 아무래도 길드 단위로 운용하기 좋은 수단이었다.
하지만 길드에 들지 않은 개인이 타고 다니기엔 관리가 힘들었다.
먹이를 주거나 관리해 주는 데 드는 유지비는 둘째 치고, 워로드에서 순진하게 사냥터 앞 나무 같은 곳에 적당히 고삐를 걸어 두었다간 십중팔구 도둑맞기 십상이었다.
즉, 이동할 때마다 마을이나 도시에 들러 말을 맡기거나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런 제약이 반가울 리 없었다.
타악!
에일이 마차 아래로 내려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역 방어를 위해 만들어진 구조물이라지만 높다란 성벽 너머엔 웬만한 큰 마을과 다를 것 없이 충분한 여러 시설들이 놓여 있었다.
오가는 유저들이 워낙 많다 보니 길드 입장에서는 어지간한 마을이나 성채 이상으로 높은 수익이 나는 곳이었다.
‘어디 유저들이 모여 있을 만한 곳이… 찾았다.’
에일이 한쪽 자리에 마련되어 있는 광장으로 향했다.
많은 유저들이 모여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띄고 있었는데, 그중 대부분이 함께 사냥을 나갈 동료를 구하고 있었다.
“왕가의 인장팟 마지막 한 분 모십니다! 30레벨 이하 분들만 모셔요!”
“혹시 힐러분들 안 계십니까?”
왕가의 인장을 얻을 수 있는 장소인 칼링 숲이 칼페아 관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고, 그를 노리는 많은 사람들이 파티를 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칼링 숲은 50레벨 몬스터가 등장하는 곳이니 27레벨인 에일도 인장을 얻는 조건에 만족했다.
무엇보다 동 레벨 대 몬스터 중에선 그나마 약한 편이라 인장을 목적으로 하는 파티에서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워로드가 늘 그렇듯이 좋은 보상을 얻을 수 있으면서도 마냥 쉽기 만한 사냥터는 없었다.
비교적 약하다 해도 다수의 몬스터가 뭉쳐 다니는 게 문제였다.
아무리 에일이라 해도 혼자서 사냥하기엔 당연히 무리였고, 파티를 구해 간다고 하더라도 마냥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디가 좋을까.’
사람들을 쭉 훑어보던 에일은 장비가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파티에게 다가갔다.
아직 모인 인원이 두 명뿐인 파티였다.
“혹시 인장팟 자리 남았나요?”
“아! 네, 레벨하고 직업이 어떻게 되시죠?”
잠시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단람이 에일을 반기며 물었다.
“27에 검사입니다.”
에일이 검을 슬쩍 들어 올리며 답했다.
그러자 단람은 딱 좋다며 곧바로 그에게 파티 초대를 보내왔다.
얼핏 보기에도 장비가 뛰어나 보였고, 어리버리를 탈 만한 인상도 아니었기에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원래는 서로 상태창을 열람하며 확인하는 게 정석이었지만, 이번은 딱히 스펙 확인이나 심사도 없이 널널하게 넘어갔다.
아직은 신경 쓸 부분이 많지 않은 초반 레벨 대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저는 단람, 28레벨 백기사고요. 이쪽 분은 29레벨 드루이드 퓨리온 님입니다.”
“아, 반갑습니다.”
에일은 그들과 손을 맞잡으며 간단한 소개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각자 적당한 소규모 길드에 들어가 있었고, 에일이 자신에게만 보이는 개인 화면을 이용해 슬쩍 찾아본 결과, 둘 모두 범죄에 연루되어 있다거나 평판이 안 좋은 곳은 아니었다.
갑자기 뒤통수를 친다던가하는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드루 님은 격투 쪽인가요?”
“아뇨, 저는 마법 올인이요. 제가 원거리 딜러 포지션으로 갑니다.”
특수 직업인 드루이드는 스킬에 따라 다양한 테크를 타며 컨셉을 정할 수 있었는데, 퓨리온은 철저히 자연 마법 위주로 투자를 한 모양이었다.
“이제 한 분만 더 오시면 되는데…….”
“그냥 이렇게 세 명이서 가죠?”
“으음… 이렇게만 가도 될까요?”
퓨리온의 제안에 파티장을 맡은 단람은 잠시 머뭇거렸다.
원래대로라면 이 조합에 서포터 클래스를 한 명 정도 끼는 게 정석이었다.
“근접 딜러님 장비도 좋아 보이는데 가능하지 않을까요? 거기다 탱커님 직업도 백기사잖아요. 저도 보조 힐은 있고, 포션 값 생각보다 많이 안 깨질 것 같은데요.”
기사 계열의 직업인 백기사는 워로드의 대표적인 퓨어 탱커였다.
전용 스킬의 대부분이 방어 쪽에 특화되어 있는 데다가 자가 회복기까지 보조적으로 지니고 있어서, 같은 파티에 있을 경우 든든하게 전방을 책임져 주고, 상대할 경우 토 나올 정도로 죽지 않는 좀비 클래스로서 악명을 떨쳤다.
물론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방어력이 높은 대신 공격력 자체는 굉장히 낮아, 파티가 아닌 개인 사냥엔 심각한 문제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뛰어난 성능과 많은 수요 덕에 인기 있는 직업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드루이드도 보조 회복기 정도는 지니고 있으니, 그를 믿고 힐러 없이 사냥을 해 보자는 말이었다.
‘보통 죽기 딱 좋은 소리지만… 내가 있으니 별 상관은 없겠지.’
심판관, 백기사, 드루이드.
즉석에서 대충 짜인 파티임에도 밸런스는 제법 훌륭한 편이었다.
20레벨이나 차이 나는 어려운 사냥터로 향하는 것이긴 했지만, 아주 심각한 구멍만 없다면 참사는 벌어지지 않을 듯했다.
물론 생판 모르는 유저들과 호흡을 맞추는 것인 만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주의해야 한다는 건 잊지 않았다.
“그럼 다들 출발합시다.”
* * *
키에에엑!
요란한 울음소리와 함께 네발 달린 괴물이 달려들었다.
사냥터로 향하던 에일과 파티원들은 숲의 입구에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구울 하나를 마주칠 수 있었고, 녀석은 일행을 보자마자 매섭게 달려들었다.
구울은 가장 앞에 선 단람의 방패를 마구 긁어 대며 쩍 벌린 입으로 머리를 노렸다.
“으욱! 이거 완전 장난이 아니잖아!”
기교 없이 마구잡이로 날뛰고 있음에도 워낙 놈의 힘이 좋아 단람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도 그럴게 상대는 무려 50레벨의 몬스터였다.
아무리 중갑을 두르고 방어력에 많은 투자를 한 기사 클래스라고 해도, 20레벨 이상의 차이를 정면으로 받으면서 오래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에일은 그런 상황을 가만히 방치해 두지 않았다.
푸욱!
에일은 순식간에 뒤를 돌아 괴물의 등에 장검을 꽂아 넣었고, 구울은 거의 튕겨서 나가듯이 단람에게서 떨어지며 거리를 벌렸다.
뒤에서 정통으로 등을 관통한 일격이었지만 역시나 한 방 정도로는 많은 데미지를 주지 못했다.
언데드 몬스터인 구울이 딱히 내구성이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레벨 차이로 인한 기본 스펙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타악!
땅바닥을 가볍게 박찬 구울은 붕 떠올라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조금 전과는 달리 이번에 노리는 것은 자신을 찌른 에일이었다.
증오로 이글거리는 노골적인 눈빛 때문에 누가 봐도 알 수 있었고, 그를 본 단람은 방패를 치켜들고 사이에 끼어들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튕겨져 나간 구울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단람의 방패 치기 스킬로 인해 가볍게 스턴이 걸린 탓이었다.
많은 데미지를 주는 스킬은 아니었지만, 상태 이상 효과를 걸어 틈을 만드는 데는 충분했다.
콰과광!
한 줄기 눈부신 녹색 빛이 뻗어져 나와 구울과 지면을 강타했다.
뒤에서 주문을 캐스팅하고 있던 퓨리온의 자연계열 마법이었다.
단순히 활을 쏘거나 무기를 휘두르는 것에 비해, 전반적으로 준비 시간이 많이 필요한 공격 마법들은 그에 걸맞게 많은 데미지를 줄 수 있었다.
방금 시전된 드루이드의 공격 마법 또한 마찬가지.
거기에 뒤를 이어 에일의 장검이 구울의 가슴팍을 크게 베었다.
순식간에 큰 폭으로 데미지가 들어갔고 스턴이 풀린 구울은 서둘러 일어났지만, 파티는 그 기세를 이어 녀석을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메인 탱커인 단람이 앞에서 시선을 끌며 공격을 받아 내면, 2선에 선 에일이 틈을 파고들어 데미지를 넣었고, 그사이 캐스팅을 끝낸 퓨리온이 다음 마법으로 구울에게 마지막 일격을 꽂아 넣었다.
“나이스!”
“깔끔하네요.”
체력이 바닥난 구울이 완전히 나가떨어지자, 파티원들이 화기애애하게 모여들었다.
약한 축에 속한다고는 하나 무려 50레벨의 몬스터를 별다른 피해 없이 잡아낸 것에 만족했는지 다들 뿌듯한 얼굴들이었다.
에일의 기준에서도 나쁘지 않았다.
처음 가졌던 우려와는 달리, 파티원들 모두가 크게 뒤떨어지지 않고 기본은 하는 것으로 보였다.
본격적으로 사냥터에 들어가기 전에 혼자 떨어져 있는 구울을 마주한 덕에 좋은 연습 거리가 되었다.
“엇…….”
그때 갑자기 퓨리온이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단람이 무슨 일인지 물어봤지만, 그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시선이 한곳에 꽂혀 있었다.
“어… 어? 어디 가세요!”
수풀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퓨리온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말도 없이 달려간 그를 따라 에일과 단람이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자, 그곳에서는 뜻밖의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건……?”
바닥에 검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변사체.
죽어 있는 노루의 시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