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시체굴 (1)
‘후, 사람 한번 많네.’
에일이 주위를 둘러보며 조그맣게 감탄했다.
도시나 마을에서나 보던 인파가 사냥터 한가운데에 몰려 있었다.
인기가 없는 비주류 사냥터만 다니던 에일에게는 이렇게 사람이 많은 사냥터는 처음이었다.
퀸즈 블론드 근방에 위치해 있었던 고블린 소굴에서도 이만한 유저 수는 던전 입구에 파티를 짜기 위해 모여 있던 게 전부였다.
“받아라!”
“캬아아악!”
“쿠에에엑!”
몬스터가 플레이어들에게 죽어 나가고 있는 학살의 현장.
누가 주류 사냥터가 아니랄까 봐 유저들끼리 경쟁까지 붙은 채 사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얕은 강을 끼고 있는 습지대인 이곳은 물고기 같은 생김새의 땅딸막한 몬스터 수인, 머맨들이 집단 서식하는 구역이자 굉장히 인기 있는 사냥터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곳은 정보 수집에 익숙한 추격자들에게 발각되기 딱 좋은 장소였지만, 에일은 그것을 감수하고 찾아왔다.
“어디 보자…….”
“캬아아!”
에일이 무언가를 찾기 위해 시선을 돌릴 무렵, 위장한 채 숨어 있던 몬스터가 바닥에서 불쑥하고 나타났다.
조잡한 창을 든 머맨이 풀쩍 뛰어올라 에일의 목을 노렸다.
콰악!
하지만 옆에서 날아온 화살이 녀석의 목을 꿰뚫었고, 머맨은 한참 뒤로 나가떨어졌다.
한 방에 즉사하지는 않은 지라 바닥에서 꿈지럭거리며 겨우 일어났는데, 그 순간 양쪽에서 날아든 검과 도끼가 기껏 일어난 머맨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으…….”
경쟁이 치열하니 만큼, 몬스터들은 이렇게 나타나는 족족 쓰러져 나갔다.
심지어 방금 합공을 가한 이들은 같은 파티의 구성원도 아니었고, 그저 눈에 보이는 머맨들은 일단 공격하고 보는 것이었다.
같은 파티원들끼리 나눠 갖는 것만은 못하지만, 어차피 기여도에 따라 경험치 보상이 분배되었으니 상관없었다.
다만 문제는 죽은 머맨이 떨어트린 아이템들의 루팅 권한.
“저기! 그쪽 두 분 다 비키세요. 제가 먼저 맞춘 거니까.”
“마지막 공격을 제가 한 건데 무슨 헛소리에요?”
“뭐? 너 뭐라고 했어! 헛소리?”
“자자, 얼마 되지도 않는 거 괜히 싸우지 말고 그냥 삼등분합시다. 예?”
머맨의 시체 앞에 세 유저가 모여 말다툼을 시작했고, 에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를 떴다.
‘정말 정신이 없네.’
에일이 해야 할 일은 이 틈바구니 속에 끼어 사냥을 하는 게 아니었다.
일단은 적당히 사람 없는 자리를 찾아야 했다.
이런 사냥터 주변에서 사람이 없을 자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에일은 이곳에 오기 전에 미리 쓸 만한 위치를 몇 곳 봐 뒀던지라 헤매지 않고 곧바로 자리를 찾아갈 수 있었다.
“여긴가…….”
에일이 커다란 바위 사이에 뚫려 있는 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비스듬히 아래로 연결돼 있는 통로 주변엔 그 많던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그럼에도 에일은 주저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 공터까지도 휴식을 취하는 유저들로 가득한 사냥터 안에서 사람들이 찾지 않는 데는 모두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찬 이곳의 이름은 머맨의 시체굴.
끔찍한 생김새의 시체들로 가득한 지하 던전으로, 죽어 버린 머맨들의 시체가 향하는 묘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다만 일반적인 묘지와 다른 점은 시체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
“크르르륵……!”
안쪽에서 낮은 울음소리들이 들려 왔다.
벽에 기댄 채 모퉁이 너머로 고개를 돌리자, 군데군데 살점이 떨어져 나간 머맨들이 비틀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위쪽에 있는 머맨들과는 다르게, 놈들은 까다로운 독성 무기를 지니고 있는 데다가 끔찍한 외양으로 위축 디버프까지 걸어대는 통에 바글바글한 사냥터 상황에도 불구하고 유저들은 이곳을 찾지 않았다.
애초에 이렇게 험난한 던전을 목표로 할 것이었으면 다른 곳에도 널려 있었으니 굳이 이곳까지 올 필요도 없었다.
위쪽에서 사냥을 하면서 얻은 자신감에 지하 던전을 들르는 이들이 종종 있었지만, 얼마 안 가 학을 떼며 달아나곤 했다.
화르르륵!
하지만 에일은 주저 없이 장검을 뽑으며 성화를 발동시켰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시체 머맨들을 해치우며 돌파해 나갔다.
심리적 상태 이상을 모두 무효화하는 ‘광적인 순교자’ 패시브 덕에 위축 디버프를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데다가. 언데드와는 속성의 궁합도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매섭게 휘둘러지는 검과 성화가 시체 주제에 움직이고 있는 몬스터들을 다시 재로 만들어 주었다.
-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머맨의 문드러진 눈알(일반)×2]
[부러진 창날(하급)]
[58크론]
쓰러진 몬스터로부터 아이템을 루팅한 에일은 작게 혀를 찼다.
한 마리당 떨어뜨리는 보상 자체는 나쁜 편이 아니었지만, 그가 원하던 아이템은 나와 주지 않았다.
‘놈들이 오기 전에 최대한 빨리 얻어 놔야 해.’
초조함을 느낀 에일은 수시로 시간을 확인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몬스터들이 돌아다니지 않을 만한 골목이 보일 때마다 자리에 멈춰 서서 인벤토리를 열었다.
함정을 설치하기 위함이었다.
달칵!
에일이 손길이 닿자 함정은 어렵지 않게 설치되었다.
직접 손으로 설치한 것이 아니라 소모 아이템을 이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오래 걸리지도 않고 간편했다.
물론 비싼 가격은 단점이었다.
상점과 경매장에서 여태 모아 둔 돈을 뭉텅 써가며 긁어모은 함정 아이템들.
어차피 에일과 비슷한 레벨 대의 유저는 그들에게 아무리 칼질을 해 봐야 갑옷에 튕겨 나갈 뿐이고, 겉보기엔 요란한 마법을 떨어뜨려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는다.
하지만 레벨에 상관없이 먹혀드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워로드의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물론 레벨이 높을수록 체력 스탯이 많으니 당연히 생존에 유리한 것은 똑같았지만, 낙석이 머리 위에 떨어지거나 높은 곳에서 추락을 하는 경우 레벨에 상관없이 치명적이었다.
레벨이 현저히 낮은 쪽에서 발악하는 경우, 그나마 먹히는 방법은 이쪽일 가능성이 높았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서 이런 함정을 설치하고 다니다간 주변 유저들에게 미친놈 소리를 들으며 집단 PK를 당할 확률이 매우 높았지만, 어차피 다른 유저가 안으로 들어올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만약 이 함정들이 작동한다면 추적자들을 목표로 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것만으로 놈들을 모두 잡아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하지만… 조금이라도 확률을 높여야 하니까.’
솔직히 말해 이번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여러모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중점인 계획이었고, 전적으로 실력과 운이 따라 줘야 했다.
추적자들도 감당하지 못할 고레벨 사냥터나 하얀 숲처럼 침범하면 죽는 지역으로 유인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상대는 그런 것에 속아 넘어갈 만큼 어수룩하지 않았다.
평범한 유저들 사이에서는 70레벨만 넘어도 상위권의 실력을 가진 편이었고, 일반적으로 100레벨만 넘기면 전업 플레이어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고수 정도의 위치였다.
아마란스의 길드원이라면 140레벨 근처의 베테랑들로 구성되어 있을 터.
심지어 그들은 지난 1년 동안 철저히 PVP 위주로 활동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었을 것이기에 결코 만만히 볼 수 없었다.
콰악!
또 다른 몬스터를 처치한 에일은 시체에서 아이템을 뒤졌다.
능숙하고 재빠른 손놀림이었지만, 한편으론 급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빨리 좀 나와라… 녀석들이 오기 전에!’
* * *
“여기군.”
아마란스의 길드원들이 머맨의 시체굴로 통하는 입구 앞에 섰다.
그러자 시체굴 옆에서 잠시 땀을 식히며 쉬고 있던 한 전사는 그들의 등장에 놀랐는지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엄청난 스펙의 유저들이 이런 저레벨 구간에 나타났으니 저런 시선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다소 짜증스러운 얼굴의 루카스가 슬쩍 그에게 시선을 주자 놀란 전사는 화들짝 놀라 멀리 달아났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목을 따 버리는 건데.”
“허튼소리 하지 마라.”
조장, 툴론이 그에게 딱딱한 말투로 경고하며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루카스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고, 곧 입구의 앞에 섰던 세 명의 조원들은 굴 내부로 진입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느긋하게 사냥 중이라니, 생각이 없거나 꿍꿍이가 있거나 둘 중 하나겠군.”
“우리가 아예 사전 조사를 안 하고 온 것도 아니고 꿍꿍이가 있으면 뭐합니까? 아직 30레벨도 안된 초짜 하나가.”
툴론의 말에 루카스가 반응했다.
처음엔 암살 대상이 되어 겨우 도망갔으면서 이런 북적이는 사냥터에 들어선 에일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해 자신들을 유인하려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정보를 입수하고 이곳으로 이동하면서, 혹시나 사냥터에 수상한 점들이 있는지 사전에 조사해 봤다.
하지만 그들에게 위험할 만한 건 존재하지 않았다.
몬스터들은 아무리 많아 봤자 잔챙이들뿐이고, 도망자가 뭔가 매력을 느끼고 크게 노려 볼 만한 요소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시에서 우릴 먼저 눈치 채고 달아났던 걸 생각하면 마냥 방심하기는 일러.”
“글쎄, 그건 아무리 봐도 운이었다니까요.”
“아직은 모르는 일이지.”
툴론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짧게 답했다.
하지만 그 역시 사실은 에일이 이곳으로 향한 게 별다른 의도가 있을 거라 보지는 않았다.
상대는 고작 20레벨 대의 초보 유저.
워로드 이전의 가상현실게임에서도 별다른 기록이 없는 걸 보아, 눈에 띄는 실력자일 가능성은 적었다.
도시에서의 일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조금 더 자연스러웠다.
터억!
굴을 걷고 있던 세 명의 유저가 동시에 멈춰 섰다.
그들의 앞에 첫 번째 갈림길이 나왔다.
단조로운 일직선 형태가 아니라 던전 중에서도 상당히 복잡한 구조를 지닌 편인 시체굴이었다.
“한 명은 입구를 지킨다.”
“알겠습니다.”
툴론이 시선을 주며 말하자 아마란스의 길드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 뒤로 물러섰고, 그 자리에 서서 등 뒤에 매고 있던 무기를 들었다.
그들이 굴 내부로 들어가 찾고 있는 사이, 표적이 은근 슬쩍 빠져나와 던전 밖으로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밖으로 통하는 출구는 이곳 하나뿐이었기에 이 길목만 지키고 있다면 최소한 놓칠 일은 없었다.
“이번엔 안 놓친다…….”
먹잇감을 앞둔 루카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