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아마란스 (2)
스탯을 올리기 위해 한참을 언데드 몬스터와 부대끼고 다니던 에일은 사냥을 끝마치고서 다시 도시로 향했다.
도시의 관리에게서 정예 몬스터 다섯 마리를 처치해 달라는 퀘스트를 받아 뒀었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서였다.
사냥터로부터 멀지 않은 곳이라 금방 다다를 수 있었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NPC에게 몬스터를 처리한 증거를 가져가자, 적당한 사례금과 함께 에일의 레벨이 26으로 올랐다.
‘아직 레벨 한도는 넉넉하고, 계속 사냥해도 되겠는데?’
이단을 처단해 스탯을 얻는 것은 자신의 레벨을 기준으로 일정 레벨 이하의 몬스터나 플레이어에게만 적용된다.
계속 저레벨 몬스터만 반복적으로 사냥해 스탯을 비정상적으로 쉽게 쌓는 악용을 막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에일이 진득하게 눌러앉아 사냥하던 언데드 몬스터의 레벨은 24로 신앙심과 광기 스탯을 쌓는 데는 아직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지금까지 늘어난 마나량도 전과 비교해서는 꽤나 진척된 상황.
모든 스탯을 골고루 올려주는 광기 스탯이었으니 조금 올렸다고 엄청난 효과를 보여 주지는 못했지만, 유의미한 변화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충분히 만족한 에일이 계속해서 사냥을 이어나가기 위해 출발하려 할 때, 시스템 메시지 하나가 번쩍 떠올랐다.
[새로운 우편이 도착하였습니다!]
‘알리사 님이 벌써 보내주신 건가?’
마침 딱 도시에 들렀을 때 우편이 도착했고, 에일은 그를 확인하기 위해 우편함으로 향했다.
* * *
카강!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도시 중심부의 한 옥상에서 검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저 못지않게 강력한 경비병들이 존재하는 워로드의 도시에서 싸움은 일반적으로 없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건 아니었다.
경비병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다른 플레이어를 상대로 기습을 하더라도 현상금이 걸릴 일이 없는 데다가, 거리 한복판에서도 합법적인 대련이나 결투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채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남자가 쥐고 있던 검이 뒤로 날아갔다.
균형을 잃은 남자는 뒤로 벌러덩 쓰러졌고, 승부가 나자 상대는 검을 거두며 쓰러진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아오… 또 이런다.”
남자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번 대련의 상대였던 자신의 친구를 향한 불만은 결코 아니었다.
“왜? 설마 또 멈칫했어?”
“그래, 중간에 무기 좀 바꾸려고 인벤토리를 열었더니 순간 팔에 힘이 안 들어갔어.”
“참나, 무기를 싸우다가 왜 바꿔? 랭커들도 웬만하면 안하는 짓인데 하여간 겉멋만 들어가지고는…….”
“아니, 시끄럽고. 무기만 그런 게 아니라 문제인거지. 이래 가지고 레이드 중에 포션은 어떻게 꺼내 마시냐.”
남자가 분통이 터진다는 듯 말했다.
그는 선천적으로 동조율이 낮아서 게임 속에서 세밀한 조작을 할 때마다 버벅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단순히 격하게 몸을 움직이는 데는 아무 지장 없지만, 그와 동시에 인터페이스 창을 조작해 장비를 바꾸거나 포션을 꺼내려고만 하면 몸이 꼬였다.
물론 그가 느끼지 못할 뿐 움직임과 반응 속도에서도 동조율에 따라 은근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평범한 유저들이 플레이를 하며 차이를 느낄 수 있을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아, 술값 내기였는데… 이게 게임이냐?”
“그러고 보니 너 동조율이 몇 퍼센트라고 했었지?
“19퍼센트…….”
남자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평균이 43퍼센트인데, 진짜 낮긴 하다. 워로드 만든 사람들한테 감사하게 생각해라. 예전이었으면 무조건 부적합 대상으로 떠서 넌 게임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걸.”
“그… 그렇긴 하지. 엇?”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사람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전체적으로 거무튀튀한 복장에 복면으로 입가를 가린 남자.
사과라도 건넬 줄 알았지만 그는 퀭한 눈으로 잠시 바라보더니, 오히려 다른 곳으로 가라며 훠이훠이 손짓했다.
“이게 미쳤나……!”
“잠깐, 그만둬!”
상대의 정체를 알아본 친구가 급하게 그의 어깨를 잡아끌며 막았다.
그러자 어깨를 뿌리치며 다가가려던 남자도 상대의 모습을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자줏빛 꽃이 그려져 있는 원형의 문장.
아마란스의 길드 문장이 그의 갑옷 견갑 부근에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따지려 들던 남자는 깜짝 놀라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워로드 전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그들의 이름은 모르는 이가 더 적었고, 나름 끈끈한 중소 길드에 들어 있는 남자조차 입을 절로 다물게 만들었다.
“갑자기 에스마이어로 발령난 것도 짜증나는데, 시작부터 별것들이 다 난리네.”
그들이 허둥지둥 옥상에서 내려가 모습을 감추자, 아마란스의 루카스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는 금세 진지해진 눈빛으로 주변을 슥 훑었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는 옥상 자리를 굳이 찾아온 이유가 저 아래에 있었다.
‘찾았다.’
건물 아래로 보이는 한 유저의 모습.
이번 청부의 목표인 에일이 우편함 앞에서 편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불과 20레벨 근처의 유저인지라, 137레벨인 루카스의 입장에서는 그저 맨손으로도 목을 슥삭 하면 끝나는 상대였다.
하지만 루카스는 섣불리 먼저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그저 그의 사진을 멀찍이서 찍어 본인이 속한 조의 조장, 툴론에게 전송했다.
굳이 사진까지 찍어서 보내는 이유는 타깃의 얼굴 확인 절차를 위해서였다.
온갖 곳을 들쑤시고 다녀야 하는 청부업의 특성상 잘못 엮이면 큰일이 나는 만큼, 이런 부분에서만큼은 확실히 해야 했다.
실수로 대형 길드와 연줄이 있는 자를 죽였다간 개인 책임 선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띠링!
루카스가 보낸 사진에 대해 신호가 돌아왔다.
결과는 1차적으로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이번 일을 맡긴 의뢰인에게 당사자가 확실하다는 의사를 전달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타깃을 제거하려 나설 때가 아니었다.
“조장, 확실해 보이는데요.”
- 확실이라는 말을 아무데서나 쓰지 마라, 신참. 다른 곳에서 어땠을지 몰라도, 아마란스에 들어온 이상 무슨 일이든 정확히 처리해야 하니까.
“예, 예.”
아니나 다를까 툴론에게서 심히 단호한 대답이 돌아오자, 루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깐깐하기는…….”
이미 자체 정보망과 주변 NPC들을 이용한 뒷조사를 토대로 자세한 분석을 끝내고 찾아온 것임에도, 방금 얻은 표적의 얼굴까지 이용해 추가 확인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혹시 연관된 길드나 인맥은 없는지 한 번 더 알아내는 것이 목적.
개발사를 아예 해킹하지 않는 이상 모든 것을 오차 없이 알아낼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꼼꼼히 확인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대강 주변에서 목표를 찾아다니다가, 마주치면 죽이고 돈을 챙기는 대부분의 청부 길드와는 확실히 달랐다.
하지만 고작 20레벨짜리를 하나 잡는 데도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은 그의 체질엔 영 안 맞았다.
‘뭐… 그래도 페이는 두둑이 들어오니까.’
그럼에도 경쟁까지 뚫어가며 아마란스에 들어온 이유.
리스크가 있기는 해도, 들어오는 돈은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한 건당 개인이 현물로 최소 몇 십씩은 챙길 수 있으니, 위험 감수를 한다 쳐도 당장 이만한 게 없었다.
더군다나 이번 일은 어지간한 금수저가 요청했는지 파격적인 옵션을 달고 있어서, 훨씬 많은 금액을 받아 챙길 수 있었다.
“저 녀석도 불쌍하지. 하필 미친놈을 건드려서 접을 때까지 완전 척살이라니.”
루카스가 에일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여전히 태평한 얼굴인 타깃은 자신이 양쪽에서 주시받고 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이마에 화살 한 대 꽂아 주고 싶었지만, 이곳 도시에 주둔 중인 경비병이 문제였다.
하필 6대 길드 간의 접경 지역 쪽에 도시가 위치한지라, 나이트메어의 정예 NPC들이 무장한 채 거리를 돌아다니는 중이었고 쓸데없는 소란은 자제하는 편이 좋았다.
아래에서 접근 중인 조장이 목표에게 다가가 단숨에 제압할 때까지 확실히 지켜보고 있으라는 지시를 들었을 뿐이니 일단은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슥슥.
아예 난간에 걸터앉은 루카스는 여전히 아래를 내려다보며 따분한 손길로 활을 손질했다.
이미 짜인 계획상, 어차피 본인이 직접 나설 일은 없겠지만 지루함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난간에 앉은 행동에 대해선 초짜들은 너무 대놓고 있는 게 아닌가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어쭙잖게 몸을 숨기고 있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어차피 광장에 몰려 있는 이 많은 인파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높은 건물 위에 올라있는 사람 하나를 인식하기란 불가능했고, 우연히 본다 한들 자신에게 시선이 꽂혀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마란스에 경력직으로 들어오기 전, 다른 길드의 소속으로 수많은 의뢰들을 맡아 봤지만 여태껏 그런 경우는 본 적 없었다.
“흠?”
우편함 앞에 서 있던 타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보아 눈치 챈 건 아닌 것 같았고, 향하는 방향을 보아 경매장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 확인은 끝났다. 내가 가지.
저 아래 인파 속에 섞여 있었던 툴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추가 조회에서도 목표의 소재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잔소리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긴 했지만 조장의 실력은 확실했고, 이제 저 순진한 얼굴은 48시간 뒤에나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죽음을 반복하겠지.
그렇게 루카스를 비롯한 아마란스의 길드원들이 무의식적으로 방심하고 있던 순간.
타다닥!
갑자기 에일이 인파를 헤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무슨……!”
당황한 루카스가 난간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당황과는 별개로 본능적으로 손이 반응했고, 인파속을 헤치는 에일을 향해 순식간에 활시위를 당겼다.
피융!
‘이런!’
루카스의 화살이 빠르게 날아갔지만 이미 전력질주를 하며 골목을 돌던 에일의 상체 쪽은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그의 발목에 겨우 꽂혔을 뿐, 숨통을 끊었을 만한 일격은 확실히 아니었다.
급히 스킬까지 활용해 가며 건물 아래로 뛰어 내려온 루카스는 에일을 뒤쫓기 위해 잽싸게 달렸다.
그리고 그가 모습을 감췄던 방향의 골목을 따라가, 똑같이 방향을 틀었다.
“…….”
하지만 길거리에 접어들고 에일이 모습이 온데간데없음은 물론, 에일이 향했을 흔적조차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 흔한 핏자국조차 하나 남기지 않고서 감쪽같이 사라진 상황.
“이런 미친! 이 자식 어디 갔어?”
루카스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사라진 에일을 찾았지만, 느긋하게 현장 조사를 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다른 플레이어에게 선공을 취했기 때문에, 어느새 사방에서 도시의 경비병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것도 일반 경비보다 레벨이 훨씬 높은 검은 갑옷의 정예병들이.
- 거기서 빠져나와! 일단 도시 밖으로 물러난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