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아마란스 (1)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짐을 가득 실은 수송 마차들이 하얀 숲에 무사히 도착하자, 퀘스트가 완료되며 에일에게 많은 양의 경험치가 들어왔다.
동굴에서 에일과 싸운 플레이어가 물러난 이후, 이번에는 수송 행렬에 습격자가 나타나지 않았고 별다른 일 없이 퀘스트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원래 경험치가 어느 정도 차 있기는 했지만, 설마 한 번에 레벨이 두 개나 올라갈 줄이야…….’
아마 처음에 받았던 의뢰의 내용과 달리, 고대 정령과 연관된 커다란 퀘스트로 확장된 덕일 터였다.
예상했던 것 이상의 보상에 은근히 놀라고 있을 무렵, 마차 옆에 서 있던 에일에게 순찰대장 알룬드가 다가왔다.
“로툼족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우릴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지.”
알룬드가 가슴 위에 가볍게 손을 얹은 채 고개를 살짝 숙이는 엘프 특유의 인사를 에일에게 건넸다.
단순히 수송 호위만으로 이런 대우를 인간에게 해 줄 리는 없었지만, 고대 정령은 하이 엘프들에게도 중요한 존재였고, 그에 걸맞은 예우를 보여 준 것이다.
그 외 실제 보상으로도 하얀 숲을 드나들어도 좋다는 허락을 맡았고, 마을의 출입권까지 한 방에 얻어 냈다.
처음 의뢰를 받아들였을 때 생각했던 것에 비하면 훨씬 급진적인 관계 진척이었다.
“다른 일이 있으면 연락하지.”
알룬드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고, 그와 동시에 에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꽤나 유의미한 말이었다.
새로운 일이 생기면 퀘스트를 맡길 수 있다는 추론은 당연했고, 이번 사건과 연결된 연계 퀘스트를 이어받을 수 있는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었다.
“에일!”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페렌이 다가오며 손을 흔들었다.
로툼족치고 바깥 경험이 많은 편에 속하는 그는 이번에도 수송에 합류해 에일과 함께했고, 하이 엘프들과 진지한 이야기까지 나누는 모습을 보여 줬다.
“어때, 정령석 양도는 다 끝났어?”
“그럼! 방해꾼도 에일이 쫓아내줬으니 문제될 것 없어. 그런데 에일은 이제 다시 떠나는 거야?”
“그래야지. 계속 마을에 남아 있을 수는 없으니까.”
에일의 말에 페렌은 언제 웃고 있었냐는 듯이 울적한 표정이 되었다.
“나중에 우리 생각나면 꼭 다시 들러 줘!”
“물론이지.”
에일은 다리를 꽉 끌어안으며 매달리는 페렌을 슥슥 쓰다듬어 주고는 다른 로툼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보냈다.
로툼족들은 다시 출발할 준비가 끝나 있었고, 이제 정령의 숲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잠시 손을 흔들어 주던 에일은 숲의 중심부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이 엘프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인간이 섣불리 발을 들였다간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어 버리겠지만, 마을 통행을 허락받은 시점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아직 일반 주민들에게 퀘스트를 받기는 무리더라도, 아이템 구매 정도는 가능할 테니까…….’
하얀 숲에는 품질 좋기로 유명한 상위 장비와 포션들이 많이 있었지만, 당장 그것보단 이곳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별한 재료 아이템들을 한가득 구매해 둘 생각이었다.
정령의 숲에서 로툼족들에게 구할 수 있던 것과는 또 다른 물건들이었기 때문에, 그때 얻었던 재료들과는 별개로 미리 사두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생활 컨텐츠 숙련도가 0에 가까운 에일이 그 재료들로 무언가를 하지는 못할 것이고, 대부분은 알리사에게 보내줄 것들이었다.
특히 하얀 숲에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그녀가 꼭 좀 보내달라고 부탁했던 재료들도 몇 가지 있었다.
엘프들과의 관계, 특히 하얀 숲의 하이 엘프와는 쉽게 교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생활 컨텐츠를 활용하는 유저들에게는 욕심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아마 이번 재료들까지 보내고 나면 당분간 포션 걱정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 에일은 발걸음을 옮기며 지도를 펼쳤다.
“그러면 다음 사냥터는 어디가 좋을까…….”
* * *
서걱!
매서운 기세로 달려들던 언데드 몬스터 네 마리가 빠른 속도의 검격에 베여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지만 반으로 나뉜 그 시체조차 멀쩡하진 못했다.
섬광과도 같았던 검격이 베고 지나간 그 자리를 백색 화염이 또다시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불길이 지나간 자리엔 시체 타는 냄새만이 진동했다.
에일은 장검을 땅에 꽂아 넣은 뒤, 살짝 기대어 섰다.
‘역시 화력은 굉장하다니까.’
새롭게 배운 전용 스킬, 일섬.
정령의 숲에서 사냥을 하면서도 여러 차례 써보긴 했지만, 영웅급 스킬 아니랄까 봐 만족스러운 성능이었다.
저번 PVP에서도 굉장한 활약을 보인 일섬의 위력과 효용성은 확실히 확인했고, 당분간 한 방 결정력이 있는 공격기 걱정은 접어 두어도 될 듯했다.
‘마나 문제만 어떻게 해결이 된다면 말이지…….’
에일은 푸른색 액체가 찰랑이는 마나 포션을 들이켰다.
익숙한 스포츠 음료 같은 맛… 이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고, 방금 사용한 스킬 한 방에 마나량이 거의 바닥을 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래서는 조금 더 급박한 환경의 실전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웠다.
정령의 숲에서 검은 후드의 남자와 싸웠을 때만 해도 알 수 있었지만, 느긋하게 포션을 마실 틈이 언제나 있는 건 아니었다.
‘마력에 1포인트도 투자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사실 마나량 부족해 허덕일 때는 아무리 다른 직업군이라 하더라도 마력에 일정량 스탯 포인트를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에일은 효율의 극대화를 위해 마력 스탯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를 대신해 공격력이나 속도 같은 직접적인 수치는 물론, 마나량까지도 일정량 올려주는 여섯 번째 스탯인 ‘광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들과는 다르게 시작부터 추가 스탯을 가진 에일은 마력에 투자하지 않고도 광기 스탯을 충분히 쌓기만 한다면, 마나량을 제외하고는 불필요한 마력 스탯을 배제하고서 다른 스탯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메리트를 가질 수 있었다.
일단 지금으로서는 마나량을 올리기 위해 광기 스탯을 최대한 빨리 쌓는 게 장기적으로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
‘그리고 광기 스탯을 쌓으려면 필요한 건 보스 몬스터나 플레이어, 혹은…….’
“나타났다!”
뭔가를 발견한 에일이 꽂아 뒀던 검을 뽑고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순간 왼쪽에서 스치듯 지나간 괴물의 그림자.
놈을 추적해 뒤쫓아 가자, 지금껏 나왔던 다른 대부분의 녀석들보다 더욱 커다란 덩치의 언데드 몬스터가 있었다.
“그어어어!”
“오케이.”
에일이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검을 치켜세웠다.
그리고는 스킬 ‘이단 지정’을 발동시켰고, 붉은 표식이 괴물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파칭!
스탯을 올려줄 소중한 먹잇감, 정예 몬스터였다.
아무래도 기복 없이 안정적으로 스탯 노가다를 하려면, 한 번 잡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보스 몬스터나 리스크가 큰 플레이어보단 보상이나 난이도 모두 적당한 편인 정예 몬스터를 잡는 편이 제일이다.
물론 대부분의 정예 몬스터들은 일반 몬스터들이 등장하는 사냥터 사이에 섞여 희귀종마냥 드물게 등장하는 녀석들이 대부분이라 운이 많이 필요한 게 문제였다.
하지만 에일이 하얀 숲에서 빠져나온 뒤 다음 목적지로 이곳을 고른 이유도 다름이 아니라 정예 몬스터가 자주 등장하는 사냥터이기 때문이었다.
쿵!
언데드 몬스터의 비대한 팔이 바닥을 내려쳤다.
하지만 그 자리에 서 있던 에일은 어느새 녀석의 뒤편으로 이동한 뒤였고, 단숨에 몬스터를 베어 갈랐다.
화르륵!
괴물의 등 뒤에 기다란 상처가 생겨났고, 하얀 불꽃이 화상을 입히며 살점을 태웠다.
무게를 싣고 강하게 휘둘러진 장검과 불길로 인한 화상에 반대 속성으로 인한 데미지가 추가로 들어가자 몬스터의 체력은 뭉텅 빠져나갔다.
“그아아아!”
그러자 이성을 잃은 괴물은 화가 난 듯 마구 날뛰었고, 움직임을 예측하기 힘들어졌다.
휘익!
하지만 에일은 난동을 피우는 녀석의 움직임을 모두 눈으로 보면서 피했고, 틈이 생길 때마다 역으로 약점을 찔러가며 체력을 깎아냈다.
처음엔 은근히 까다롭게 느껴지던 녀석의 패턴도 이젠 익숙해진 터라 어렵게 생각되지 않았다.
대비 없이는 잡기 어려운 높은 스펙을 가졌으면서 미리 준비가 안 된 상황에 항상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은 정예 몬스터의 특성상, 주변의 일반 유저들에겐 평화로운 사냥을 방해하는 장애물이자 재수 없이 마주치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 요소 취급을 받았지만, 처음부터 녀석들을 노리던 에일에게는 쉽디 쉬운 상대일 뿐이었다.
촤아악!
순식간에 휘둘러진 에일의 검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던 괴물의 두 다리가 단숨에 절단되었다.
전에 사용했던 것과 같은 일섬 스킬이었지만, 성화를 곁들이지 않자 후폭풍처럼 화염이 적을 휩쓰는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쿠웅!
앞으로 엎어진 괴물이 바닥을 나뒹굴었고, 체력이 일정치 이상 줄어들자 꼼짝도 하지 못하는 빈사 상태에 빠졌다.
성화 스킬을 도중에 거둔 것도 일부러 체력과 데미지를 계산해서 놈의 숨통을 완전히 끝내지 않은 것이었다.
사냥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에일은 검을 내렸고, 마지막 작업을 위해 형벌 선고 스킬을 발동시켰다.
촤르르륵!
왼 손에 생겨난 두터운 책이 눈앞의 언데드에 대한 집행 방식을 물어왔다.
딱 보기에도 화형대에 묶기는 곤란한 덩치.
에일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형벌을 선고했고, 기울어졌던 무기를 다시 바로 쥐었다.
그리고는 쓰러져 있는 몬스터의 바로 옆에 서, 두 팔을 들어 장검을 높이 치켜 올렸다.
콰악!
솟구쳐 오른 핏줄기와 함께 괴물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형벌 선고’에 따라 지정된 형벌을 성공적으로 집행하였습니다. 스킬의 효과로 스탯 보너스가 두 배로 늘어납니다.]
[여신의 총애 +0.22% (현재 55.13%)]
[빛의 교단 공헌도 +70]
[신앙심 스탯 +2]
[광기 스탯 +2]
[참수형 집행으로 인해 심판관의 속도가 60분간 10% 증가합니다.]
[신앙심이 한층 더 깊어짐을 느낍니다.]
[신앙심 스탯 +0.1]
[광기 스탯 +0.1]
“엘리트 몹도 이야기로 들었던 것보다 더 잘 마주치는 거 같고, 어째 일이 막히는 거 없이 술술 풀리네…….”
에일이 뺨에 묻은 검은 피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여신의 총애 수치는 어느덧 55퍼센트를 초과했고, 광기 스탯도 30을 넘어섰다.
바닥을 드러냈었던 공헌도도 어느새 800이나 모였고, 거기다 마침 신앙심과 관련된 행동으로 인한 추가 보너스 스탯까지 들어왔다.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방방 뛰면서 기뻐하겠지만, 에일은 이상하게도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
어딘지 마음 한구석에 싸한 느낌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에일은 그동안 게임을 하면서 운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좋은 아이템을 얻는 것 같은 플레이 내적인 부분의 운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지고는 못 사는 성격 탓인지 가만히 지내고 싶어도 의도치 않게 온갖 사건들에 휘말리며 갈등을 빚고는 했는데, 이렇게 잘 풀리기만 하다니 꺼림칙한 기분이 들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
에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 스쳤다.
여태껏 다른 게임들을 하며 운이 없었던 것들을 생각해 본 결과,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지극히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워로드가 내 인생 게임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