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침묵과 함께 (9)
콰아아아!
한 줄기의 섬광처럼 뻗어져 나간 에일의 검격.
그 자체만으로도 강력한 일격이었지만, 성화의 백색 불꽃과 합쳐지자 엄청난 화염과 함께 날아가 전방을 휩쓸었다.
이단을 대상으로 한 데미지 증가, 단검으로 걸어 두었던 디버프까지 합쳐져 그야말로 절륜한 위력을 뽐냈다.
영웅급 스킬의 위력을 똑똑히 보여 준 스킬 ‘일섬.’
“…….”
스킬을 전면으로 받아 튕겨져 나갔던 남자는 겨우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겨우 죽음은 면한 모양이었지만, 깊게 베인 검상과 온몸에 강렬한 불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한껏 과열되었던 분위기 속에서 둘은 잠시 숨을 고르며 머리를 식혔다.
한 발자국 물러나기는 했지만, 서로 체력을 회복할 틈 따위는 주지 않을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포션을 꺼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역시, 마나 소모량이 엄청나다니까.’
진땀을 흘린 에일이 자신의 남은 마나량을 살폈다.
유지하는 데 아주 약간의 마나를 사용할 뿐인 ‘성화’를 제외하면 스킬 두 번을 사용한 것이 전부였음에도 마나가 거의 동나기 직전이었다.
전투 관련 능력치라면 뭐든지 증가시켜주는 광기 스탯으로 인해 늘어난 에일의 마나조차도 일섬 한 방에 대부분 사라졌다.
만약 일섬이 이단심판관의 전용 스킬이 아니라 역극과 같은 공용 스킬이었다면, 직업 스킬의 효율성을 올려주는 신앙심 스탯에 보정을 받지 않았을 것이고, 마나 소모량도 줄어들지 않아 한 번 사용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에일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상대를 응시했다.
그는 거의 온몸이 너덜너덜하다시피 엉망이 된 모습이었다.
방금의 일격으로 체력은 90퍼센트가 넘게 날아간 것으로 보였고, 장검에게 얕은 공격 한 번만 허용해도 그대로 사망이었다.
‘하지만 마냥 쉽게 볼 수만은 없어.’
상대를 몰아세운 에일이 성급하게 먼저 달려들지 않는 이유.
워로드의 전투는 철저한 패 싸움이었다.
무기 선택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직업들이 종종 있는 데다가, 워낙에 폭넓은 스킬 세팅이 이루어지는 탓에 직업을 미리 알아보는 건 쉽지 않았고, 어떻게 직업을 알아냈다 해도 그것만으로 어떤 스킬들을 가지고 있을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그 탓에 서로 스킬을 숨기며 허를 찌르고, 끊임없는 수 싸움을 벌이는 것이 높은 수준의 PVP일수록 중요해졌다.
에일은 가지고 있는 아이템과 스킬들을 쏟아 부어 훌륭한 성과를 보긴 했지만, 동시에 밑천을 모두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반면 상대는 두 개의 액티브 스킬을 사용했을 뿐, 아직 모든 패를 꺼내든 건 아니었다.
워로드에선 어떻게든 죽음만큼은 피해야 했기 때문에 신중하게 나서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신중해야 하는 것은 저쪽이 더하다.’
에일이 모든 패를 사용했다고는 해도, 상대가 그걸 알 방법은 없었다.
더군다나 한 자릿수 대의 체력을 지니고 있는 상태에서 쉽게 모험을 감수하지는 못할 터.
스윽.
예상했던 대로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지, 검은 후드를 쓴 남자 쪽에서 먼저 단검을 내리고 뒤로 물러났다.
에일은 굳이 그를 막아서지 않았고,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이곳에서 사라졌다.
만약 치졸한 녀석이라면 에일이 놓아준 입장이라는 걸 알면서도 체력을 회복한 뒤 다시 싸움을 걸어올 가능성도 있었지만, 만약 그런 실망스러운 녀석이었다고 해도 다시 뭉개 버리면 그만이었다.
무엇보다 에일은 방금 상대했던 플레이어가 그런 부류는 아닐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상으로는 짧은 대결이었지만 그사이에 느끼게 된 것은 굉장히 많았다.
“휴, 아슬아슬했어…….”
검은 후드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에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가슴 졸이며 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페렌과 피코가 와락 달려들어 에일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으앙… 에일, 몸에서 피나.”
“아니, 괜찮아. 이거 하나도 안 아파. 응?”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올려다보는 꼬마들의 모습에 급히 무릎을 굽힌 에일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그들을 달래줬다.
하지만 그들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메시지 하나가 짧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
[‘■■■’가 심연 속에서 당신을 지켜봅니다.]
* * *
“모두 정화 완료!”
“다행히 고대 정령도 아무 이상 없어!”
양쪽에서 헐레벌떡 뛰어온 페렌과 피코가 에일에게 달려왔다.
에일은 혹시 동굴을 나갔던 정체불명의 유저가 다시 이곳으로 찾아올까 봐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의 예상대로 다시 나타나는 짓을 벌이진 않았다.
정화 작업도 성공적으로 끝난 것 같아 보이고, 잠들어 있는 고대 정령도 깨어나지 않았다.
자신이 성공했으니 반대편의 입장이던 플레이어는 지금쯤 퀘스트가 실패로 처리되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갑자기 그만한 실력자가 나오다니… 대체 어떤 녀석이었던 거지.’
에일이 방금의 전율을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렇게 다른 플레이어와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접전을 펼친 건 정말 오랜만이었고, 전투를 끝내고 나서도 쉽게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이런 감각을 느끼는 것도 정말 오랜만… 아니, 처음이었다.
가상현실게임이기에 가능한 박진감과 희열.
그와 함께했던 알리사도 굉장한 실력의 소유자였지만, 직업부터가 전문 힐러인 치유사인데 다가 자신과 직접 싸워보지는 않았기에 이런 감각을 느낄 수는 없었다.
‘뒤늦게 합류한 타 게임의 랭커 출신인건가.’
전투 중 죽지도 않고 퀘스트를 무사히 완료시키기까지 했으니 깔끔한 성공이라고 봐도 무방했지만,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왠지 이번으로 끝날 인연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 * *
어두운 조명이 비추고 있는 방 안, 두 명의 남성이 자리에 앉은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객과 업자의 관계로 마주한 둘 중 입구 자리에 앉은 이는 화이트 팽 길드의 베켄, 잉골 숲에서 에일에게 죽임을 당했던 유저였다.
이틀 내내 시계만 바라보던 그는 48시간의 접속 페널티가 드디어 풀린 상태였고,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이 자리를 마련했다.
“그래서, 처리할 유저의 이름은?”
“그건 나도 모른다. 평소에도 쓰레기 같은 짓을 벌이고 다니는 놈인지 지 정보를 비공개해 놨어.”
베켄이 짜증스럽게 주먹을 쥐었다 피며 말했다.
그에 대해 생각만 해도 너무 열이 받는 나머지 이가 바득바득 갈릴 정도였다.
그렇게 베켄이 바로 앞에서 쉽게 화를 식히지 못하고 있었지만, 건너편에 앉아 있는 가네이는 그런 광경이 익숙한 듯 표정 변화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점은?”
가네이가 변함없는 어조로 물었다.
주로 고객과 우발적인 시비가 걸렸던 유저를 찾아 보복해 주는 업무의 특성상, 처리해야 할 타깃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 정도는 흔한 케이스였다.
이쪽 분야의 전문가인 그들 길드에게는 그저 약간의 추가 보수가 필요하다는 것 외에는 별 문제도 아니었다.
“그 자식이 내 퀘스트 아이템을 훔쳐갔어. 아마 하얀 숲으로 갈 거다. 거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놈을 잡을 수 있을 거야.”
베켄이 미리 생각해 뒀던 대로 비상의 깃털에 대해 털어놨다.
이 단서만 있다면 확실히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었지만, 정작 그의 말을 듣던 가네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얀 숲이라면 곤란해. 안으로 들어가는 문제는 둘째 치고, 숲의 입구 주변에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를 보이다간 그대로 화살에 꿰여 버리니까. 이틀 전에 얻은 퀘스트 아이템이라면 이미 녀석이 들러 봤을 텐데 다시 그곳에 나타날 지도 불확실하다. 그것 말고 뭔가 놈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 만한 특징은 없나?”
그의 말에 베켄은 잠시 입을 꾹 닫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건 처음이다 싶을 정도였지만, 오직 에일을 죽이고 싶다는 일념하에 모든 생각을 쥐어짜 냈다.
그리고 잠시 뒤, 베켄은 가네이에게 말을 쏟아 냈다.
20레벨 대의 플레이어라는 점부터 시작해 긴 장검을 쓰고, 기억나는 인상착의나 생김새, 무엇보다 빛의 교단 소속인 이단심판관이라는 것.
무기에 흰색 불꽃이 붙는 스킬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난생 처음 본 것이라 생생히 기억났다.
게임에 들어오지 못하는 동안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니며 찾아본 결과 이단심판관들의 전용 스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나 미친 인간들이 많은 직업군답다며 치를 떨었던 베켄은 만약 이번에 화제가 된 잉골 숲 영상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면, 그에 대해서도 가네이에게 숨김없이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워로드 내의 이슈에 그다지 밝은 편이 아니었고, 잉골 숲은커녕 퀸즈 블론드 사건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베켄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가네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정도 특징만 건네줘도 쉽게 찾을 수 있지. 그렇다면 남은 옵션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들은 단순히 한 차례 죽여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선 타깃을 얼마나 죽일 것인지 횟수를 정하는 것부터 시작해, 특별히 빼앗아 줄 아이템, 좀 더 자세히 들어가 복수 방법이나 전해 줄 말까지 요청받는 등 수많은 옵션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물음에 베켄은 고민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정해진 횟수는 없어. 그 녀석이 아예 게임을 스스로 포기할 때까지 끝까지 척살하는 게 유일한 조건이다.”
“그 정도면 비용이…….”
“돈이라면 상관없어. 일 처리만 똑바로 한다면 얼마든 내 주지.”
베켄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런 그의 대답에 피식 웃음을 지은 가네이는 여유 있는 모습으로 말했다.
“좋아, 그러면 그렇게 하지. 믿고 맡겨도 좋아.”
‘확실히 믿을 만한 녀석들인 것 같군…….’
그들의 자신감과 여유에 베켄은 슬쩍 시선을 옮겼다.
방 한쪽에 걸려 있는 깃발와 그 안에 그려진 자줏빛 꽃의 문양.
워로드 제일의 청부 전문 길드인 ‘아마란스’의 문양이었다.
대륙 전역에 지부를 뿌리 내리고 활발히 활동하는 아마란스는 청부 길드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확실한 실력과 신뢰성까지 갖춘 곳이었다.
베켄도 그걸 알고서 굳이 이틀을 기다린 뒤 여기까지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혹시 놈을 죽인 뒤, 모습을 촬영한 증거 사진 같은 걸 요청하려면…….”
“당연히 필요하지!”
“그래… 알았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빽 소리를 지른 베켄은 곧 마주할 에일의 시체를 상상하며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다시 자리에 털썩 앉은 그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중얼거렸다.
“너 이 새끼… 사람 잘못 건드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