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침묵과 함께 (8)
‘경계한다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메시지.
워로드의 신격이 고작 플레이어 하나를 경계한다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자신의 사도에게 위협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경계했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보통 하나의 신격이 무언가를 경계한다고 시스템 메시지로 의사를 나타낼 정도라면, 그것은 단순히 신도 하나가 걱정되어서가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자신의 신앙 혹은 교단을 위협할 요소가 있을 때에나 나타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고민하고 있을 새도 없이 눈앞의 플레이어가 땅을 박차며 다가왔다.
순간 에일도 당황할 정도로 매우 빠르게 거리를 좁힌 남자는 단검을 휘둘렀다.
정직하게 정면을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
그런 공격에 당해 줄 만큼 에일은 어리숙하지 않았고, 그의 단검을 손쉽게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노린 것은 처음부터 이번 공격이 아니었다.
카가가각!
검과 검을 바짝 붙인 채 안쪽으로 파고든 남자는 단숨에 코앞까지 근접해 왔다.
그리고는 한번 좁힌 거리를 절대 에일이 벌리도록 하지 못하게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계속해서 단검을 휘둘러 압박해 왔다.
장검의 길이 탓에 적절한 대처가 곤란해지자 에일은 그에 대응하기 위해 급히 자신의 장검을 몸 쪽으로 바싹 붙이며, 검 손잡이를 최대한 짧게 잡았다.
쩌엉!
몰아치는 공격을 연달아 방어하는 와중에 틈을 잡아 강하게 휘둘러진 에일의 검이 상대를 강타했다.
재빨리 반응하며 단검을 들어 올린 남자는 에일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충격에 한 발자국 물러나야 했고, 에일은 그 틈을 이용해 겨우겨우 다시 거리를 벌리는 데 성공했다.
‘이건 대체…….’
예상외의 강적을 맞닥뜨리자 에일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불과 25레벨 대의 퀘스트, 하지만 검을 쓰는 수준은 지금 레벨 대의 일반적인 범주를 한참이나 넘어서 있었다.
거기다 단검을 사용하는 도적 계열 클래스들은 대체로 쌍검을 쓰는 편이 대세였는데, 눈앞의 남자는 단 하나의 검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처음엔 단검 하나만 사용하는 척 트릭을 쓰다가 갑자기 두 번째 단검을 뽑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에,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럴 경우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방금 전이나 지금의 자세를 보아 그럴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남자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칼집도 하나뿐이었고, 취하고 있는 자세부터가 전혀 검을 추가로 뽑을 여지를 두고 있지 않는 자세였다.
‘그렇다면…….’
에일은 하나의 단검을 사용하는 유저들이 주로 선택할 만한 수많은 직업군과 스킬들을 머릿속에서 주르륵 뽑아냈다.
어떠한 정보도 없는 마당에 그중 어느 하나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가장 가능성이 큰 변수들을 미리 전부 고려하고 대비를 해야 했다.
당연히 그 모든 변수들에 미리 대처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예상하지 못했던 수 하나에 맥없이 나가떨어지기 싫다면, 머릿속 한편에서는 미리 생각을 해 둬야 했다.
‘방심하지 않는다.’
방금 나눈 합과 움직임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상대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에일은 곧장 이단 지정 스킬을 발동해 남자의 머리 위에 이단의 낙인을 띄웠다.
PVP든 PVE든 오직 사도이기에 강제할 수 있는 강력한 어드밴티지.
화르르륵!
에일이 가볍게 장검의 칼날을 훑자 성화가 피어올랐다.
난데없이 자신의 머리 위에 나타난 이단의 표식과 무기를 두른 하얀색 불꽃에 후드를 쓴 남자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둘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카아앙!
‘역시 우연이 아니었어.’
이번에도 검이 부딪히기 무섭게 남자는 끊임없이 거리를 바짝 좁히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짜증이 날 정도로 노골적인 움직임.
단순히 뛰어난 피지컬만을 믿고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싸워야 하는 지 아는 녀석이었다.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장검과 좁혀 들어와 싸움을 거는 단검.
장검을 쓰는 쪽에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면 상성상 굉장히 불리하게 상황이 흘러갈 수밖에 없었는데, 남자는 정확히 그걸 노리고 있었다.
‘이거 곤란한데.’
지금의 에일은 그가 약점을 노리고 올 것이란 걸 예상해 알고 있긴 했지만 마땅한 대처법을 마련할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제 23레벨이 된 상황에서 본래 직업별로 가지게 되는 기초 스킬을 제외하면 스킬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고작 두 번이 전부였고, 선택할 수 있는 아이템 옵션의 폭도 좁은 편이라 약점에 대해 적절히 조치를 취해 두기엔 무리였다.
긴 리치를 가진 장검의 약점인 초근접전에 대비해 체술 쪽으로 보완을 해 둘 생각이었지만, 장기적인 플랜일 뿐 당장 일어난 싸움에서 어떻게 하긴 무리였다.
까앙!
‘이크……!’
에일이 순간 비어 있던 자신의 허벅지를 노린 남자의 단검을 쳐냈다.
상대는 단순히 하나의 단검을 쓰는 것 말고도, 쉽게 보기 힘든 특이한 스타일의 소유자였다.
보통 단검을 쓰는 유저들은 무기의 특색을 살려 빠른 기동성과 유연함을 이용해 얕은 견제를 자잘하게 많이 섞어가며 전투를 이어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상대하고 있는 남자는 그런 견제구가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치명적인 부위만을 노리며 강한 힘이 실린 일격만을 뻗어왔다.
체력에 투자를 어느 정도 해 둔 편인 데다가 광기 스탯으로 인해 스탯이 넉넉한 편인 에일은 작은 견제 정도야 몸으로 흘리며 돌파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 상대하고 있는 남자의 공격은 적당히 몸으로 받아 가며 흘릴 수 있을 만한 공격이 하나도 없었다.
방금 상체 중심의 가드를 피해 허벅지를 노리고 들어온 일격도 단순히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견제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상태 이상 ‘출혈’을 일으키기 위해 동맥 부근을 노린 것이다.
‘하지만 대강 패턴은 알았어.’
휘릭!
에일의 손에 쥐어 있던 장검이 스르륵 사라졌고, 인벤토리에 있던 단검이 나타나 역수 방향으로 쥐어졌다.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무기 스왑.
에일은 장검을 휘두르고 있던 궤적을 순간적으로 비틀어 상대의 복부를 향해 단검을 찔러 들어갔다.
허를 찌르는 변칙적인 움직임이었다.
촤악!
하지만 빗나갔다.
남자의 재빠른 움직임에 단검은 미세한 차이로 옷깃을 스치며 지나갔고, 물 흐르듯 이어지는 상대의 반격이 다가왔다.
순간적으로 과하게 움직이며 변수를 노린 탓에, 공격이 통하지 않자 오히려 상대의 반격을 대처할 수 없는 자세가 되어 버렸다.
그런 에일의 목을 정확히 노리고 들어오는 남자의 단검.
푸욱!
“……!”
하지만 단검에 찔린 것은 오히려 남자의 등이었다.
목을 노리던 공격이 닿기 직전, 에일은 역극 스킬을 사용해 순식간에 뒤로 돌았고 남자의 등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특수 효과 ‘저주’가 발동됩니다!]
‘통곡의 단검’의 둔화 효과가 남자에게 적용되었고, 그와 동시에 성화로 인한 화상 데미지까지 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 무기를 바꾸고 단검을 찌르던 그 순간부터 에일의 머릿속에 모두 계산된 노림수였던 것이다.
카가강!
하지만 상대는 금세 동요를 감추고 에일에게 다시금 달려들었다.
민첩 특화 직업답게 빠른 움직임은 여전했지만, 둔화 효과가 적용되었기에 처음보다는 대처하기가 용이해졌다.
다시 바꿔 든 장검으로도 커버가 가능했고 근거리에서 아슬아슬한 반격을 날리는 그림도 종종 나타났다.
그러나 그때, 효과음과 함께 에일의 몸에 동그란 원들이 생겼다.
‘이건……!’
자신의 몸에 생겨난 원들의 정체를 파악한 에일이 흠칫 놀랐다.
희귀급 스킬, 약점 간파.
스킬을 발동하면 상대의 몸에 약점을 가리키는 표식이 생겨났고, 그 부위를 성공적으로 타격하게 된다면 훨씬 높은 데미지를 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녀석이었다.
도적 계열의 직업들만이 배울 수 있는 공용 스킬로 무려 희귀 등급의 스킬 중에서도 굉장히 높은 축의 평가를 받고 있는 스킬이었다.
약점이 그려진 곳만큼은 절대 공격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
상대는 약점 부위만을 집요하게 노리며 단검을 뻗어 왔고, 에일은 그를 방어하며 모두 쳐냈다.
카가가각!
계속해서 공격이 막히자 남자는 휘둘러진 에일의 장검을 정면에서 한 차례 옆으로 흘려낸 뒤, 순간적으로 자세를 비틀어 낮게 접근했다.
그리고 이번엔 단검과 약점 쪽에 시선을 집중해 그에 대처하려던 에일의 틈을 노렸다.
빠악!
왼팔의 팔꿈치가 에일의 가슴팍에 정확히 들어갔다.
단순히 평범한 타격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강한 충격이 느껴졌고, 일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워로드의 상태 이상 ‘스턴’이었다.
온라인 게임에서처럼 아예 짧은 시간 기절을 해 버리는 효과는 아니었지만, 지속 시간 동안 인지 능력이 극도로 떨어지고 혼란 상태에 접어들었기에 당한 입장에서는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는, 손에 꼽힐 정도로 강력한 상태 이상이었다.
평범한 팔꿈치 타격으로 스턴이 올리는 없었고, 공용 스킬 ‘혼절 강타’일 것이 분명했다.
정확히 들어가기만 한다면 무시 못 할 데미지와 함께 확정적으로 짧은 스턴을 남기는 희귀급 스킬.
‘이런……!’
에일은 정신을 차리려 해 봤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시스템적으로 발생하는 혼란 상태이니 만큼 어쩔 도리가 없었다.
푸욱! 푸욱!
에일의 눈먼 검을 피한 남자는 손쉽게 약점 표식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갑옷과 살점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에일의 체력이 주르륵 줄어들었다.
약점 간파와 스턴이 합쳐져 받게 된 어마어마한 데미지로 인해, 남은 체력은 30퍼센트 대에 도달했다.
단검을 이용한 두 번의 공격만으로 무려 60퍼센트가 넘는 체력이 빠져나간 것이다.
스턴의 지속 시간은 아직 짧게나마 남아 있었고, 엉거주춤한 에일의 자세도 공격을 막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남자가 처음으로 만나본 까다로운 상대였지만 그것도 여기까지.
그는 마지막 일격을 위해 심장부로 검을 찔렀다.
까앙!
“……!”
하지만 그의 표정은 금세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에일의 몸 주위에 나타난 검은색 방어막이 그의 공격을 완전히 튕겨낸 것이다.
그 어떠한 공격이든 단 한 차례에 한해 무효화할 수 있는, 검은 수정 장신구 세트의 특수 효과였다.
힘껏 내지른 공격이었기에 더욱 큰 반동이 돌아와 남자의 팔이 뒤로 젖혀졌고, 터무니없을 정도로 커다란 빈틈이 생긴 꼴이 되었다.
키릭!
그 순간, 미리 자세를 취하고 장검을 쥐고 있던 에일의 스턴이 풀렸다.
완벽한 찬스가 그에게 주어졌고, 다음에 취할 행동은 오직 하나뿐.
영웅급 스킬, ‘일섬’을 발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