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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이단심판관-51화 (51/227)

51화 침묵과 함께 (7)

고대 정령석.

이름 그대로 고대 정령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정기를 특수한 돌이 흡수해 만들어지는 것이자, 유저들 사이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아이템인 일반 정령석들과는 격이 다른 물건이었다.

엘프를 비롯해 정령과 깊이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 종족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데다가, 영혼석을 직접 정제할 수 있는 종족은 그보다 적었다.

강력한 정령의 힘이 담겨 있는 이 돌은 하이 엘프들이 행하는 의식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하얀 숲으로 향할 이번 수송 물품의 정체이기도 했다.

“으으… 말하면 안 된다 했는데.”

페렌이 자신의 양쪽 귀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귀여운 꼬마들을 살살 구슬려 꾀어내는 게 조금 양심에 찔리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떤 정보든 알아 두면 알아 둘수록 좋았고, 하물며 수행할 의뢰에 관한 것들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시간을 지체하는 것보단 직접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러면 고대 정령석이 만들어지고 있는 곳은 어디야?”

“내가 안내해 줄게.”

피코가 먼저 앞장서며 길을 안내했다.

그렇게 그들은 마을을 벗어나 숲의 중앙으로 향했고, 닦여진 길 하나 없는 복잡한 숲속에서 거침없이 깊게 들어갔다.

아무리 복잡한 숲이라 해도 로툼족과 함께 걷는 이상, 길을 잃을 걱정 같은 건 없었다.

“정령의 숲 아래엔 고대 정령이 잠들어 있다고 했지?”

“맞아, 지하의 고대 정령에게서 정기를 받아 정령석을 채우는 거지. 고대 정령들은 굉장해서 가만히만 있어도 기운이 흘러나오거든.”

“다들 무섭게 생긴 데다가 말도 안 통하지만 말이야.”

페렌이 슬쩍 끼어들며 거들었다.

이곳을 포함해 워로드 전역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고대 정령들은 모두 활동을 멈추고 잠들어 있었다.

타고난 정령 친화력으로 잠들어 있는 정령들과도 일정 부분 대화가 가능한 로툼족들이 숲 아래에 잠들어 있는 고대 정령과도 대화를 시도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반 정령들과 비교하기엔 너무나 거대한 존재이기에 그들조차도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

단지 그들의 기운을 갈무리해 정령석을 만드는 데 그칠 뿐이었다.

“저기야!”

목적지에 다다르자 페렌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깊은 숲속의 중심부에 공터 같은 공간이 넓게 조성되어 있었고, 그곳엔 제단들이 여럿 펼쳐져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빛이 일렁이는 푸른 돌들이 간소한 모양새의 제단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원래는 반나절 안에 모두 만들어지는데 아직 절반도 차지 않았어.”

“으음…….”

에일이 제단에 가까이 다가가 상황을 살펴보았다.

고대 정령의 기운을 받는다는 이야기대로 바닥에서는 희미한 빛깔의 아지랑이가 일렁였고, 그것이 푸른 돌들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하지만 이상하게도 바닥에서 올라오는 빛이 약간은 탁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원래 정령의 기운은 정령이 가진 순수한 고유의 빛만이 띄어지기 마련인데, 그가 알고 있던 워로드의 상식과는 달랐다.

정말 미세한 차이라서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닐 수도 있었지만, 촉이 좋은 에일은 그것을 보자 수상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고대 정령에게 가보자. 길 좀 안내해 줄래?

“기운을 빨리 달라고 독촉해 보려고? 하지만 잠들어 있는 고대 정령은 우리 말을 못 들어.”

“혹시 에일은 고대 정령과 말할 수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문제가 생겼는지 알아보러 가자는 거야.”

“문제?”

“정령이 몸이 안 좋다던가 뭐 그런 거지. 어쩌면 기운이 다른 곳으로 흐르고 있을 수도 있고.”

“아아!”

페렌과 피코가 동시에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마치 대단한 추측이라는 양 눈을 반짝이는 걸 보니 보고 있는 에일이 다 민망할 정도였다.

“역시 에일에게 말하길 잘했어! 금방이니까 따라와!”

* * *

“이런 걸 왜 방치해 둔거야?”

“말도 안 돼! 이런 이야기는 들은 적 없어……!”

초롱초롱하던 두 로툼족의 눈에 깊은 충격이 서렸다.

숲의 중심부로 향하는 지하 동굴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아름다운 정령들의 숲, 그곳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곳.

가장 신비롭고 성스러워야 할 장소에서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빛을 잃은 정령과 거무튀튀하게 물든 대지뿐이었다.

언데드들로 가득 차 있는 던전에서나 날 법한 지독한 썩은 내가 진동했다.

바깥에서 흘러 들어온 줄 알았던 정령들은 사실 내부에서부터 오염되어 생겨난 것이었다.

숲 안의 충만한 영혼들은 환경에 따라 손쉽게 변질되기 때문에 몬스터로 변하는 게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던 에일조차도 진작 이런 일이 벌어졌을 경우를 의심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거지?’

지난 수천 년이 넘게 자연의 균형을 유지하며 멀쩡하던 숲과 정령들이 갑자기 저절로 오염되었을 리는 없었다.

즉, 인위적인 개입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는 것.

천성부터가 이런 짓을 할 수 없는 로툼족은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고, 자연히 외부인의 소행일 것이라는 생각이 이어졌다.

하지만 정령의 숲 전체를 뒤덮고 있는 강력한 결계는 허술하기는커녕, 한 치의 빈틈도 없어 어떻게든 길을 뚫어 보려던 수많은 유저들조차 학을 떼게 만든 녀석이었다.

아무나 적당한 수로 뚫고 들어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키르르륵!”

빛을 잃은 검은 정령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을 발견하자 즉시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는 모습이었다.

페렌과 피코가 그들에게 열심히 말을 걸어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구정물 같은 몸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는 정령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이미 말이 통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촤아악!

달려드는 검은 정령들을 에일이 베어 갈랐다.

순식간에 휘둘러진 그의 손에는 어느새 하얀 불꽃이 타오르는 장검이 들려 있었다.

“이쪽은 내가 청소해 둘 테니, 너희들은 빨리 빠져나가.”

“그럴 순 없어! 정말 숲의 중심이 오염된 거라면 우리가 직접 정화해야 해. 혹시 오염이 고대 정령의 잠을 깨우기라도 했다간…….”

다음 일들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페렌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외부인인 에일도 그런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간 일이 어떻게 흘러갈 지쯤은 알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워로드 세계관의 설정대로라면 숲뿐이 아니라 주변 전체가 한바탕 초토화될 수도 있는 커다란 건수였다.

잠들어 있는 고대 정령은 그만큼 강력한 존재들이었고, 정령마다 각자의 성향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단지 잠을 깨웠다고 그들이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환경에 민감한 정령의 특성상 오염이 그들의 정신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쳤다간 재앙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젠장, 갑자기 스케일이 왜 이렇게 커지는 건데?’

특별해 보일 것 없던 수송 호위 의뢰에서 갑자기 로툼족 전체의 목숨이 달려 있을지도 모르는 임무가 되어 버렸다.

네임드 NPC인 알룬드가 엮여 있을 때부터 불안하긴 했지만, 설마 고대 정령만 한 건수가 연관되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면 뒤에 잘 붙어 있어.”

에일은 본격적으로 길을 뚫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곳에서 생겨난 검은 정령들은 대부분이 26, 간혹 28레벨의 몬스터들이었고 처리에 커다란 문제가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길을 막는 몬스터들을 지체하지 않고 베어 넘겼고, 고대 정령이 잠들어 있을 숲의 최중심부로 향했다.

동굴 내부는 복잡하기 짝이 없었지만, 에일의 뒤에 선 페렌과 피코가 계속해서 길을 알려줘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고대 정령 잠들어 있는 위치, 그리고 오염이 일어난 진원지조차 로툼족들에겐 모두 읽혔다.

“마지막 갈림길이야……!”

“어느 쪽이 오염된 곳이야?”

“왼쪽!”

피코가 왼쪽 길을 가리키자, 에일은 지체 없이 그리로 나아갔다.

어차피 고대 정령에게 가 본다 한들 뭔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정령이 깨어나거나 영향을 미치기 전에 오염의 원인부터 제거해야 했다.

오염의 진원지가 코앞까지 가까워지자 썩은 내는 더욱 심해졌고, 땅의 탁기는 더욱 짙어졌다.

그들은 통로의 끝에 위치한 마지막 방에 들어섰다.

“이건…….”

안으로 들어서자 방 안의 광경에 절로 에일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심하게 오염되어 거무죽죽해진 천장은 뚝뚝 흘러내렸고, 바닥엔 반쯤 녹아내린 정령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남자의 얼굴을 감춰져 있었다.

충격을 받은 채 멈춰 서 있는 페렌과 피코는 알 수 없겠지만, 에일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가 NPC가 아닌 플레이어라는 것을.

가상현실게임 중에선 NPC와 플레이어의 구분이 불가능하다시피 되어 있는 게임도 몇몇 존재했지만, 워로드에선 약간의 눈썰미만 있으면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에일은 그와 마주치자마자 즉시 상태창을 열람해 보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플레이어에 대한 정보는 비공개 처리되어 있었다.

“저 녀석……! 저번에 우리 물건을 가져갔던 녀석이야!

페렌이 남자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페렌은 저번 수송인원에 포함되었던지라 습격자의 인상착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알룬드가 말한 습격자라는 게 설마 같은 플레이어였을 줄이야…….’

플레이어가 뜬금없이 이런 곳에 서 있는 것부터가 이 일을 꾸민 범인인 건 눈치 챌 수 있었지만, 설마 사전에 언급되었던 습격자도 동일 인물일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눈앞에 서 있는 플레이어와 에일 자신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퀘스트를 맡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어느 한쪽이 먼저 퀘스트를 포기하고 물러서기 전에는 대립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나 평범한 반복 퀘스트도 아닌, 이 정도로 규모가 커진 퀘스트를 순순히 포기하고서 물러갈 가능성은 희박했다.

스릉!

상대방도 그를 알고 있는 듯, 아무 말 없이 단검을 뽑아들었다.

싸움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자 에일은 들고 있던 장검을 치켜들었다.

득실을 철저히 따질 뿐, 걸어오는 싸움을 굳이 피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레벨 대와 스펙은 비슷한 것으로 보이는 데다가 일대일 상황.

솔직히 말해 괴물 같은 랭커들이 주로 포진해 있는 상위 레벨 대도 아니었고, 어지간해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메시지가 에일의 눈앞에 나타났다.

[‘빛의 심판자, 루’가 검은 후드를 쓴 괴한을 경계합니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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