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침묵과 함께 (6)
“키르르륵!”
꿈틀거리며 다가온 검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오염된 정령이라는 이름의 25레벨 몬스터로 길게 뻗은 검은 팔과 다리를 늘어뜨린 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후웅!
몸을 살짝 비틀어 공격을 피한 에일은 뒤로 물러서 적당한 간격을 만들었다.
딱 상대를 견제하며 장검을 휘두르기 좋은 거리.
수차례 팔을 뻗어 오는 오염된 정령의 공격을 모두 흘려 낸 에일은 정확히 빈틈을 찾아 장검을 찔러 넣었다.
그렇게 장검이 정령의 가슴팍을 깊게 쑤시고 들어감과 동시에 녀석의 몸에서는 화상이 일어났다.
지속 데미지에 성속성 데미지까지 추가되어 들어가자 오염된 정령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곧 에일이 휘두른 다음 공격을 허용해 꼼짝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정령의 숲에 출몰하게 된 오염된 정령들은 처음 퀘스트 아이템에서 표기되었던 권장 레벨 대로 25레벨 대의 몬스터였지만, 에일은 여신의 총애로 인한 버프와 광기 스탯으로 인해 전투 관련 능력치 뻥튀기되어 충분히 커버가 가능했다.
휘익!
허공에 한 차례 검을 휘두르자 검신에 붙어 있던 성화가 꺼졌고, 에일은 부드럽게 무기를 집어넣었다.
“그러면 이쯤 해둘까.”
한참을 전투에 매진한 에일의 주변 바닥엔 몬스터의 시체로 가득 깔려 있었다.
그가 이곳에서 상대한 몬스터는 오직 오염된 정령들뿐이었지만, 그들은 모두 제각각의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같은 곳에서 나고 자란 정령들도 개체마다 모두 모습이 다르듯, 오염된 정령들 역시 모습이 공통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전과 같았으면 이제 이것들을 가지고 온갖 일들을 벌였겠지만, 로툼족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 죽어 있는 시체를 또다시 심판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여기는 다른 곳도 아닌 정령의 숲이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정령이나 이야기를 전해 들을지도 모르는 엘프들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었기 때문에 신중하게 행동하는 게 좋았다.
[여신이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하품합니다.]
‘…….’
갑자기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
[‘빛의 심판자, 루’가 정화의 불꽃을 그리워합니다.]
저번 잉골 숲에서의 행동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던 루에게는 싱거운 처분이 그다지 반갑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그녀도 이 상황 자체는 너그러이 이해해 줬다.
에일은 루의 단 하나뿐인 사도였고, 혹여나 상황이 크게 잘못되었다간 빛의 교단 자체에도 타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드는 일을 벌였다가는 총애도와 공헌도가 훅훅 떨어져 나가는 다른 신도들에 비하면, 여신이 그에게는 꽤나 인내심을 가지고 봐주는 편이었다.
물론 그렇다 할지라도 언제나 유리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유일한 사도라는 특성상 많은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곧 에일의 행동을 여신이 언제나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만약 대놓고 그녀의 뜻을 반하는 행동을 하며 무시했다간 관련 스탯이 엄청난 폭으로 깎여 나갈 각오를 해야 함은 물론, 어쩌면 그 이상의 제재를 가해 올지도 몰랐다.
잉골 숲에서 그녀가 강하게 독촉했던 기세만 보더라도, 베켄에게 순순히 굴복하고 물러났다간 어떻게 되었을지 예상하기도 힘들었다.
‘뭐, 사실 딱히 그렇게 걱정할 만 한 건 아니지만…….’
특유의 엄격한 교리와 컨셉 탓에 빛의 교단은 다른 교단들에 비해 유저들 사이에서 많은 지탄을 받고 있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 은근히 합이 잘 맞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루의 기준은 분명 엄격했지만, 복잡한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단지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일삼는 이단들을 불태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들과 마주하게 되며 다양한 유저들과 합을 맞춰야 하는 온라인 게임에서는 사회성에 큰 문제가 생기는 요구였지만, 에일은 길드에 들어갈 것도 아니고 굳이 파티플레이를 지향하는 편도 아니었다.
이단의 낙인이 찍혀 있을 만한 악성 유저하고는 어차피 함께할 일도 적을 테고, 특정 유저와 같은 소속인 상태에서 적대를 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이 생길 일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상대의 스펙과 소속을 불문하고 PVP에 어쩔 수 없이 많이 엮일 수밖에 없다는 단점은 있었지만, 사도로 지정된 덕에 상당한 스탯 보너스와 특전을 받고 있는 만큼 그 정도 요구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워로드에서 신과 신도의 관계란, 무작정 퍼주거나 따르는 것이 아닌 철저히 상호 간의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거래 관계였으니까.
“나가면 제대로 보여 드릴 테니 조금만 참아주세요.”
에일이 적당히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신이 기대감을 가지고 당신을 지켜봅니다.]
[빛의 교단 공헌도 +25]
“…요즘 갑자기 살림이 좋아지셨나 봅니다.”
최근 들어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의 빈도가 부쩍 늘어났고, 멋진 전투를 보이거나 할 때면 공헌도를 비롯한 후원도 종종 보내왔다.
메시지 하나를 보내는 데에도 허덕이던 과거와는 분명히 대조되는 모습.
여신은 이번에도 간단한 메시지 하나로 답해 왔다.
[‘빛의 심판자, 루’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습니다.]
* * *
사냥을 마친 에일이 마을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사냥터에 한참을 틀어박혀 있던지라 격한 운동을 한 것처럼 다리에 힘이 살짝 풀려 있었다.
에일은 먼저 마을 한구석에 위치한 공용 우편함으로 향했다.
우편함은 유저들을 위한 대표적인 편의 시설인지라 웬만한 마을이나 거점 지역엔 모두 존재했지만, 그래도 이런 곳에도 있었던 걸 보고 은근히 놀랐었다.
[총 2건의 우편이 도착하였습니다.]
예상대로 도착해 있는 우편이 있었다.
두 통의 편지 모두 지하 유적에서 헤어졌던 알리사가 보내온 것이었다.
가벼운 인사말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내용은 없었지만 핵심은 우편에 첨부된 내용물이었다.
일반적인 회복 포션과 능력치를 일시적으로 올려주는 도핑 포션, 그리고 해독제와 마비치료제처럼 상태 이상을 제거하는 포션까지 들어 있었다.
‘이거 기대 이상인데?’
에일은 인벤토리에 수령된 포션들을 쭉 살펴봤다.
바토라의 시체를 해체하고 얻을 수 있었던 재료 아이템들, 그리고 오로지 정령의 숲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수 약재들을 알리사에게 우편으로 보내줬었고, 그녀는 그것을 토대로 제작한 도핑 포션들을 다시 그에게 보내온 것이다.
그녀는 얻기 어려운 희귀 재료를 얻어 높은 연금술 숙련도를 챙기고, 에일은 낮은 값으로 상위 포션들을 얻는 것.
재료와 함께 약간의 수고비를 건네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경매장에 팔리는 포션들에 비해 가격도 싸고 성능도 좋았다.
그녀가 가진 연금술의 숙련도는 2랭크라 들었는데, 모르는 이가 본다면 그 이상으로 보일 만큼 훌륭한 품질이었다.
“음? 독도 하나 보내주셨네.”
알리사가 보낸 포션들의 맨 끝자리에 독약이 하나 섞여 있었다.
아무래도 사념체의 부산물들이 평범한 치유 포션보다는 상태 이상 포션이나 독극물을 만드는데 적합해서 보낸 모양이었다.
무기에 바르는 독은 지속시간이 짧은 데다가 가격도 낮은 편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엔 지출이 부담스러워서 그렇지, 적절히만 사용한다면 빠른 사냥에 꽤나 큰 도움을 주는 물건이었다.
다만 에일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선물이었다.
치이이익!
‘역시…….’
독을 뿌려 장검 위에 바르자 곧바로 타들어 사라졌다.
신앙에만 어긋나지 않고 충실하다면 전투에서 매우 강력한 모습을 보이는 이단심판관의 또 다른 페널티.
성스러운 불꽃, 성화가 깃들었던 무기엔 이런 유의 독약을 전혀 사용할 수 없었다.
“저기 있다!”
“에일! 이제 돌아왔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반가움이 담긴 두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얼굴, 페렌과 피코가 총총 다가오고 있었다.
에일이 하루 종일 숲속에 틀어박혀서 의뢰들을 수행하자 오히려 걱정이 되었는지 진심으로 반기는 모습이었다.
“저번에 말했던 의뢰는 끝냈어.”
“정말……?”
오염된 정령에 대한 의뢰를 요청했던 피코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마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해서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일 터였다.
실제로도 그녀가 요청했던 건은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의뢰 중에서 가장 큰 의뢰였다.
마을 안의 로툼족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다른 의뢰들과 병행하기는 했지만, 무려 이틀이나 걸쳐서 세 번째 구역까지 전부 청소를 끝냈다.
그동안 사냥을 하면서 에일의 레벨은 23이 되어 있었고, 경험치를 위해 오히려 요청받은 숫자 이상으로 몬스터를 처치했으니 의뢰엔 문제가 없을 것이다.
“고마워. 남은 녀석들은 숲의 정령들이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여기!”
-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바람 정령의 기운이 깃든 신발(상급)]
피코가 매고 있던 가방에서 꺼내 퀘스트의 보상을 넘겨줬다.
장비 자체의 완성도는 빈말로도 훌륭하다고 하지 못할 물건이었지만, 숲속에 사는 정령의 기운이 저절로 흘러들었기 때문에 스펙은 훌륭했다.
이것으로 세 번의 의뢰를 완료해 세 가지 장비 아이템을 모두 획득한 에일은 바토라에게서 얻은 세트 아이템인 상하의는 제외하고, 어딘가 아쉽던 장갑과 신발, 모자까지 성공적으로 교체했다.
“우리를 도와주는 건 좋지만 적당히 쉬어가면서 해야지. 그러다 에일이 다치면 어떡해.”“나는 괜찮으니까 괜히 걱정해 주지 않아도 돼.”
피식 웃음을 흘린 에일은 꼬마들의 머리를 슥슥 문질러주며 답했다.
이렇게 열심히 의뢰를 수행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보상이 높은 이곳의 의뢰들은 하다못해 숲속의 버섯을 따오는 것조차 기대 이상으로 많은 경험치를 주었고, 그에게 있어선 정말 여러모로 대단한 장소였다.
“이제 출발하면 되는 거지?”
에일이 말했다.
이곳에 산적해 있던 서브 퀘스트들은 모두 말끔히 해결했으니 이젠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때였다.
“그… 그게.”
페렌이 에일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더듬었다.
난처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
의아해진 에일은 옆에 선 피코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왜 그래? 문제라도 있는 거야?”
“미안해. 이번에도 수급이 지연돼서 당장 출발하기는 어려워.”
“또……?”
그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한 차례 수송이 지연되었던 걸 생각하면, 벌써 세 번째 지연이었다.
별다른 일 없이 이만큼이나 늦어진 것 일리는 없었고, 뭔가 상황에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저번부터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내가 도와줄 테니까…….”
“그건 안 돼!”
페렌이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수송 물품에 대해서만큼은 비밀로 하라고 하얀 숲의 엘프들에게 당부를 받았던지라 쉽게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에일은 포기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물건을 싣고 가려는 건데?”
“말해 주면 안 된단 말이야.”
“문제를 파악해야 해결하지.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나도 곤란해져.”
“미안, 그래도 알룬드가 비밀이라 했는…….”
페렌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밀이라니, 우린 친구잖아?”
“치… 친구.”
“맞아. 하지만…….”
친구라는 에일의 말에 두 꼬마는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너희를 도와줬는데, 날 믿지 못하는 거야?”
“아니, 아니야! 그렇지 않아!”
“우린 너를 믿어!”
깊이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화들짝 놀란 페렌과 피코는 방방 뛰었다.
그 모습을 본 에일은 절로 지어지려 하는 미소를 꾹꾹 눌러 참았고, 눈을 빛내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말해 줄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