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침묵과 함께 (5)
“좋아, 좋아. 이번 것만 내다팔면 숙련도 상승이다.”
짐마차를 몰고 있는 남자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직업상으로는 검사인 그는 허리춤에 검이 꽂혀 있었지만, 사실 막상 전투가 벌어졌을 땐 제대로 휘두르는 법도 알지 못했다.
위험한 데다가 어렵기까지 한 사냥은 그에게 영 맞지 않았고, 워로드의 무역 컨텐츠에 빠져들어 상인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몹쓸 도적단들에게 약탈이라도 당하는 날에는 손해가 막심해 하루 종일 기분이 우울했지만, 상황이 딱딱 맞아떨어져 굉장한 차익을 낼 때에는 또 말로 다 할 수 없는 희열이 다가왔다.
지금도 짐마차 뒤쪽에 한가득 실린 교역품들은 그에게 짭잘한 골드와 무역 랭크를 올릴 경험치를 줄 것이다.
‘아직 시세가 크게 바뀔 만한 시간은 아니야, 역시 이번엔 여유롭게 도착하겠어.’
그가 재차 시간을 확인하며 생각했다.
워로드의 무역 컨텐츠는 단순히 교역품을 구매하고 운송한 뒤 판매한다고 끝이 나는 게 아니었다.
지역은 물론 시간마다 아이템의 시세와 거래량이 변동되며 상이하게 달라졌기 때문에 언제나 신경을 써줘야 했다.
상당히 현실적인 시스템이 적용되는지라 머리를 많이 굴려야 하는 것이 딱 그의 체질에 맞았다.
쿠웅!
그때 갑자기 멀쩡히 마차를 이끌고 있던 말이 무언가에 부딪히며 멈춰 섰다.
아무런 장애물도 보이지 않는 잘 포장된 길이었건만, 대체 무슨 일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일단은 급히 마차에서 내려선 상인은 날뛰는 말들을 진정시켰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단순히 마차를 끌던 말이 이상 증세를 보였다기엔 순간 뭔가에 부딪힌 충격이 고삐를 쥐고 있던 그에게까지 전해져 왔었다.
날뛰던 말은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잠잠해졌고, 식은땀을 삐질 흘린 그는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앞으로 다가섰다.
“이건… 진짜 막혀 있잖아?”
그가 경악하며 입을 떡 벌렸다.
앞으로 손을 뻗던 상인은 마치 마임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의 손바닥에 투명한 벽 같은 것이 분명히 느껴지고 있었다.
“버… 버그인가 설마?”
“저기, 거기서 뭐하세요?”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인이 그리로 시선을 돌리자, 포장된 도로의 오른편에 자리 잡고 있는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갑자기 길이 막혀서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지나갈 수가 없어요.”
“혹시 이쪽에 결계 있는 거 모르세요?”
“결계라니요?”
눈이 동그랗게 커진 상인이 되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웃으며 답했다.
“하하, 정말 모르셨나 보네. 이 너머에 정령의 숲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길 중심으로 둥글게 결계가 쳐져 있어서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어요. 건너편으로 가려면 하룻잎 언덕 쪽으로 빙 돌아가셔야 할 거에요.”
그의 말대로 이 근방은 쳐져 있는 결계를 넘을 수 없어, 유저와 NPC 심지어 몬스터 할 것 없이 모두가 빙 돌아가야 하는 곳이었다.
멀리서 보면 아무런 낌새를 느낄 수 없었고, 심지어 가까이서도 멀쩡한 도로로 보일 뿐인지라 더욱 악명이 높았다.
“그래서 상인분이시면 무조건 다른 쪽으로 미리 경로를 짜둬야 해요. 벌써 여기까지 오셨으면 한참 돌아가셔야겠네.”
남자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아… 혹시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그냥 불가능하다고 보시면 되요. 루톰족인지 로툼족인지 하는 난쟁이들 때문에 특별한 퀘스트가 아니면 들어갈 수도 없어요.”“아으, 정말 곤란하네. 시간이 지나면 시세가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데.”
“시세라… 역시 대단하시네. 저는 머리가 아파서 무역은 못하겠던데, 아무튼 잘 풀리시길 바랄게요. 같은 초식 유저끼리 돕고 살아야 하는데 딱히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네.”
“님도 생활직이세요?”
“그럼요, 숲에서 연금술 재료 캐는 중이었어요.”
그들이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어느새 뒤에서 다가온 남자가 말없이 그들을 지나치더니 결계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결계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사라진 남자의 모습에 깜짝 놀란 상인은 그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엇? 저 분은 멀쩡히 지나가는데요?”
“어라……?”
당황한 남자 역시 벙찐 채 결계 안을 멍하니 바라봤다.
* * *
‘나에 대해서도 미리 전해 두겠다더니 정말 바로 들어가졌네.’
멀쩡히 정령의 숲의 결계를 뚫고 지나간 에일이 신기해하며 생각했다.
워낙에 강력한 결계라 내부에서 출입이 허가된 자가 아니면 절대로 뚫고 지나갈 수 없는 장막이었는데, 에일 자신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 보아 알룬드의 전언이 문제없이 도달한 모양이었다.
결계 내부로는 오랜 세월 동안 관리를 받지 못한 건지 포장도로에 듬성듬성 풀이 자라나 있었는데, 에일은 그를 벗어나 앞쪽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숲속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가 숲을 걸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무렵, 나무 사이사이로 조그만 정령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간만의 외지인을 구경했다.
눈이 마주치자 수줍게 모습을 감추는 요정 형태의 정령이 있는가 하면, 빛나는 구의 모습을 하고 있는 녹색 정령은 에일의 몸을 한 번 슥 훑고서 지나갔다.
이곳 ‘정령의 숲’은 붙여진 이름 그대로 정령과 루툼족이 공존하며 살고 있는 숲이었고, 소환 스킬을 배우는 정령사가 아님에도 수많은 정령들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중에 한 마리를 확 잡아다가 키우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슬슬 도착할 때인데.’
잡념을 떨쳐 보낸 에일이 슬쩍 지도를 펼쳐보며 생각했다.
표시된 위치상으로는 곧 마을이 나와야 할 시점이었고, 정말 얼마 가지 않아 풍경이 바뀌며 마을이 나타났다.
건물과 길가, 거리를 비추고 있는 은은한 빛의 전등까지 전체적으로 작은 편으로 아기자기한 느낌을 줬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그곳의 주민들.
“손님이다!”
“정말 정말?”
가장 먼저 에일을 발견한 두 로툼족이 총총거리며 다가왔다.
소인답게 작은 키를 가진 그들은 어린아이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귀가 약간 뾰족하다는 것과 조그만 몸집 외에는 인간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알룬드가 말했던 인간이야.”
약재 바구니를 들고 있던 꼬마가 커다란 눈을 빛내며 에일을 올려다봤다.
“아… 안녕?”
에일이 어색하게 그들의 환대에 답했다.
단순한 어린아이들이라면 기특함에 머리라도 쓰다듬어 줬겠지만, 로툼족의 평균 나이는 수백 살이 넘어섰고 그들을 처음 마주한 에일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름이 뭐야?”
“에일.”
“안녕, 에일! 난 페렌, 얘는 피코!”
“반가워!”
페렌이라는 남자아이가 먼저 이름을 소개했고, 그의 뒤에 있던 피코라는 여자아이는 손을 번쩍 들며 흔들었다.
역시 이야기로 들었던 그대로였다.
귀여운 겉모습처럼 타고난 순수함을 지니고 있는 로툼족들은 워낙에 사람들을 잘 믿고 반겼다.
하지만 지나치게 선한 성향 탓에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인간을 비롯한 타 종족들에게 큰 해를 입었고, 차마 보다 못한 숲속의 정령들이 결계를 만들어 줄 정도였다.
보통 반대의 경우가 정상이 아닌가 싶긴 했지만, 평소 정령과 교감하며 숲속을 살아갔던 로툼족이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위험은 사라졌지만 막상 손님들의 발길이 끊기자 친화적인 로툼족들은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약간은 쓸쓸한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결계가 없었다면 지금쯤 마을이 남아나지가 않았겠지.’
이들의 세상에 가장 무시무시한 존재인 모험가, 플레이어들이 생겨난 이상 결계가 없었다면 이미 이 마을은 지도에서 사라졌을 지도 몰랐다.
실제로도 에스마이어 쪽 플레이어 중에서 결계 안으로 들어와 이들과 만난 이는 거의 없었는데, 에일은 여러모로 운이 좋은 경우였다.
페렌과 피코는 에일의 손을 붙들고서 마을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며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와 만난 다른 로툼족들을 하나같이 깜짝 놀라며 뒤로 넘어갈 듯이 반가워했고, 약초 채집을 하며 살아가는 종족답게 여기저기서 약재를 말리는 모습과 특유의 싱그러운 풀내음이 마을에 가득했다.
“저기, 그런데 수송품들은?”
고사리 손들에게 이끌리던 에일이 의뢰에 대해 물었다.
마을 구경이든 소개든 다 좋았지만 결국 이곳에 방문한 건 하이 엘프들의 의뢰 때문이었다.
“아, 그것 말이야…….”
페렌이 묘하게 말을 늘였고, 옆에 서 있던 피코가 말을 이어받았다.
“하얀 숲에 보낼 물건에 작은 문제가 생겼어. 처음부터 다시 모아야 할 것 같은데, 출발 시간까지는 아마 조금 더 걸릴 것 같아.”
“조금만 더 기다려줄 수 있겠어?”
“물론, 얼마나 걸릴 것 같은데?”
“최소 하루 정도는 기다려야 해. 어쩌면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어.”
“하루……?”
에일이 순간 멈칫했다.
정확히 물건에 어떤 이상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체되는 시간이 예상보다 길었다.
여기까지 와서 퀘스트를 포기하는 건 당연히 손해가 더 컸고, 비어 버리게 된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가 알고 있기로는 이 근방에 20레벨 근처의 유저가 사냥할 만한 사냥터는 마땅히 없었다.
정령의 숲도 평상시에 몬스터가 등장하는 곳도 아니었고,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있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그때 아래쪽에서 페렌과 피코가 에일의 다리를 건드리며 말을 걸어 왔다.
“혹시 할 것 없으면 우리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까?”
“바깥에서 흘러들어온 나쁜 정령들, 혼내줄 수 있을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묻는 로툼족들.
그들의 모습에 한 가지 사실이 상기되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 그랬었지…….’
플레이어들이 발을 들이기 어려운 엘프들의 영역이 그랬듯이, 강력한 결계가 쳐진 정령의 숲도 경쟁자인 다른 유저들의 출입이 제한되어 양질의 퀘스트가 넘쳐날 것이었다.
에일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부탁할 게 있으면 뭐든지 말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