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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이단심판관-48화 (48/227)

48화 침묵과 함께 (4)

바스락 바스락.

에일이 소복이 쌓인 눈밭을 헤치며 걸었다.

구름이 낀 하늘에서는 펑펑 눈이 내리고 있었고, 입에선 입김이 계속 새어나왔다.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는 흰 나무들은 시들지 않은 이파리를 지닌 채 빽빽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쉽게 보지 못하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어둡고 괴물이 꿈틀거리기만 할 뿐인 암울하기 그지없던 잉골 숲에서 한참을 사냥하다가 이런 곳으로 들어오게 되니 마음이 다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햇볕이 쨍쨍했는데, 갑자기 눈밭이라니… 알고는 있었지만 신기하네.”

잠시 주변 풍경을 감상하고 있던 에일이 흥미로운 듯 중얼거렸다.

지금의 말대로 에일은 분명 더없이 푸르른 숲속을 지나고 있었고, 그곳엔 눈이 내릴 기미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이 주변은 애초에 눈이 내릴 만한 기후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도가 가리키는 대로 하얀 숲의 입구 부근에 들어섰던 에일의 앞에는 실제로는 결코 볼 수 없을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한쪽엔 울창한 푸른 숲이, 다른 한쪽엔 눈이 한가득 덮인 숲이.

눈으로 직접 보고 있어도 착시가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이질적이기 짝이 없는 경계선이었다.

아무리 워로드라 해도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같은 지역 내에서 이 정도로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기후 변화는 워로드에서도 극히 드물었고, 이런 환경이 생기게 된 것은 숲에 자리 잡은 엘프들과 관련이 있었다.

원래는 평범한 숲이었던 이곳은 대륙 중앙 지역의 바깥, 혹한의 추위가 도사리는 북부 설원 너머에서 살던 하이 엘프들이 내려와 터전을 잡았고, 그들을 이끌던 전설적인 지도자 한 명이 강력한 마법으로 언제나 숲의 영역 안에 눈이 내리게 만든 것이었다.

물론 지금의 시점으로부터 머나먼 과거의 일이라 배경 설정상으로밖에 연관이 없었지만, 그런 무시무시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자들이니 만큼 실제 게임상으로도 하얀 숲의 엘프들은 굉장히 강한 편이었다.

숲을 지키는 일반 순찰자들도 160레벨 대를 넘어섰고, 그들의 터전인 숲속에서의 전투야 더더욱 악명이 높았기 때문에 웬만한 유저들은 감히 발도 들이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런 엘프들이 왜 나 같은 인간의 도움이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하얀 숲 내부에는 몬스터가 전혀 없는 데다가, 설령 골칫덩이가 있다 하더라도 고작 권장 레벨 25대의 플레이어에게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내부의 문제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게 가장 먼저 든 에일의 생각.

하지만 매우 폐쇄적인 성격을 가진 하얀 숲의 엘프들은 큰일이 있지 않는 이상 굳이 바깥세상과 엮이지 않으려 했기에 무작정 외부의 일과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당장 에일이 가지고 있는 정보만으로는 이 정도 추측이 전부였고, 당사자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기 전까지는 쉽게 예상이 가지 않았다.

피융!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바람 소리와 함께 쏜살같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왠지 저번과 비슷한 느낌에 에일은 뺨에 손을 가져다 대 봤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피가 흘러나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것이 끝은 아니라는 듯이 활시위 당기는 소리가 노골적으로 들려왔고, 에일은 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 덮인 커다란 나무의 가지 위에서 활을 겨누고 있는 한 명의 엘프.

창백해 보이는 핏기 없이 새하얀 피부, 그리고 백색으로 일관된 옷차림 때문에 먼저 기척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쉽게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워로드에서 이종족을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신기한 마음에 에일은 그의 외관을 자세히 살펴보려 했지만 얼굴 아래를 모두 감싼 두건 때문에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복장을 보아 하얀 숲의 순찰대군.’

이곳에 발을 들이고 가장 먼저 맞닥뜨리게 된 이는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 숲의 경계를 서는 순찰대 소속의 파수꾼이었다.

싸울 의사가 없음을 알리기 위해 두 손을 들어 보인 에일은 그에게 말을 걸어 봤지만, 여전히 입을 굳게 닫고 있는 엘프는 그저 한쪽 방향을 가리키면서 고개를 까닥일 뿐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시위가 느슨하게 풀어졌고, 엘프는 등을 돌려 숲의 안쪽으로 민첩하게 나아갔다.

그제야 따라오라는 표현임을 눈치 챈 에일은 서둘러 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 * *

안내를 따라 더 깊숙한 곳으로 향하게 된 에일은 돌무더기가 쌓여 있는 한 공터에 도착했다.

앞서가던 엘프의 기척은 한순간에 다시금 사라졌고, 처음에 가졌던 기대와는 달리 엘프들의 마을을 직접 볼 수는 없었다.

‘바깥에서 온 이방인에게 마을 안을 보여 줄 수는 없다는 거겠지.’

얼핏 보면 돌무더기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이곳은 사실 과거 외부의 침입으로 부서진 유적지였고, 아직 그에게서 경계를 거두지 않았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에일은 그의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설마 벌써부터 이 정도 거물을 보게 될 줄이야.’

하얀 숲의 순찰대장, 알룬드.

백색 갑옷과 망토를 두른 하이 엘프로 무려 200레벨을 넘어선 랭커급 네임드 NPC였다.

레벨 스케일링을 적용받는 NPC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강자.

에일이 익히 알고 있는 얼굴과 이름임은 당연했다.

남성 엘프라면 보통 여리여리한 미남을 생각하겠지만, 알룬드는 무척이나 뚜렷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실제로 눈앞에서 보니 굉장히 신기한 느낌이었지만, 혹시나 무례한 시선으로 비춰지지 않으려 주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직은 이들과 아무런 호의가 없는 관계였고, 언제든지 자신의 목이 날아가도 이상할 게 없었다.

‘세베라에 이어서 알룬드라니… 이러다 에스마이어 쪽 네임드 NPC들은 다 만나 보게 생겼네.’

이제 20레벨에 다다른 에일이었지만, 어째 계속해서 감당하기 힘든 강자들하고만 엮이는 기분이었다.

물론 적대하는 관계로 만난 것은 아니니 큰 상관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먼저 의뢰를 주는 입장이라 해도 퀘스트가 흘러가는 방향에 따라 언제든지 관계가 틀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위험성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편이었다.

다만 오히려 그들과 문제만 생기지 않는다면 일반적인 경우보다 이쪽이 훨씬 좋다고 볼 수도 있었다.

퀘스트를 던져 주고 똑같은 대사만 반복하는 평범한 온라인 게임과 달리, 워로드에서는 NPC들의 행동에 별다른 제약이 없어 그들과의 인맥이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하는 경우도 종종 찾아볼 수 있었다.

언제 목이 떨어질지 모르는 지금의 상황에 인맥을 운운할 시점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을 보낸다더니, 네가 그 대리인인가.”

“그래, 맞다.”

다른 사람을 보낸다던가 대리인이라는 말은 방금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에일은 눈치껏 대답했다.

알룬드의 짤막한 말만으로도 대강 상황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누군가 퀘스트를 중간에 넘겼나 보군.’

아이템 ‘비상의 깃털’이 베켄의 손에 들어가기 전, 다른 유저가 어느 정도 진행했던 퀘스트를 그에게 아이템 증명 방식으로 넘긴 게 분명했다.

워로드에서 퀘스트의 양도나 판매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반복되지 않는 퀘스트 자체의 가치가 높은 워로드에서는 보상을 노리고서 남의 퀘스트를 강탈하는 일도 종종 찾아볼 수 있었다.

아마 베켄의 경우엔 다른 유저에게서 고액을 넘기며 양도받았다던가, 길드의 인맥을 이용해 얻어 낸 퀘스트일 것이다.

그리고 그걸 에일이 그대로 가져가 꿀꺽해 버렸으니 배가 아파서 지금쯤 바닥에 쓰러져 있을지도 몰랐다.

그 모습을 상상한 에일은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그사이, 자신의 앞을 찾아온 인간을 유심히 살펴보며 푸른 눈을 깜박이던 알룬드가 입을 열었다.

“미리 전해 들은 건 없는 건가?”

“…사정이 생겨서 말이야.”

한 번 양도된 퀘스트를 에일이 또다시 강탈한 마당에, 얼굴도 모르는 원주인에게서 전해 들은 게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알룬드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간단한 일이니 상관없겠지. 정령의 숲에서 도착할 예정이던 수송 물품들이 습격을 당해 모두 사라졌다. 제압을 당해 돌아온 자들의 말로 보아 습격자는 오직 인간 한 명뿐이었다고 한다. 인간들에겐 아무런 가치가 없는 물건인데, 습격을 해서 굳이 수송 물품들을 빼돌렸다는 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방해하기 위함이겠지.”

“당신들이 고작 사람 한 명에게 물건을 빼앗겼을 리는 없을 테고, 정령의 숲이라면… 로툼족이 수송을 맡았던 것이겠군.”

로툼족, 방금 언급된 ‘정령의 숲’ 내부에 살고 있는 조그만 소인족을 말하는 것이었다.

“로툼족은 선한 이웃이지만… 전투에 한해서는 무능해서 말이지.”

“그러면 나더러 수송 행렬의 호위 역을 맡아 달라는 건가?”

대강 짐작을 한 에일이 물었고, 알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 인력이 갈 거라 미리 말해 뒀으니 정령의 숲에 가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다. 부탁하지.”

“왜 직접 보호하지 않고 같은 인간에게 의뢰를 맡기는 거지?”

“엘프가 인간을 반기지 않듯, 인간도 엘프를 반기지 않기 때문이지. 우리가 직접 움직이면 왕국과 맺어 둔 조약에 문제가 생긴다.”

납득한 에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들은 애초에 자신들의 영역인 숲 밖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인간들도 그들의 방문에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반대편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엘프들의 손에 죽은 인간들의 숫자는 미처 셀 수도 없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다 강력한 하얀 숲의 하이 엘프들이라면 더욱 경계할 수밖에 없었고, 아예 아스칼론의 왕실에서 먼저 협정을 제안해 와 조약을 맺어 뒀을 정도였다.

‘까탈스러운 엘프들치고는 설명이 친절한걸.’

의뢰에 대해 알룬드에게 들을 만한 것은 모두 들은 것 같았고, 에일은 기꺼이 의뢰를 수락했다.

보상은 굳이 묻거나 언급하지 않았다.

어느 곳이든 엘프들에게서 처음으로 받는 퀘스트의 보상은 대부분 한 가지로 동일했다.

돈이나 물건이 아닌, 그들의 호의.

워낙에 인간 배척이 심하고 처음 관계를 맺는 난이도가 극악에 가까운 엘프를 상대로 한 퀘스트이기에 가능한 보상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호의’란 구체적으로 그들의 영역에 체류까지는 아니더라도 방문 정도는 허가한다는 출입 권한을 주는 경우가 많았고, 처음 듣기에 황당해 보이는 것과는 상당히 유용한 보상이었다.

엘프들의 마을에서밖에 구하지 못하는 아이템이나 교역품들이 많았고, 정말 웬만해선 얻기 힘든 희귀 재료들도 숲속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의 유저는 들어오지 못하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와 같은 맥락으로 보상이 좋거나 수준 높은 퀘스트들이 바로바로 소진되지 않고 많이 남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번 친해진 엘프들의 퀘스트 보상이라면 넉넉하기로 소문나 있지. 가능만 하다면 엘프 마을 한 곳쯤은 관계를 맺어 두면 좋다고 들었는데, 이런 식으로 기회가 오게 될 줄이야. 행운이 따랐어.’

특히 이곳 하얀 숲의 경우, 이 근방의 에스마이어와 솔스티드 지역 사이를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양옆으로는 고레벨 몬스터들이 포진한 험난한 산지가 길게 늘어서 있었기 때문에 용이하지 않았다.

그 탓에 이 주변에서 두 지역을 오가며 활동하는 유저, 특히 상인들의 경우 최단 경로를 확보하고 싶어서 엘프들에게 신뢰를 받으려 난리를 쳐도 못 얻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런 반면 에일은 베켄이 대뜸 시비를 걸어준 덕분에 어부지리로 생각도 안하던 기회를 잡게 되었다.

정말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따로 없었다.

‘나중에 또 만나게 되면 한 번쯤은 불태우지 않고 편하게 보내 줘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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