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침묵과 함께 (3)
“으아아아!”
에일이 대뜸 허공에 소리를 질렀다.
아마 주변에 사람이 있었다면 그를 미친놈 취급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정을 들은 플레이어라면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대망의 스킬북에서 등장한 최하급 스킬.
똑같이 스킬 칸 하나를 차지하는 주제에 올라가는 방어력은 고작 14, 그것도 레벨에 비례해 방어력이 올라가는 것조차 아닌 ‘고정치’였다.
완전히 쓰레기 스킬의 결정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허접한 성능.
하필 보랏빛 스킬북에서 나타난 게 최하 등급의 스킬이라니, 운이 이렇게 안 좋기도 힘들 것이다.
[‘빛의 심판자, 루’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입술을 씰룩입니다.]
[그녀가 절망에 빠진 당신에게 심심한 위로금을 남깁니다.]
[빛의 교단 공헌도 +33]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차마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에일이 울상을 지었다.
누구는 속에서 눈물이 흐를 지경이건만, 이젠 영향력 수급에 전보다 여유가 생겼는지 태평해 보이는 여신이었다.
“괘… 괜찮아. 아직 하나 남았으니까. 방금 건 제물이라고 치면 돼.”
간신히 마음을 추스린 에일이 중얼거렸다.
그는 이제 하나 남은 보라색 스킬북을 내려다봤다.
예로부터 내려져 오는 게이머들의 오랜 전통에 따르면 중요한 강화나 뽑기를 앞두고서 제물을 바치면 좋은 결과가 나올 확률이 올라간다고 한다.
물론 허튼 미신일 뿐이지만 지금은 그런 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에일은 다시 한번 간절히 기도하며 스킬북에 손을 올렸다.
만약 이번 시도마저도 형편없이 실패하면 그가 세워 뒀던 계획이 크게 꼬이게 된다.
이미 가지고 있던 고등급 스킬북들을 이용해 20레벨에 곧장 상위 스킬을 얻은 뒤, 빠른 레벨업 위주로 다닐 생각이었는데 만약 쓸 만한 스킬을 건지지 못한다면 당장 공백이 되어 버릴 스킬 칸을 채우기 위해 스킬북을 구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가 되어 버린다.
그렇게 된다면 스킬북 드랍률이 높은 보스를 상대로 반복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는 소리였는데, 워로드의 시스템상 같은 보스를 반복해서 잡게 되면 경험치 보상이 일정량 줄어들기 때문에 비효율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물론 아주 큰 수치로 떨어지는 건 아닌지라 대부분의 유저들은 익숙한 보스의 공략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선두를 쫓아가려 하는 에일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제발!’
파아앗!
[일섬(영웅)]
- 이단심판관 전용 스킬
- 빛의 주인을 섬기는 자들 중 재능 있는 소수의 심판관만이 빛을 다루는 법을 터득합니다. 이들의 검에서 뻗어져 나오는 강력한 섬광은 만악을 베어 가를 또 다른 무기가 되어 줄 것입니다.
- 매우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둘러 전방에 강력한 피해를 입힙니다.
“떠… 떴다.”
에일이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노란 빛으로 이름이 빛나고 있는 영웅 등급의 스킬.
그렇게 얻기 어렵다는 희귀 등급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녀석이었다.
[‘빛의 심판자, 루’가 흥미로운 듯 눈을 반짝입니다.]
여신 또한 예상치 못한 영웅 등급 스킬의 등장에 반응했다.
‘여기에 마침 직업 전용 스킬까지 등장해 주다니…….’
워로드의 스킬북 시스템은 철저한 랜덤식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플레이어의 직업과 쓰는 무기에 따라 보정이 들어가기 때문에 전사에게 마법사 스킬이 주어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중에서도 다른 직업도 사용할 수 있는 ‘공용 스킬’과 해당 직업만이 사용 가능한 ‘전용 스킬’이 나뉘었는데, 마침 전용 스킬이 등장해 주니 두 배로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직업 전용 스킬들을 보정해 주는 다섯 번째 스탯, 에일의 경우엔 ‘신앙심’ 스탯의 존재 덕에 일반적으로 더 나은 취급을 받는 건 전용 스킬이었다.
거기다 에일의 역극 같은 이동기나 보조 스킬이라면 모를까, 직접 데미지를 입히는 공격기는 전용 스킬이냐 아니냐에 따라 성능 차이가 큰 편이었다.
‘대박이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하겠는데.’
에일은 인벤토리에서 퀘스트 아이템인 비상의 깃털을 꺼내 들었다.
도시로 이동하는 동안 조사해 본 결과, 이 깃털은 엘프가 믿을 만한 친우에게 주는 대표적인 선물 중 하나였다.
이 깃털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기운 탓에 지니고만 있다면 배타적이기로 유명한 워로드의 엘프들에게 공격받지 않을 수 있었다.
정확히는 화살이 머리에 꽂히기 전에 대화를 한번 할 수 있다는 의미 정도로 생각하는 편이 좋았지만.
엘프들의 세력은 여러 곳에 존재하고, 그들의 영역 안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지는 또 별개의 문제였다.
하지만 원래 평범한 아이템으로 분류가 되어 있어야 할 비상의 깃털이 퀘스트 아이템 취급을 받고 있다는 건 무언가와 연관되어 있는 의뢰가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 깃털 아이템에겐 구체적으로 권장 레벨 25에 의뢰 수행 장소는 하얀 숲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하얀 숲이라…….’
에일은 인벤토리에서 지도를 꺼내 들어 펼쳤다.
그리고는 지도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퀘스트 아이템이 가리키고 있는 지역의 이름을 찾았다.
조금 더 정확한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서 꺼내든 것일 뿐, 대략적인 위치라면 이미 알고 있는 지라 헤매지 않고 곧바로 찾을 수 있었다.
하얀 숲은 현재 에일이 위치한 에스마이어 지역과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는 솔스티드 지역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무 부담 없이 움직일 만한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워로드상에서 멀다고 할 수는 없는 거리였다.
‘워로드가 진짜 넓긴 넓어. 직접 플레이해 보니 더 체감이 되네.’
에일이 그동안 바쁘게 여기저기 움직이며 활동한 반경도 워로드의 전체 지도에서 본다면 얼룩 한 점만도 못했다.
물론 일반적으로 플레이어들이 무리 없이 활동 가능한 반경은 대륙의 중앙 지역뿐이었고, 나머지 지역들은 아예 제외해 놓는 경우가 많았다.
중앙 지역을 벗어나게 되는 순간 마주하게 되는 것은 북부 설산, 서부 사막, 동부 늪지, 남부 황야 등 하나같이 가혹하기 짝이 없는 환경과 괴물들이었으니 굳이 밖으로 나가는 유저가 적은 건 당연했다.
하지만 워로드 속 대륙은 중앙 지역만 따지더라도 굉장히 컸다.
에일은 아직도 극히 일부 지역만 다닐 수 있었던 에스마이어 지역, 그와 동등한 크기의 지역이 무려 14개나 더 있었다.
총 15개의 거대한 중앙 지역들.
엄청난 수의 전 세계 유저들을 고작 서버 하나에 모두 수용하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원한다면 하얀 숲에 들른 김에 지역을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시점에 굳이 넘어갈 필요는 없겠지.’
절묘하게 두 지역 사이에 위치한 ‘하얀 숲’은 엘프들로 인해 출입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지, 들어설 수만 있다면 양쪽으로 향하는 훌륭한 통로가 되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 위치한 에스마이어 지역은 95퍼센트 이상이 나이트메어 소유의 영지인 것에 비해, 솔스티드는 세력도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현재 솔스티드 지역은 나이트메어와 여명, 두 6대 길드가 양분해 나눠 가지고 있는 상태였고, 정확히 누군가의 손아귀 안에 있다고 말하기 애매한 지역이었다.
워로드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두 거대 길드가 정면으로 머리를 맞대고 대치하고 있는 데다가, 길게 늘어진 접경 지역이 온갖 곳에 널려 있는 만큼 굉장히 살벌한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당장은 휴전 중이라고는 하지만 ‘뉴월드’ 때부터 이어져온 두 명문 길드의 원수 관계를 모르는 이는 없었고, 굳이 위험에 휘말릴 수도 있는 곳으로 갈 이유는 없었다.
‘아이템만 처분하고 나면 다시 부지런히 움직일 준비를 해야겠어.’
아직도 스킬북 개봉의 여운으로 인해 얼얼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에일은 자신의 뺨을 찰싹 친 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물이 들어왔으니 노를 저어야 할 때였다.
* * *
<유저 정보>
이름: 에일
칭호: 신성징벌자
세력: 빛의 교단
레벨: 20
직업: 이단심판관
주요 능력치
힘: 57(+25) 민첩: 47(+11) 체력: 51(+12) 마력: 20(+10) 신앙심: 30.4(+10) 광기: 26.4(+10)
패시브
[광적인 순교자(기초)], [증오의 칼날(기초)]
액티브
[성화(기초)], [형벌 선고(사도)], [이단 지정(사도)], [역극(희귀)], [일섬(영웅)]
‘신성징벌자’ 칭호 효과 - 모든 스탯 +10, 이단 상대 데미지 +3%
경갑 방어구 세트 효과 - 민첩성 +3%, 방어력 +10%
신앙: 정의와 빛, 광기의 여신
직책: 루의 사도
여신의 총애: 54.07%
공헌도: 458(누적1,058)
‘크…….’
턱을 괸 채 자신의 정보창을 바라보는 에일의 입가가 슬며시 꿈틀댔다.
이번 영웅 등급의 추가로 절로 빛이 나는 스킬 목록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출중한 신앙심과 광기 스탯, 거기에 공헌도와 총애 스탯까지 그동안 착실히 쌓아올린 게 보였다.
여러모로 힘겨운 현실과는 달리 그동안 노력하며 착실히 쌓아올린 것들, 긍정적인 변화가 곧장 눈에 보이는 것이 게임의 묘미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에일에게 있어 이것만큼 멋진 광경이 없었다.
끼이익!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마차가 울창한 숲속에서 멈춰 섰고, 에일은 요금을 지불한 뒤 아래로 내렸다.
‘이 정도면 금방이겠군.’
지도를 펼친 에일이 화면을 확대하며 남은 거리를 가늠했다.
그가 내려선 곳이 숲속이기는 했지만, 푸르른 나무를 보다시피 하얀 숲이라 불릴 만한 곳은 결코 아니었다.
그도 그럴게 아무리 용감한 마부라도 미치지 않고서야 목숨을 생으로 버리려 엘프의 영역 안으로까지 들어가 줄 리는 없었다.
더군다나 워로드에 있는 여러 엘프들의 영역 중에서도 하얀 숲은 특히나 폐쇄적이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실수로 길을 잃었다 해도 일단 한번 발을 들였다간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에일은 품속에 있는 비상의 깃털을 매만지며 주저 없이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