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침묵과 함께 (2)
에스마이어의 중심 도시 중 하나인 에버마치.
큰 규모와 용이한 지리적 위치 덕에 에스마이어 지역 내에서 활동하는 많은 길드들의 근거지가 모여 있는 곳이었다.
길드 소유의 영지를 따로 가질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있는 길드야 물론 그곳에 자리를 잡으면 되는 것이었지만, 6대 길드들이 영토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지금에 있어선 쉽지 않은 이야기였다.
정치적, 전략적인 이유로 6대 길드가 차지하지 않은 소수의 영지들을 엄청난 수의 남은 길드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혈안이었기 때문에 몇 배나 경쟁이 심해졌고, 그러한 경쟁을 뚫고 영지를 차지한 길드는 한줌도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규모가 있고 지역 내에서 이름 좀 날리는 길드라도 이런 대도시에 터를 잡는 것이었다.
그리고 에일과 한 차례 마찰을 겪은 화이트 팽의 길드 본부 또한 이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다른 점은 더 없나?”
화이트 팽의 길드 마스터, 고딘이 회의실 끝에 앉아서 물었다.
그러자 긴 탁자의 양옆에 앉아 있던 길드 간부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서리불꽃에서는 여전히 협상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쪽에서 뭔가 더 꺼내길 바라는 듯한 모양새입니다.”
“길드장, 그냥 정면으로 돌파하죠.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족속들입니다. 우리 전력이라면 충분히 압도할 수도 있고요.”
“아니, 이대로 전쟁이 났다간 승패에 상관없이 올해 안에 영지 하나를 확보한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될 겁니다.”
“그러면 그놈들이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자는 건가? 비밀로 부친다고 해도 나중에 길드원들 귀에 들어가면 불만 정도로는 안 끝날 텐데.”
“그건…….”
역시나 사안이 사안인지라 간부들 사이에서 열렬히 찬반이 오갔고, 그를 잠자코 듣고 있던 고딘은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영지 하나의 가치는 엄청났다.
야심 있는 워로드의 길드라면 어느 곳이든 차지하는 게 숙원과도 같은 일이었고, 그들 또한 올해 안에 남동쪽 솔스티스 지역 변방에 위치한 작은 영지를 차지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힘만으로는 영지를 빼앗기는 절대 무리였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길드와 연합을 맺어 둔 상태였다.
같은 영지를 목표로 여러 길드가 동맹을 맺은 뒤, 영지에서 얻을 수 있는 수익금과 권리를 나눠가지는 것.
화이트 팽 같은 중견급 길드들 사이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형태의 동맹 관계였다.
정말 강력한 세력이 아닌 이상 홀로 영지를 가진 길드나 연합을 상대로 거점전을 신청하기엔 부담이 너무 컸다.
거기다 설령 전투에서 승리해 영지를 얻어냈다 하더라도 끝이 아니었다.
그들이 공격해 영지를 빼앗듯, 또다시 다른 길드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계속 방어하는 데에도 엄청난 힘이 들었기 때문에 부담을 나누고 강한 힘을 모으기 위해 이런 형식의 연합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어떻게 마련한 자리인데…….’
고딘이 뿌득 이를 갈았다.
서리불꽃 길드와 전면전을 치루고 나면 어떻게든 찾아올 수밖에 없는 전력 약화로 인해 동맹에 참가하기 힘들어질 수 있었다.
그동안 영지 하나만을 바라보면서 힘을 길러 왔고 동맹 자리를 마련했던 그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동맹 측 반응은 어떻지?”
“지금 시점에 미리 힘을 빼는 데는 난색을 표하고 있습니다. 아마 적극적으로 저희를 돕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 굳이 나서서 피를 보느니 다른 길드를 찾겠지. 나 같아도 그럴 거야.”
세력이 열세라도 지저분하게 전투하기로 유명한 서리불꽃은 곱게 전투를 끝내주지 않을 것이었다.
한창 거점전을 준비하고 있는 중요한 시점에서 그런 골칫덩이를 받아들이고 싶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철저한 비밀 동맹 관계였다.
영지를 소유하고 있는 길드가 대처하지 못하도록 동맹 관계를 비밀로 부쳐두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지금 시점에 동맹 관계를 우르르 드러내며 자신들을 돕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어렵게 마련한 계획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게 생겼어.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하는데…….’
하지만 쉽게 해결하기엔 양측 길드원 간의 반목이 너무 심한 상태였다.
평소대로라면 열심히 어르고 달래며 넘어갔겠지만, 기본적으로 서리불꽃이 워낙 싸움을 좋아하는 호전광들이라 문제였다.
소규모 용병 길드 시절부터 시작해 전쟁 전문 길드로 덩치를 불려서 그런지, 비등한 길드 간의 전쟁에도 몸을 사리지 않는 편이었고 이번에도 역시 비슷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만약 평범한 온라인 게임이었다면 한판 붙고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지만, 지금의 판은 길드 하나에 엄청난 돈과 많은 사람들이 걸려 있는 워로드였다.
단 한 번이라도 전쟁에서 패배하면 엄청난 손해를 볼 위험이 있었고, 최악의 경우 세력 축소를 넘어서서 길드 해체까지도 가능했다.
중견급 길드, 화이트 팽의 길드원은 당연하게도 전원이 전업 플레이어인 만큼, 그들을 책임지고 있는 길드장인 그는 신중한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쪽에서 먼저 굽히고 들어갈 수는 없다. 비굴하게 나갔다간 길드 이름에 먹칠하는 건 둘째 치고, 길드원들이 가만히 있지도 않을 터. 최소한 서로 한발 물러서는 그림은 나와 줘야 하는데… 정말 골치 아프기 짝이 없어.’
비슷한 체급의 길드끼리 분쟁이 발생하면 적당히 서로 빠져 주는 게 웬만한 길드들의 기본 자세였는데, 하필 상대가 상대다 보니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골치 아픈 상황에 머리를 감싸 쥐고 싶었지만, 길드원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기에 인상을 찌푸리는 것만으로 참았다.
삐빅-!
그때 접속기 바깥에서 누군가 신호를 보냈고, 그의 귀에만 들리는 호출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누군가 방 안까지 찾아온 모양이었다.
“…잠시 나갔다 오겠다. 금방 돌아오지.”
“알겠습니다.”
치이익!
접속기가 열리고 고딘은 천천히 밖으로 상체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게임 바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자신의 친동생이었다.
“네가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고딘이 접속기에서 다리를 마저 꺼내며 물었다.
평소처럼 용돈이 필요한 것이라면 굳이 자신의 집까지 직접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손봐 줘야 할 녀석이 생겼어.”
동생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복수심에 타오르고 있는 그의 정체는 다름이 아닌 베켄, 잉골 숲에서 에일에게 된통 당했던 검사였다.
베켄은 무려 176레벨의 실력자이자 화이트 팽을 이끌고 있는 길드 마스터 고딘과 친형제 사이였고, 그 덕에 무서울 것 없이 떵떵거리며 다닐 수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서 굴러 들어온 건지 모를 미친놈에게 그의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혀 버렸고, 기둥에 묶여 화형을 당해 버리기까지 했다.
그 끔찍한 하얀 불꽃에 온몸이 타오르는 것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게다가 접속을 못 하는 것은 물론 레벨다운에 장비를 잃고, 퀘스트 아이템까지 없어져 버렸다.
워로드는 사망 시 자신이 어떤 아이템을 잃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비상의 깃털’은 그가 직거래로 굉장히 어렵게 구매한 퀘스트 아이템으로, 조금만 더 스펙을 올린 뒤 연관 퀘스트를 진행할 생각이었는데, 지니고 있던 많은 아이템들 중 설마 하필 그걸 잃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디서 또 시비라도 걸린 거냐? 미안하지만 이번엔 너 뒤치다꺼리 해 줄 여력은 없어. 길드 사정만으로도 머리 아프니까.”
“잠깐… 길드 사정이라고?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그래, 다른 중견급 하나랑 분쟁이 터져서 죽을 맛이다.”
고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말했다.
그의 대답에 베켄은 거의 팔이 덜덜 떨릴 정도로 동요했다.
‘진짜 그놈이 했던 말이 사실이었다고? 말도 안 돼!’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꾸며낸 유치한 거짓말이라고만 생각했던 에일의 이야기.
남의 길드 사정을 자신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정말 현실로 다가왔다.
당혹감에 잠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베켄은 자신의 친형에게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다.
“형, 형……! 그 자식이 감히 화이트 팽의 일원인 나를 죽였다고! 그것도 고작 20레벨짜리가! 쪼렙 하나 죽이는 데 사람 한두 명 보내는 건 일도 아니잖아? 이건 우리 길드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끝도 없이 말을 늘어놓는 동생의 모습에 고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더는 할 말 없어.”
“뭐……?”
“이건 애들 장난이 아니야. 수백이 몸을 담고 있는 길드의 존폐까지도 걸릴 수 있는 문제고, 전쟁이든 평화든 해결하는 게 우선이라고. 네가 흥청망청 사치를 부릴 돈도 다 여기서 나오는 거니까.”
“으그그극……!”
콰앙!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부들부들 몸을 떨던 베켄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방을 뛰쳐나갔다.
설마 형까지 자신의 사정을 외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대로 집 밖으로 나온 베켄의 눈빛은 에일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가득 차 옅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 내가 알아서 해결하면 되는 거 아냐. 다신 워로드에 얼씬도 못하게 만들어 버리겠어.”
* * *
현실에서의 식사를 마치고 다시 접속한 에일은 부지런히 이동해 도시에 도착한 뒤 곧바로 모험가 조합에 들렸다.
먼저 아이템을 처분한 다음에 들를 수도 있었겠지만, 다른 때도 아니고 이번만큼은 퀘스트부터 먼저 깨야 할 이유가 있었다.
떨리는 마음을 꾸역꾸역 누르며 조합원에게 다가간 에일은 바토라 토벌 퀘스트를 완료했다.
잉골 숲의 최소 3인 권장 보스 몬스터를 홀로 잡아냈다고 기록이 되어 있었으니, 의뢰를 완료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돈과 경험치를 독차지할 수 있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퀘스트의 완료와 동시에 레벨 업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를 본 에일은 두 주먹을 쥐었다.
원래 그의 경험치 사정은 보스와 퀘스트를 깨는 것만으로는 1레벨이 오르는 데 그쳤겠지만, 운 좋게 마주친 호구들… 아니, 비슷한 레벨 대의 유저 셋을 잡은 경험치까지 합쳐져 아슬아슬하게 두 번의 레벨업이 가능했다.
그렇다는 말은 곧 이제 대망의 스킬북을 사용할 수 있는 시점이라는 말.
혹시 몰라 적당히 사람이 안 보이는 곳까지 이동한 에일은 인벤토리에서 두 개의 스킬북을 꺼내 들었다.
영롱하게도 보랏빛으로 빛나는 두 개의 책.
“제발……!”
본격적인 개봉에 앞서 에일은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일반 스킬북이라면 굳이 호들갑 떨 것 없이 개봉하고 쿨하게 다음으로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완전히 달랐다.
‘솔직히 이건 아무리 못해도 최소 상급이다……!’
무려 워로드 스킬북의 여섯 단계 중 네 번째 단계를 차지하고 있는 보랏빛 스킬북.
평균적으로만 따져도 상급에서 희귀 사이의 등급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고급 스킬북이었고, 운이 지지리도 없으면 일반 등급이 나오는 식이었다.
희귀의 다음 등급인 영웅 등급 스킬까지도 적은 확률로 노릴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시작부터 희귀 등급 두 개를 세팅하고 갈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이다.
‘자… 간다. 나와라!’
한 차례 크게 심호흡한 에일은 보랏빛 스킬북 위에 손을 얹었고, 그로부터 밝은 빛이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파아앗!
[두터운 피하지방(최하급)]
- 두꺼운 지방층이 미약하게나마 치명적인 상처를 방지합니다.
- 방어력이 14(고정치)만큼 증가합니다.
“아…….”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