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침묵과 함께 (1)
바토라에게 깔려 찌그러졌던 궁수의 시체.
에일은 어김없이 그녀의 목을 나무 위에 매달아 놨다.
활활 타오르던 화형대의 불길은 이미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이제 남은 건 보상을 획득하는 것뿐.
나무 위에서 내려온 그는 쓰러진 바토라에게 다가가 아이템을 루팅했다.
최소 3인 권장 보스 몬스터를 혼자서 쓰러뜨리고 분배할 것 없이 독점하는 것이었으니 각종 장비와 잡템, 골드들이 인벤토리로 우르르 쏟아졌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깔끔한 생김새의 경갑 갑옷 세트.
상하의로 구성되어 있는 2피스짜리 세트 아이템이었다.
등급만으로도 쓸 만한 ‘상급’ 등급의 아이템인 데다가 힘 스탯을 소폭 올려주었고, 세트 옵션도 방어구 중 매우 유용한 편에 속하는 피해량 감소 옵션이 달려 있었다.
물론 일반적으로 방어구 세트라면 장갑과 신발, 모자 부위까지 포함된 5피스 세트가 가장 강력했지만, 고작 한 번의 루팅으로 알맞은 짝이 함께 등장한 것만으로도 만족할 만했다.
에일이 원래 장착하고 있던 일반 등급의 갑옷들보다는 당연히 한층 높은 성능이었다.
세트 아이템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상급 등급인 장갑과 함께 입고 있던 장비를 갈아 치웠다.
장비들을 바꾼다고 직접 훌러덩 벗어가며 갈아입지는 않아도 되니 야외라고 민망할 건 없었다.
‘뭐, 이 정도면 나쁘진 않네.’
아쉽게도 바토라에게서 스킬북이나 희귀급 장비 아이템이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쏟아져 나온 아이템들의 전체 가치를 보아 실망할 만큼은 결코 아니었고, 당장 20레벨에 사용할 스킬북이라면 어차피 지하 던전에서 얻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 들어올 보상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화형대에 묶여 바짝 타버린 베켄과 동료에게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왔다.
아이템 루팅이 가능하다는 표시.
당연히 저걸 내버려 두고 갈 이유는 없었고, 방금 나무에 매달은 궁수의 아이템은 이미 챙긴 지 오래였다.
화형대에 다가간 에일은 알뜰살뜰하게 아이템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들이 장착하고 있던 무기와 방어구, 각종 포션을 비롯한 소지품과 지니고 있던 돈의 일부가 에일의 손으로 고스란히 들어왔다.
깜짝 놀랄 만큼 뛰어난 단일 아이템은 없었지만, 역시나 보스 레이드 다음가는 고수익 컨텐츠가 바로 PK라는 말답게 짭짤한 수입이었다.
바토라를 잡아 얻은 아이템들과 합쳐 경매장과 상점에 내다팔면 당분간 골드 걱정은 크게 없을 듯했다.
하지만 그때, 무심코 획득 목록을 내리려던 에일의 손이 우뚝 멈췄다.
베켄에게서 얻은 전리품 중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물건이 섞여 있었다.
‘이건……?’
인벤토리에서 꺼낸 순백의 깃털을 집자 부드러운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얼핏 보면 재료 아이템으로 생각하기 쉬운 이것의 정체는 ‘비상의 깃털’이라는 이름의 퀘스트 아이템이었다.
저번처럼 뭔가 새로운 퀘스트와 연결해 주는 녀석일 확률이 높았다.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 아이템의 생김새에 흥미가 동한 에일은 재미있다는 듯이 깃털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하지만 당장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고, 깃털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나중으로 미뤘다.
일단 지금은 누군가 이 난장판을 목격하기 전에 상황을 정리한 뒤 자리를 뜨는 게 우선이었다.
에일은 즉시 해체용 칼을 꺼내 들었고, 널브러져 있던 바토라의 사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푹푹!
능숙한 손놀림에 쉴 새 없이 살점들이 갈라지며 부산물들이 하나둘 에일의 인벤토리로 옮겨졌다.
그렇게 별다른 문제없이 아이템들을 모두 챙기고 나자, 해체되고 남게 된 바토라의 지저분한 사체 덩어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리저리 잘리고 나뉘어 조각조각 나 있었지만, 워낙에 녀석의 덩치가 컸다 보니 자연히 남은 흔적 역시 커다랗게 덩어리져 있었다.
수많은 사념체들이 한데 뭉쳐서 만들어진 것이라 그런지 흐물흐물하는 게 마치 각각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모습.
잠시 내려다보며 고민하던 에일은 놈의 흔적들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어디선가 꺼내든 말뚝에 사체 덩어리들을 박아가며 여기저기에 심판의 흔적을 전시해 두었다.
이러는 게 과연 소용 있나 싶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그가 알고 있는 여신이라면 이런 걸 좋아할 것 같았다.
‘으음…….’
에일은 마지막으로 자리를 떠나기 전에 자신의 흔적을 가득히 남긴 사냥터의 처참한 광경을 돌아봤다.
괴물을 죽이고 지나간 사냥터에 하나하나 흔적을 남겨 놓는 일, 분명 이상하게 보인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괴물들의 시체를 보자면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에선 뿌듯한 감정이 들었다.
‘오늘 사냥 알차게 했다……. 약간 이런 느낌이 든단 말이지.’
일이 모두 잘 풀리자 기분이 오른 에일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의뢰를 받았던 도시 켐벨로 향했다.
* * *
“야야, 이거 봐. 후속편 떴다!”
“후속편? 갑자기 무슨 소리야?”
교복을 입고 나란히 길을 걷던 세 명의 학생 무리, 그중 오른쪽에 서 있던 학생이 친구들에게 스마트폰을 들이밀었다.
그곳에 띄워진 화면은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미친 플레이어의 영상.
퀸즈 블론드 한복판에서 유저를 태워 버렸던 무시무시한 빛의 교단 신도에 대한 것이었다.
게임에 한창 관심이 많은 나이인지라 이미 단톡방에서 여러 번 돌려봤던 것이지만, 이번 영상은 그와 달랐다.
그동안 각도만 다르게 여러 번 찍혀서 돌아다니던 퀸즈 블론드의 영상들과는 달리, 이번엔 완전히 새로운 장소에서 촬영된 영상이었다.
뭔가 그와 관련되어 새로운 일이 발생했다는 소리.
실제로 영상은 전과 다른 사건을 담고 있었고, 오히려 그보다 더욱 처참한 광경을 담고 있었다.
그림자가 드리워져 어두침침한 숲과 나무들, 그리고 그를 장식하고 있는 수많은 괴물의 사체.
밧줄에 목이 걸려 축 늘어진 몬스터들의 시체가 나뭇가지 위에 걸려 있었고, 그 외에도 목이 잘리고 작살에 꽂힌 녀석부터 심한 구타의 흔적이 남아 있는 시체와 아예 시체가 조각조각 나뉘어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전시되어 있는 녀석까지 있었다.
“와…….”
공포 영화에나 나올 법한 숲의 비주얼에 학생들은 탄성을 자아냈다.
안 그래도 어둡고 음침한 필드 사냥터에서 저런 짓들을 벌여 놨으니 사진으로만 봐도 소름이 다 끼칠 정도였다.
만약 실제로 워로드를 플레이하다 실수로라도 저곳에 발을 들인다면… 정말 상상도 하기 싫었다.
이번 영상은 이미 자리를 떠나 버렸던 퀸즈 블론드 때와는 다르게 일을 벌인 장본인이 유유히 자리를 뜨는 뒷모습까지 짤막하게 담겨 있었다.
찍은 사람도 겁을 먹은 건지 뒤쫓지는 않았지만, 모습을 감추고 있던 남자의 등장에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느꼈다.
심지어 영상에서 정말 기괴한 분위기를 내고 있는 건 단지 몬스터들의 시체를 전시해 둔 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온갖 기괴한 방법으로 처리한 뒤,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들.
화형대에 묶여 불에 탄 시신엔 저번 사건 때와 똑같이 교단의 심볼이 바닥에 까맣게 타들어가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독약을 마신 몬스터 사체의 경우 더했다.
온몸의 피부 조직이 괴사하여 문신처럼 글귀를 만들어냈고, 여신에 대한 찬양과 성서의 문구들이 온몸에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그 외에도 유저든 몬스터든, 어떤 방식으로 처리했든 간에 섬뜩하기 짝이 없는 식으로 빛의 교단에 대한 흔적을 남겨 두었다.
이토록 세심하고 광기가 느껴지는 행동은 워로드가 등장한 뒤 처음이라는 사람들의 평이 영상의 아래에 빼곡했다.
그동안 나타났던 여러 컨셉 유저들을 거쳐 무덤덤해졌던 사람들조차, 여태껏 보인 적 없는 놀라운 퍼포먼스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냉소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쯤 되면 시선을 끌려는 관심종자가 아니라,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라며 찬양하는 이들까지 속출할 정도였다.
“와, 이거 진짜 대박이다.”
“다음 건 없어?”
친구들이 호들갑을 떨며 그를 재촉했다.
하지만 잉골 숲의 모습을 담은 것은 방금의 영상이 전부였다.
“진심 개멋있어.”
“저게 멋있다고? 이거 완전 미친놈 아냐.”
“게임인데 뭐 어때. 걸어가는 뒷모습 간지 나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급한 카메라 앵글과 겁먹은 촬영자의 숨소리, 시체로 가득한 숲속 풍경과 그사이에 우뚝 서 있던 남자의 뒷모습.
어쩌다 보니 기가 막히게 영상이 뽑혔고 실제 많은 이들이 그 모습에 열광했다.
아직은 박수를 보내는 사람과 기분 나쁘다는 사람이 반반 나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게임 속 이야기인지라 진심으로 질타하는 이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사람이 바로 주변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소름끼치지 않냐? 게임 속에선 저런 짓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밖에서는 멀쩡한 얼굴로 길거리를 같이 걷는다고 상상해 봐.”
“그건 그래.”
쿨럭쿨럭!
그들의 바로 뒤에서 걷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기침을 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남자는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해 그들을 앞질러 지나갔다.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남자의 행동에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그는 옆에 선 친구에게 말했다.
“저 사람 왠지 뒷모습이 닮지 않았냐.”
“갑자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음? 뭐야, 진짜네.”
* * *
“와씨… 저걸 대체 언제 찍은 거야?”
고개를 푹 숙이며 학생들을 지나친 에일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먹을거리가 떨어져 잠시 플레이를 멈추고 장을 보러 나왔을 뿐인데, 설마 길거리에서 자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물론 그가 저번 퀸즈 블론드에서 화제가 된 영상을 못 본 것은 아니었다.
분명 하루 종일 워로드 관련 소식만 들여다보던 전과 달리, 지금은 실제 플레이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느라 그쪽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보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에일은 그럼에도 이동 시간은 물론 사냥 사이의 짧은 휴식 시간에도 틈틈이 새로운 정보나 소문에 대해 챙겨 봤다.
그리고 그런 에일이 퀸즈 블론드 사건처럼 대놓고 유저들 사이에서 돌고 있는 화제를 놓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에일은 지금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다.
언제 숨어서 촬영을 했는지 자신의 떠나는 뒷모습이 고스란히 찍힌 데다가, 그저 잠깐의 관심과 해프닝일 줄만 알았는데 일이 더 커져 버렸다.
처음엔 자신이 벌인 일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커다란 화제가 된 것에 대해 깜짝 놀랐지만, 다음 떡밥이 없는 이상 금방 사그라질 관심으로 보았던 에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새롭게 또 다른 사진들이 공개된 이상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아직 살아 있는 불씨에 땔감을 하나 더 던져준 꼴이 되어 당분간은 관심이 쉽게 꺼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나마 뒷모습만 찍혔지 얼굴이 안 팔린 게 다행이었다.
‘어디 가서 미친놈 취급 안 당하려면 조심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