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7)
“이… 이건 대체.”
베켄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형편없이 쓰러진 그는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상태였고, 그의 옆에 엎어져 있는 파티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둘 모두 전투로 인해 체력이 절반 정도 깎인 상태이기는 했지만, 고작 한 명을 상대로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패배했다.
장비나 레벨이 차이 나는 것도 아니었고, 비겁한 꼼수에 당한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실력, 기본 실력 차이로 인해 결판난 승부였다.
타악!
상대가 빈사 상태에 빠지자 에일은 검을 거뒀다.
그리고 꼼짝도 하고 있지 못하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야 이…! 읍! 우욱! 으읍……!”
스킬을 통해 재갈을 소환해 낸 에일은 먼저 고래고래 소리치려 하던 남자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전후 사정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었다가는 괜히 복잡해지는 수가 있었으니, 이대로 조용하게 처리하는 편이 좋았다.
에일은 다음으로 베켄에게 다가섰다.
그 역시 쓸데없는 소리를 내지 못하게 입을 막으려 했지만, 베켄은 심하게 발버둥 치며 저항했다.
“야 이 XXX야! 감히 나를 건드려? XXXXXX! 여기 박힌 길드 문장 안 보이냐고! XXXXX!”
베켄의 격한 언행에 필터링이 쉼 없이 섞여 나왔다.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실시간 쌍방향 자동 통역을 필두로, 워로드의 다양한 진보적 시스템 중엔 플레이어의 표정과 억양까지 분석해 작동하는 고성능 욕설 필터링 기능 역시 존재했다.
이렇게 대놓고 난리를 치고 있으니 삐 소리가 난무하는 게 당연했다.
에일은 베켄의 상스러운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오히려 베켄의 입을 막으려던 재갈은 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문장이라… 네 소속을 말하는 건가?”
“그래, 이 XXX! 내가 화이트 팽 소속이라고! 넌 이제 죽었……!”
“너희 길드 지금 비상 걸려 있는 건 알고 하는 소리야? 서리불꽃하고 폭음 동굴 건으로 트러블 생긴 것 때문에 한창 뒷수습 중이라 정신도 없을 텐데… 나 같은 녀석 하나 잡으러 다닐 여력이 있다고? 그보다는 정식 길드원도 아닌 네가 징징거리는 걸 들어줄 시간이 있을 지나 의문인데.”
“뭐……?”
베켄은 처음 듣는 소리에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나 참, 아무리 빽으로 이름만 올려 둔 낙하산이라도 그 정도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에일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방금 말한 것들은 허세나 시간 벌이 같은 게 아니었고, 그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뿐이었다.
현재 화이트 팽 길드라면 며칠 전에 서리불꽃 길드와 빚어진 심각한 마찰로 인해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처음엔 우연히 만난 두 길드의 신입 길드원이 보스 몬스터를 사냥하느라 파티를 짠 것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었다.
그들은 무난히 보스를 공략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파티의 사소한 배분 문제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다투기 시작했다.
그러가다 작은 몸싸움까지 하게 되고 문제가 도통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둘은 마침 근처 도시에 있던 자신의 길드원들에게 각자 도움을 요청했다.
그렇게 한자리에 모여 서로 마주치게 된 두 무리의 길드원들.
그들은 처음엔 아무런 감정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다가 결국엔 점점 감정이 격화되어 패싸움까지 벌이게 되었다.
그로 인해 자리에 있던 화이트 팽의 길드원은 모두 죽었고, 비교적 숫자가 많았던 서리불꽃 역시 신입을 포함해 세 명이나 사망하게 되었다.
심지어 여기서 상황이 끝나고 마무리되었다면 그들의 관계는 지금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소식을 접한 화이트 팽의 길드원들이 복수를 한다며 즉각 서리불꽃에게 한 차례 기습을 가했고, 다른 쪽에선 또 기습 사건에 대해 전해들은 서리불꽃의 간부가 우연히 마주친 화이트 팽의 신참 길드원을 PK하는 일까지 벌어져 대체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난감한 총체적 난국이 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져버린 사건으로 인해, 양쪽 모두 감정의 골이 깊게 패여 대화만으로 해결을 보기는 쉽지 않은 상황.
더군다나 이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동급의 체급을 지닌 상대 길드와 이판사판으로 전면전을 시작하게 된다면 한쪽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승리한 쪽조차도 타격을 입어 크게 흔들릴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양측 수뇌부들 간의 협의가 쉴 새 없이 오가고는 있었지만, 자칫하면 언제든지 서로 전면전까지 치달을 수 있는 상황이라 주 전력들을 한데 끌어모아 집중시켜 둔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길드 전체가 이런 상황에 빠져 있는데, 당연히 21레벨짜리 철부지 낙하산의 뒤처리를 해 줄 여력 같은 건 있을 리 없었다.
물론 지금의 이야기가 일반 유저들까지 접할 수 있을 만큼 퍼진 정보는 아니었지만, 무대의 뒤편에선 이미 관련자가 흘린 신빙성 높은 내부 찌라시가 여럿 돌고 있었다.
“웃기지마!! 어디서 그딴 개소리를……! 지금 나 겁주려고 입이나 나불대는 모양인데 여기서 손가락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콰득!
에일이 발로 밟아 손가락 하나를 분질러 버렸다.
그러자 베켄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
고통은 없었지만 게임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느껴 보는 흐물거리는 감각.
언제나 길드의 후광으로 협박만 했지, PVP는 난생 처음으로 경험한 것이었으니 당황해서 말도 잇지 못했다.
길드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도 자신에게 손을 대다니, 이 상황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내가 지금 농담 따먹기나 하자고 이러고 있는 거 같아?”
촤르르륵!
에일의 한쪽 손에 생겨난 법전이 양옆으로 펼쳐졌다.
그리고 낙인이 찍힌 죄인에게 형벌이 선고되었다.
[화형이 선고되었습니다!]
“무… 무슨 짓을……!”
베켄에게도 떠오른 화형 메시지가 선명하게 빛났다.
“주제도 모르면서 인맥 믿고 설치는 너 같은 놈들을 내가 처음 봤을 것 같아? 바닥에 누워서 하는 멘트들도 어찌나 똑같은지. 그런 놈들은 한번 당해 보기 전까지 정신을 못 차리더라고.”
콰드득!
갑자기 화형대가 땅속에서 솟아올라 모습을 드러냈고, 사람 수에 알맞게 양옆에도 하나씩 세워졌다.
그러자 에일은 밧줄을 꺼내 베켄의 몸을 꽁꽁 묶은 뒤 한쪽 화형대로 끌고 갔다.
당황한 베켄은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빈사 상태에 빠진 지금에는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었다.
화형대 위에 그를 매달은 에일은 스킬 ‘성화’를 사용해 자신의 손바닥 위에 작은 불씨를 만들어냈다.
화악!
쌓여 있는 짚단에 던져진 하얀 불꽃은 순식간에 덩치를 불려 맹렬하게 타올랐다.
“사… 살려줘! 잠깐……! 잠깐만!!”
화르르륵!
발 아래로 느껴지는 화끈한 열기에 베켄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광포하게 일렁이는 하얀 불꽃이 서서히 자신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단순히 불꽃이 몸에 붙은 것보다 훨씬 더 공포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애원을 들어줄 에일은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끄아아아악!”
백색의 화염이 화형대와 함께 베켄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하지만 에일은 그저 불이 붙은 그가 비명을 지르게 내버려 둔 뒤, 아직 하나 남아 있던 공범자에게 다가갔다.
“너는 기사 클래스였지? 그러면 조금 더 오래 타겠네.”
“읍… 읍읍!”
재갈에 입이 막혀 있는 남자가 공포에 발버둥 쳤다.
그러나 싸늘한 눈빛의 에일은 그의 한쪽 다리를 붙잡고서 화형대로 끌고 갔다.
그렇게, 남자가 있던 자리엔 질질 끌린 자국만이 남았다.
* * *
콰악!
바토라의 등 위에 기다란 장검이 꽂혔다.
돌진 패턴 후 반동에 걸려 흐물거리고 있던 바토라는 이미 체력이 거의 바닥나 있는 상태인 탓에 반동이 더 오래갔다.
아마 그들이 계속 레이드를 이어 진행했다면 이번이 마지막 패턴이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에일의 손에 들어왔을 뿐, 잘 차려져 있는 밥상에서 편히 누워 받아먹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키이이이익!”
질기기 짝이 없는 보스 몬스터 바토라가 마지막 비명을 지른 뒤,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미 세 명의 플레이어를 잡아 거의 가득 차 있던 에일의 경험치가 쭉 오른 뒤 다음 레벨이 되고도 상당히 경험치가 쌓였다.
최소 3인 권장의 보스를 단독으로 격파해 잡아냄으로서 막대한 양의 경험치가 오른 것이다.
원래 워로드는 마지막 일격만으로 경험치가 한쪽에 쏠리는 시스템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토라의 체력을 대부분 빼놓았던 당사자들이 이미 다 그의 손에 죽어 버렸으니 경험치를 에일이 모조리 독식하게 된 것이다.
“크…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날로 먹어 버렸네.”
분명 처음 바토라를 잡을 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녀석이 보유한 스펙에 비해 공격 패턴 자체는 단순한 편이라 시간을 잡아먹더라도 혼자서 반복 작업 노가다로 격파해 보려 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풀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리를 빼앗았다고 착각한 파티원들이 포션 지출까지 대신 해주며 뼈 빠지게 보스 몬스터를 양념하고 있는 사이에, 에일은 그동안 마음 편히 일반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었으니 훨씬 이득이었다.
거기다 그들을 죽여 얻을 수 있던 스탯과 경험치, 아이템을 생각하면 마침 자신의 앞에 등장해준 호구들이 감사할 정도였다.
[당신의 계획에 감탄한 여신이 즐거운 웃음을 짓습니다.]
[‘빛의 심판자, 루’가 기꺼이 당신을 후원합니다.]
[여신의 총애 +0.41% (현재 54.07%)]
[빛의 교단 공헌도 +150]
‘후……?’
플레이어 셋을 죽인 보상과는 별개로 들어온 공헌도 수치.
생겨난 메시지 창 그대로 ‘루’가 그에게 후원을 해온 것이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줄 수 있을 리는 없고, 자신의 영향력을 소모하며 자신의 사도에게 선물한 것일 터였다.
‘하긴 새삼 놀랄 것도 없나… 지금까지 종종 받아 왔던 게 후원이나 다름없는 것들이었으니까. 그나저나 계속 내 행동에 일일이 반응하는 게, 꼭 인터넷 방송을 보면서 뒹굴거리는 한량 같은 느낌이란 말이야…….’
에일은 무심코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는 루의 모습을 떠올렸다.
워로드 세계 속의 이야기라고는 해도 자신이 따르는 신에게 불경한 생각을 해 버렸다.
그도 그럴게 여신이 자신의 행동을 어디선가 구경하면서 만족할 때마다 후원을 쏘고, 퀘스트를 툭툭 던져주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베켄과 그의 파티원들이 우기면서 자리를 빼앗으려 할 때도 여신은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내 당장 저 무뢰배 녀석들을 죽이자고 난리였고, 모욕을 듣고도 에일이 얌전히 물러났을 때는 메시지 창이 거의 폭주할 정도였다.
그사이에 갑자기 사용할 수 있는 여신의 영향력이 넉넉해진 건가 싶을 정도로 많은 메시지였다.
그리고 조금 뒤에 에일이 시비를 걸었던 양아치들을 모두 불태워 죽이자 격하게 기뻐하는 것도 그렇고, 취향 하나는 확고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게 신경 쓰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시할 수는 없어. 그만큼 얻는 게 많으니까.’
여신이 던져주는 보상은 얼핏 보기엔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자세히 살펴보면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번에 얻은 150포인트, 그리고 저번 금지된 폐허에서 갑자기 내준 즉석 퀘스트만 하더라도 공헌도를 300이나 걸었던 것을 생각하면 알 수 있었다.
획득량을 두 배가량 올려주는 ‘형벌 선고’ 스킬 없이는 이단을 열 번 넘게 잡아도 얻지 못했을 수치.
물론 에일은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만약 베켄의 말을 듣고 지레 겁을 먹어 그대로 자리를 양보하고 물러났다면, 아마 화가 난 여신이 역정을 냈을 것이고 기껏 올려 두었던 총애도 역시 대폭 떨어졌을 것이다.
얼핏 보면 까다로운 시스템이지만, 조건을 맞춰 잘만 이용한다면 더욱 큰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다른 유저는 생각도 못할 큰손이 그의 뒤에 있었고, 에일은 그를 이용하지도 못할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이거 아무래도 니즈를 맞춰 줘야겠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