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6)
드드드!
반동 효과가 끝난 바토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좋은 기회 하나를 아무것도 못 한 채 날려 버린 것이었지만, 방금 보스를 성공적으로 빼앗은 입장인 파티원들에게는 크게 신경 쓰일 만한 부분은 아니었다.
“이제 집중 집중. 다들 준비했던 것부터 마셔 둬.”
베켄의 말에 파티원들은 인벤토리에서 물약들을 꺼내 들었다.
여섯 종류에 달하는 다양한 도핑 포션, 보스전을 앞두고서 원활한 진행을 위해 스탯을 일시적으로 끌어올리는 효과를 가진 것들이었다.
은근히 값이 나가는 녀석들이라 보통의 사냥에 활용했다간 적자가 날 수도 있었지만, 보스 몬스터인 바토라를 잡는 데 성공만 한다면 이 정도 지출은 새발의 피였다.
“키르르륵!”
기운을 차린 바토라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차게 휘둘러진 기다란 한쪽 팔이 그들을 향해 뻗어져 왔다.
쿠웅!
공격을 막아선 것은 방패를 든 남자.
전위를 책임지는 탱커가 놈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 냈고, 그 틈에 훌쩍 물러서 자리를 잡은 궁수는 활시위를 당겼다.
저렇게 커다란 표적이 서 있다면 조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도 없었다.
바토라의 몸에 하나둘 화살이 박히기 시작했고, 탱커가 앞에서 시간을 버는 사이 미리 옆으로 크게 우회한 베켄이 모습을 드러냈다.
콰악!
그의 검이 바토라의 옆구리에 박혔고, 검은 핏줄기가 솟구쳤다.
성공적으로 들어간 일격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녀석의 체력이 큰 폭으로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역시 선천적으로 높은 방어와 체력 스탯으로 생명력이 질기기로 유명한 바토라다웠다.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바토라는 순간 탱커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옆으로 돌려 베켄에게로 향했다.
이렇게 바로 어그로가 끌릴 줄은 몰랐던 베켄은 순간 당황해 잠시 굳었지만, 곧 다리를 놀려 옆으로 몸을 굴릴 수 있었다.
콰과광!
바토라가 팔을 내려친 흔적이 바닥에 움푹 파여 선명하게 남았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그대로 빈사 상태에 빠지거나 사망했을 수도 있던 상황.
“으음?”
베켄이 눈썹을 들썩였다.
한 눈에 알아챌 수 있을 만큼 큰 차이까지는 아니었지만, 보스의 움직임이 원래보다 묘하게 느려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거… 아까 그 녀석 체력만 깎아 둔 게 아니라 둔화까지 걸어 둔 모양인데? 하하하하!”
“뭐? 정말이야?”
“그래, 혹시 또 만나면 잡템이라도 하나 던져 주자고.”
기분이 오른 베켄이 낄낄 웃으며 말했고, 다른 파티원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둔화 효과가 얼마나 갈지는 알 수 없었으나, 처음 마주한 보스의 패턴을 몸에 익히는 동안 도움이 될 건 자명했다.
“역시 뭐든 간에 날로 먹는 게 제일 맛있다니까.”
* * *
“아, 진짜! 또 늦어 버렸네.”
남자가 머리를 감싸 쥐며 분통을 터트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요란한 전투 소리에 파티원들과 함께 달려와 봤지만, 역시나 이미 다른 이들이 바토라와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 리젠 시간에도 보스 몬스터를 놓쳤다는 의미.
옆에서 한숨을 푹 내쉰 팀원은 힘없이 입을 열었다.
“이게 벌써 세 번째야… 그냥 다른 곳으로 가자.”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해 보자. 여기서 바토라만 한 번 잡으면 당분간 장비 걱정은 없다니까?”
“저기요! 여기서 뭐하시는 거죠?”
그때 기척을 느낀 베켄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자 보스를 공략 중이던 베켄의 파티원들도 한마디씩 거들며 나섰다.
“방해하지 말고 다른 데로 가세요!”
“서로 문제 일으키지 맙시다.”
“무슨…….”
갑자기 그들에게 한 소리를 듣게 된 파티원들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예, 예. 안 그래도 갑니다.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왜 저렇게 과민반응을 하는 건지. 나 참.”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린 남자가 먼저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은 베켄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노려보았다.
자기부터가 남의 몫을 빼앗은 날치기범이었으니, 자연히 남들도 그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베이스에 깔려 있었다.
“퉷, 짜증나게 흐름만 끊겼네.”
“야야, 회복 패턴이야! 빨리 끊어!”
그들이 한눈을 판 사이 바토라가 어느새 몸을 웅크리고서 자신의 체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사념이 뭉쳐 만들어진 괴물답게 숲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념들을 자신의 몸으로 흡수해 회복하는 패턴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기껏 힘들게 깎아 놓은 생명력을 다시 회복하지 못하게 막으려면, 놈에게 일정량 이상의 데미지를 넣거나 강력한 상태 이상기를 걸어 버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 레벨에 녀석의 패턴을 캔슬할 만한 스킬이 있을 리가 없었고, 결국 죽도록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젠장, 이거 잘못하다간 적자도 나겠는데.”
한차례 스킬을 퍼부은 베켄이 마나 포션을 들이키며 중얼거렸다.
분명 반복되는 패턴 자체는 단순했다.
하지만 보스의 난이도는 그들의 생각 이상으로 까다로웠고, 이번이 초행인 그들 세 명으로는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싸움이 길어지는 동안 그들이 소모한 포션의 수도 굉장히 많아졌다.
파티에 힐러가 없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이 정도로 싸움이 길어질 줄은 몰랐던 바.
“이제 그만하고 죽어라 좀!”
푸욱!
몸이 축축 처지고 지쳐갈 무렵 베켄의 일격이 바토라에게 꽂혔고, 그와 동시에 녀석의 회복이 풀렸다.
상태창으로 확인되는 놈의 체력은 이제 4퍼센트 남짓.
보스의 체력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 회복을 무사히 풀어낸 것은 분명한 호재였다.
그때 몸을 일으켜 세운 바토라가 두 팔을 힘껏 내리찍었고, 커다란 충격파가 발생했다.
쿠우웅!
“으아악!”
주변을 휩쓴 충격파는 주변에 있던 파티원들을 날려 버렸다.
바토라의 앞을 막은 채 가장 가까이 있던 탱커는 제일 멀리 날아가 버렸고, 가장 멀찍이서 화살을 쏘고 있던 궁수는 오히려 보스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떨어지게 되었다.
기껏 잡아 놓은 포지션이 거꾸로 되어 버린 상황.
“날아갈 때마다 기분 더럽네, 젠장!”
한바탕 바닥을 구른 베켄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바토라가 노리고 있는 궁수를 구출하러 달렸다.
비교적 몸놀림이 빠른 검사직을 가진 베켄이 먼저 궁수를 빼낸 뒤 시간을 끌었고, 그사이에 기사 클래스의 탱커가 도착했다.
그렇게 무사히 위기를 넘긴 그들은 다시 정상적인 포지션을 잡았다.
정면에 선 단단한 탱커가 보스 몬스터의 시선을 끌고, 빠른 움직임과 데미지에 치중되어 있는 검사는 교란과 딜링을, 그리고 후방의 궁수는 끊임없이 화살을 쏘아 보내 체력을 깎는다.
“3퍼센트!”
상태창에 표기된 보스 몬스터, 바토라의 체력이 3퍼센트 대에 들어섰다.
정말 1퍼센트를 깎는 데만 해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때, 점점 지쳐가던 그들에게 한 가지 호재가 들려왔다.
“키이이이익!”
“돌진이다!”
막바지에 다다른 바토라의 다음 선택은 돌진.
녀석이 취하는 특유의 모션으로 보아 확실했다.
그리고 돌진이라면 시전 후 필연적으로 반동이 뒤따라오는 패턴이었다.
지금 남은 3퍼센트 대의 체력이라면 반동으로 인한 스턴이 유지되는 사이에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수치였고, 이제 이것만 잘 피해내면 더 이상 시간을 소모할 필요 없이 끝을 낼 수 있는 것이었다.
한껏 웅크린 사념 덩어리의 몸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베켄은 유심히 지켜보았다.
징조를 놓치지만 않는다면 놈이 향할 방향을 미리 읽을 수 있었다.
“지금이야 피해!”
돌진의 방향이 정해졌을 때 베켄이 크게 외쳤다.
경로만 미리 예측한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고, 동료들은 그의 구호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빠악!
어디선가 날아온 돌멩이가 궁수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데미지 자체는 미미했지만, 몸을 날리려고 했던 궁수는 순간 균형이 무너져 앞으로 엎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과 다르게 무사히 몸을 피하는 데 성공한 다른 파티원들과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교차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많은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
콰드드득!
돌진한 바토라에게 깔려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궁수는 당연히 어떻게 해 볼 것도 없이 즉사했다.
다른 파티원들은 순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한쪽 구석에 엉망으로 찌그러져 있는 궁수의 모습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뭐… 뭣?”
“대체 어떤 미친놈이야! 당장 나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방해로 파티원이 사망하자 베켄이 소리쳤다.
방금 날아온 돌멩이만 아니었어도 누군가 죽는 일없이 깔끔하게 보스 공략을 마쳤을 텐데, 당연히 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나오라고! XXX!”
잠시 뜸을 들이자 베켄이 다시 한번 고래고래 외쳤다.
그러자 한 남자가 그들의 바로 옆에 서 있던 커다란 나무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대체 언제부터 저 위에 있었던 건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그들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너… 이 새끼가……!”
에일을 알아본 베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바토라를 빼앗은 데에 앙심을 품고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이런 XX, 꼴에 자존심 상했다 이거지? 이거 뒷감당할 수 있을 거 같냐? 감히 이딴 식으로 뒤통수를 쳐? 길드에 연락해서 척살 명단에 올려 버리면 넌 이제 이 게임 영원히 발도 못 들이는……!”
“너 이단.”
“뭐……?”
대뜸 손가락을 앞으로 뻗으며 자신을 가리키는 에일의 행동에 베켄은 잠시 벙찌며 반응했다.
상대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자, 에일은 웃음을 터트리며 장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친절하게도 그들에게 다시 또박또박 말해 줬다.“너희, 이단이라고.”
파칭!
살벌한 이단의 낙인이 파티원들의 머리 위에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