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4)
“잠깐만… 이쪽이 아닌가.”
사냥터 들어온 한 유저가 진땀을 흘리며 길을 헤맸다.
커다란 지도를 손에 든 채 열심히 읽고 있기는 했지만, 높고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나무들과 전체적으로 어두운 공간 때문에 영 방향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워로드의 모험과 지도를 읽는 법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자들이라면 길을 잃기 딱 좋은 지형이었다.
“으, 진짜 분위기가 왜 이렇게 음침해.”
남자가 질색하며 말했다.
호기심에 스스로 잉골 숲으로 발을 들인 그였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한시라도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꺼림칙한 검은 기운을 풀풀 풍기는 땅과 나무들, 그리고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낸 흐물거리는 괴물들로 가득 차 있는 공간.
이런 데서 자리를 잡고 사냥하다간 시스템의 정신 보정도 뚫고서 우울증에 걸려 버릴 것이라는 게 그의 감상이었다.
워로드에 끝내주게 멋진 풍경의 사냥터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이런 끔찍한 곳에서 자청해 사냥을 하고 있는 건지.
아무리 넓게 쓸 수 있는 사냥터가 좋다고 해도, 이런 곳에서 죽치고 돌아다니는 건 그의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
숲을 빠져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던 도중, 남자의 몸이 순간 굳었다.
나뭇가지 위에 무언가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던 탓이었다.
길게 늘어진 밧줄에 목이 매여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괴물의 시체들.
뚝뚝.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몬스터들에게서 핏물이 떨어져 내렸고, 남자의 한쪽 뺨도 붉은 핏방울에 적셔졌다.
“히이이익!”
기겁한 남자가 허둥지둥 뒷걸음질 쳤다.
오싹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급하게 물러나던 그는 무언가에 발이 걸려 균형을 잃었고, 그대로 벌러덩 뒤로 넘어갔다.
“으그극…….”
손 쓸 새도 없이 콰당 넘어진 남자는 약간의 충격에 머리를 붙잡고 일어섰다.
하지만 그는 시선을 돌리자 더한 것들을 마주해야만 했다.
판자 위에 주르륵 늘어져 있는 사념체들의 잘린 목, 그리고 그 바로 옆엔 커다란 꼬챙이에 몸이 관통되어 전시되듯 꽂혀 있는 몬스터들도 있었다.
어느새 덜덜 떨리고 있는 남자의 팔.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는 자신의 다리에 걸린 물체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힘겹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의 엉덩이 아래엔 눈이 뒤집힌 채 정체모를 새까만 액체를 입으로 질질 흘리고 있는 사념체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끄아아아악!”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 * *
[‘빛의 심판자, 루’가 당신의 행보에 흡족함을 표합니다.]
“음? 뭐지……?”
갑자기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에 에일이 당혹스럽게 쳐다봤다.
잠시 허기를 채우며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는데, 여태 소식 하나 없던 여신의 메시지가 뜬금없이 나타났다.
메시지뿐 아니라 공헌도까지 소폭 올라간 것을 보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경우는 결코 아니었다.
차라리 몬스터를 사냥 중일 때 보내 왔으면 모를까 황당할 따름이었다.
‘갑자기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
영문을 모르겠는 에일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지금 눈치 채지는 못했지만, 이번 메시지는 에일의 직접적인 행동에만 관련되어 있는 게 아니었다.
에일이 곳곳에 남긴 집행의 흔적들.
그 무시무시한 모습들이 다른 유저들에게 고스란히 보였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었다.
두려움과 경외심 또한 빛과 정의의 신인 ‘루’의 입장에서 절대적인 선이 지켜지는 데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였고, 에일이 벌이는 기행들은 여신의 영향력을 늘려주는 행동이기도 했다.
괜히 그가 벌이고 있는 반복 작업이 보너스 스탯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 딱딱한 빵 조각을 삼킨 에일은 다시 사냥을 시작했다.
딱히 마땅한 해답이 떠오르지는 않는 데다가, 식사도 끝났는데 느긋하게 쉬고 있을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불리한 출발선에서 시작한 후발 주자라면 앞선 이들을 따라잡기 위해서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에일은 어김없이 계속해서 쓰러뜨린 몬스터들을 주렁주렁 목을 매달았고, 숲속을 거의 몬스터 시체로 가득 채우려는 수준으로 반복하며 도배를 하고 있었다.
“역시 쉽게 오르지는 않네.”
도중에 경험치 바를 확인한 에일이 중얼거렸다.
잉골 숲에서 들어선 뒤, 사념분쇄자라는 칭호가 생겨났을 정도로 굉장히 많은 수의 몬스터들을 잡았지만 레벨업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획득한 경험치로 이제 막 후반부에 접어들었을 뿐이었다.
비교적 레벨업이 쉬웠던 초반 단계는 이미 거의 지나갔고, 이제 레벨업 한 번이 심히 어려워질 구간에 들어섰으니 예상은 했던 부분이었다.
이미 1년을 넘게 플레이한 랭커들조차도 200레벨을 겨우 넘어섰을 뿐이었다.
거기다 실력에 따른 격차 차이가 큰 편인 워로드인지라 평범한 유저들 사이에서는 100레벨만 넘겨도 고수 취급을 받고 있었으니, 아무리 사냥터에 죽치고 앉아 있다고 해도 하루에 몇 레벨씩 치고 올라갈 만한 견적은 나오지 않았다.
특히 위험성이 있는 고난도 던전을 돌파하는 것과 낮은 난이도의 일반 몬스터들을 반복 사냥하는 것과의 차이는 상당히 컸다.
에일은 일반 사냥터를 돌고 있는 것치고는 굉장히 빠른 편이었다.
사냥 난이도가 전체적으로 상당히 높은 워로드에서는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몬스터를 사냥하더라도, 유저가 가진 실력과 집중력에 따라 동일한 시간 내에 잡을 수 있는 숫자가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에 벌어지는 차이였다.
‘확실히 일반 몹 사냥만으로는 너무 느려. 물론 나는 스탯 작업까지 곁들이고 있으니 계속 이러고 있어도 크게 손해 볼 건 없지만… 그것만으로 랭커들을 제때 따라잡기는 무리인 것 같고, 결국 핵심은 보스 몬스터겠군.’
일반 몬스터들을 잡아가며 스탯을 어느 정도 충당하고 있는 에일이었지만, 결국에 그가 이곳에서 노리는 것은 보스 몬스터인 사념의 덩어리, 바토라였다.
결국 남들보다 월등하게 앞서나가려면 높은 리스크를 감내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모든 유저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고, 또 에일이라고 한들 언제나 높은 난이도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많은 보상에 눈이 먼 많은 유저들이 간과하곤 했지만, 워로드의 데스 페널티 탓에 어떻게든 죽지 않는 것 또한 성장 속도를 정하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어려운 던전을 여러 차례 돌파하면서 줄곧 앞서 나가다 한 번이라도 죽게 된다면 결국 모두 말짱 도루묵이었다.
페널티 시간만 이틀에 레벨다운, 잃어버린 장비까지 생각하면 다시 복구하는 데까지 시간적으로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빠른 성장을 위해서라면 유저는 자신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적당한 선에서 난이도를 골라가며 줄타기를 잘해야 했다.
단순히 전투 능력뿐 아니라, 머리를 굴려 앞서 나갈 수 있는 육성 전략을 제대로 짜는 것 또한 워로드에서 말하는 중요한 ‘실력’ 중 하나라는 사실.
이렇듯 워로드는 똑같은 시간을 투자하더라도 실력에 따른 효율 차이가 굉장히 큰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효율 상위 등급의 던전들은 존재 자체만으로 중요해 해당 지역의 패권 길드들이 통제하는 것이었고, 이만큼 많은 자유도를 지닌 가상현실게임이라면 대부분 겪는 현상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슬슬 리젠될 시간인데…….’
시간을 확인한 에일이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잉골 숲에 입장하고 나서 벌써 네 번째 리젠이 이루어질 차례였고, 가급적이면 다섯 번째 리젠 안에 해결을 보고 싶었다.
처음 계획대로라면 오늘 안에는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었으나, 역시나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경쟁도 꽤나 있는 편이라 경로를 치밀하게 짜둔다고 해도 결국엔 운이 따라줘야 했다.
쿠구구…….
초조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던 에일이 아주 미세한 소리를 포착했다.
눈을 번쩍 뜬 에일은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이건 일반 사념체들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들려온 소리가 워낙 작아 정확한 방향까지 알아채기는 쉽지 않았지만, 에일은 주어진 단서로만 위치를 가늠할 필요가 없었다.
바토라가 나타날 수많은 지점 중에서 이 근방에 있는 곳은 오직 하나뿐.
“찾았다……!”
괴물의 앞에 선 에일이 외쳤다.
땅에서 흘러나오는 사념들이 한데 뭉치고 있는 모습.
기괴한 생김새의 검은 생명체는 빠르게 형체를 갖추고 있는 중이었고, 기다란 몸통에 여덟 개의 다리, 그리고 머리와 상체가 생겨나고 있었다.
음산한 숲 배경과 합쳐져 커다란 덩치를 뽐내고 있는 녀석은 심히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드러내며 유저들을 기죽게 만들었다.
하지만 홀로 녀석의 앞에 선 에일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오히려 기쁨으로 가득 차있었다.
보스 몬스터가 새롭게 등장했음에도 아직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유저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보다 먼저 발견한 이상 이번 보스를 레이드할 권리는 오로지 자신에게 있다는 것.
이단의 징표는 굳이 스킬을 사용할 것도 없이 이미 녀석의 머리 위에 찍혀 있었고, 에일은 말없이 씩 웃으며 검을 집어 들었다.
망설일 것 없이 바로 공략 시작이었다.
* * *
“저쪽이야!”
부리나케 수풀을 헤치며 달리고 있는 세 명의 플레이어.
어렴풋이 들렸던 바토라의 소리를 듣고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라면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매우 가까운 위치에 생겨났다는 것이었고, 녀석만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던 그들에게는 분명히 행운이 따라 준 상황.
하지만 정작 그들이 다가서자, 바토라가 있는 곳에는 이미 다른 유저가 서 있었다.
“뭐야? 사람이 있잖아!”
“아… 중간에 길만 안 헤맸어도 먼저 도착할 수 있었는데… 열 받네 진짜.”
이번만큼은 자신들의 차지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결국 한발 늦어 버렸다.
기대에 부풀었던 만큼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 몬스터들 진짜 징그러워서 빨리 좀 나가고 싶은데… 하아.”
활을 들춰 맨 여자가 한숨을 푹 내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옆에 선 두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지만, 빨리 잉골 숲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보스 리젠을 기다리는 것도 점점 지쳐갔고, 이런 우중충한 공간에 오래 있다 보니 기분까지 절로 가라앉았다.
심지어 한번은 짜증나는 정예 몬스터 탓에 죽을 뻔하기도 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자니 지금까지 들인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이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미치겠네.”
“젠장,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한 명한테 뺏겨서 이게 대체 뭐냐… 음? 잠깐, 한 명이라고?”
남자가 한 차례 눈을 비비더니 전방을 똑바로 바라봤다.
저 앞에서 바토라를 상대하고 있는 모습을 자세히 보니, 고작 검사 한 명이서 거체의 괴물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레벨이 높아 보인다거나 아이템이 특출해 보이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표시인 길드 마크가 없었다.
그 말인즉슨 건드려도 아무런 탈이 없는 녀석이라는 것.
“이봐, 다들 레이드 준비나 해 둬.”
남자의 입꼬리가 길게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