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2)
“키이이이익!”
날카로운 비명이 귀를 찔렀다.
인간의 형상을 어렴풋이 흉내 낸 듯한 검은 사념체들이 저 앞에서 달려오는 중이었고, 놈들의 앞에 선 에일은 힘껏 검을 휘둘렀다.
화르르륵!
가장 앞서 달려온 녀석의 몸뚱이를 베어 가름과 동시에, 장검에 붙어 있던 하얀 불꽃이 놈들을 휩쓸었다.
언데드와 악속성을 동시에 지닌 놈들은 화속성과 성속성이 부여된 에일의 검과 불꽃에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었다.
콰득!
현재 에일이 한창 바쁘게 사냥 중인 이곳은 17레벨 대의 사냥터인 잉골 숲이었다.
블랑쉬 고원의 경계에 위치한 검은빛으로 가득 찬 숲.
썩어 가는 사념체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이곳은 몬스터들의 기괴한 생김새 탓에 기피 사냥터로 찍힌 곳이었다.
마치 유령처럼 스산한 기운을 내뿜으며 다니는 녀석들은 흐물흐물하는 게 딱 질색이라는 의견을 많이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의견일 뿐, 모두가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도 겁을 상실한 수준 아니냐는 소리를 듣는 에일에게는 전혀 개의치 않은 부분이었으니 오히려 좋은 부분이었다.
경쟁자가 적으면 더 쾌적한 환경이 만들어지고, 쾌적한 환경에서의 사냥은 더 빠른 레벨업을 불러온다.
콰악!
끝까지 달려들던 마지막 사념체를 벤 에일은 축 늘어져 몸을 기대려는 녀석을 옆으로 내동댕이쳤다.
“크, 살살 녹아내리네.”
자신의 데미지에 취한 에일이 중얼거렸다.
이단심판관 직업을 부여받기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긴 했지만, 악한 계열의 몬스터들을 때려잡기엔 정말 최적화된 직업이었다.
거기에 전투 관련 스탯들을 모두 뻥튀기시켜주는 루의 축복과 사도 전용 스탯인 광기 스탯까지 있으니 사냥 효율이 펑펑 올라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실수로 여기까지 와 버렸어.’
지도를 확인한 에일은 자신이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몬스터를 잡으며 신을 내다가 원래 정한 사냥 루트를 벗어나 버렸다.
지금은 사냥을 열중하고 있지만 그의 주목적은 어디까지나 보스 몬스터인 바토라였고, 녀석과 가장 먼저 마주치기 위한 동선에 충실해야만 했다.
어차피 사람도 없는 거 그냥 가서 사냥하면 안 되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유저들이 피하는 기피 대상 중에 바토라만큼은 예외였다.
이유는 바로 바토라가 드랍하는 아이템들의 목록.
녀석을 쓰러뜨리면 상당히 좋은 장비 아이템을 주는 경우가 많아, 이런 사냥터에 들어오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고도 많이들 찾아올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그 탓에 외면받는 일반 몬스터들과 달리, 이곳에 들어와 보스만 여러 차례 사냥하고 떠나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고, 유저들 간의 경쟁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숲의 사념들이 뭉쳐 만들어지는 보스의 특성상, 바토라의 리젠은 한번 쓰러진 뒤 3시간가량이 걸렸고 유저들의 수요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평소엔 널널한 사냥이 가능하면서도 유저들 간의 마찰이 많이 빚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확실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지.’
에일은 주위를 둘러보면서도 계속해서 위치를 확인했다.
이렇게 넓은 사냥터에서 랜덤으로 생성되는 보스 몬스터의 경우, 먼저 녀석을 발견해 공격하는 쪽이 차지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 경쟁이 불가능할 만큼 좁은 사냥터거나, 길드 단위로 경쟁하는 보스의 경우 분란을 막기 위해 순번을 뽑아 순서를 결정하기도 했지만, 이곳은 해당되지 않았다.
즉, 먼저 녀석을 발견하는 쪽이 임자라는 것.
아무 생각 없이 사냥하면서 보스 몬스터와 마주하기를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에일은이미 다른 유저가 쌓아 둔 잉골 숲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었다.
그를 이용해 보스가 나타날 만한 위치와 움직일 동선을 계산할 수 있었고, 최대한 마주칠 가능성이 높은 장소를 위주로 움직이며 사냥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여신은 아직까지 말이 없네.’
다음 지점으로 이동하던 중, 에일은 문득 빛의 여신 ‘루’가 생각났다.
저번에 메시지를 보낸 이후로 그녀는 한 번도 에일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금지된 폐허에서 유저들과 시비가 걸렸을 때처럼, 중간에 퀘스트라도 하나 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직까지도 잠잠한 여신이었다.
‘메시지를 보낼 영향력도 아까운 건가.’
사도를 임명하느라 가지고 있던 영향력을 몽땅 자신에게 쏟아 부었다고 하니 이해하지 못할 건 없었다.
아마 자신을 비롯한 빛의 교단 소속의 신도들이 다시 최대한 활발히 활동해야 ‘루’에게 영향력이 쌓일 것이고 그러고 난 뒤에야 비교적 자유롭게 이쪽 세상에 개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으아아악!”
걷고 있던 에일의 오른편에서 갑자기 비명이 울려 퍼졌다.
잉골 숲은 NPC가 존재하지 않았고, 몬스터인 사념체들은 저런 소리를 낼 수 없었으니 사냥 중인 유저의 소리인 것이 분명했다.
에일은 주저하지 않고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짐작은 가지 않더라도 빠르게 상황 파악을 하는 게 우선이었다.
기다리던 보스가 나타난 것일 수도 있고, 악질 PK 유저 같은 위험한 변수가 생긴 것일 수도 있었다.
비명이 들린 장소에 도착한 에일이 수풀을 헤치고 나왔다.
그리고 눈앞에 일어난 사건을 목격하고는 자리에 멈춰 섰다.
“이건…….”
세 명이나 되는 파티가 전멸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에일이 구해 볼 여지도 없이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된 상태였다.
“크르르…….”
시체의 위에 서 있던 사념체 한 마리가 낮게 울었다.
고개를 돌리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은 다른 검은색 사념체들과는 달리 온몸이 새파란 빛으로 감싸져 있었다.
‘엘리트 몬스터였군.’
단번에 놈의 정체를 간파한 에일은 당황하지 않고 검을 치켜들었다.
엘리트 몬스터, 돌연변이 혹은 정예 몬스터라고도 불리는 녀석은 일반 몬스터보단 훨씬 강하지만 보스로는 취급받지는 못하는 몬스터 종이었다.
녀석들은 사냥터마다 드물게 등장하며 준보스 격의 취급을 받고는 했는데, 보통은 사냥터에 출몰하는 몬스터와 비슷한 생김새를 지닌 데다가, 일반 몬스터들의 틈에 섞여 놈들과 함께 달려들기도 했다.
즉,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 미리 경계할 수 있는 보스 몬스터와는 경우가 다르다는 말이었고, 운이 나쁘면 방심한 사이에 재수 없게 죽기 딱 좋은 인카운터였다.
유저들 옆에 널브러진 검은 사념체들의 모습으로 보아 이들 파티도 일반 몬스터들까지는 잡아냈지만, 정예 몬스터를 일찍 눈치 채지 못했다가 당한 것으로 보였다.
[‘벨루그’의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갑니다!]
[디버프, ‘위축’ 상태에 빠집니다!]
[디버프, ‘심한 위축’ 상태에 빠집니다!]
잉골 숲의 엘리트 몬스터, 벨루그.
녀석의 존재가 잉골 숲이 기피되는 사냥터가 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당장 들어온 디버프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상대하기 여러모로 까다로운 녀석이었다.
이 일대 사냥터에서 유일하게 물리 공격에 대해 20퍼센트 수준의 내성을 지니고 있었고, 눈에 띄게 빠른 속도와 짜증나는 패턴까지 갖추고 있었다.
물론 가하르가 가지고 있던 엄청난 수준의 물리 내성에 비해서는 당연히 미치지 못했지만 지금 레벨 대에 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짜증나는 녀석이었고, 계속해서 심한 위축 디버프를 걸어대는 통에 원래의 컨디션으로 전투를 치를 수도 없었다.
만약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던 중에 재수 없게 동선이 겹쳐 마주하게 된다면 어지간해서는 전멸을 피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에일도 차라리 녀석을 지금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지.’
무엇보다 놈을 상대하는데 있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엄청나게 짠 보상이었다.
까다로운 난이도에 비해 얻을 수 있는 경험치가 눈에 띄게 적었고, 아이템까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벨루그를 아무리 많이 잡아 본다 한들 정말 눈곱만 한 확률에 당첨된 것이 아니라면 제대로 된 보상을 내뱉질 않았다.
이 근방의 유저들 사이에서는 대놓고 보스 공략을 망치러 나오는 방해꾼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에일만큼은 그들과 달랐다.
오히려 눈앞에 등장한 정예 몬스터에 쌍수를 벌려 환영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유야 간단했다.
첫째는 다른 유저들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시작한다는 것.
[스킬, ‘광적인 순교자’의 효과로 상태 이상 효과가 무효화됩니다!]
[디버프, ‘위축’이 해제되었습니다!]
[디버프, ‘심한 위축’이 해제되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훌륭한 스탯 공급원이 그의 앞에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스킬, ‘이단 지정’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패시브, ‘증오의 칼날’이 발동됩니다!]
[이단을 상대로 한 모든 데미지가 25% 증가합니다!]
벨루그의 머리 위에 생겨난 이단의 낙인.
원래 보스 몬스터에게만 해당되는 사안일 뿐, 대부분의 정예 몬스터에게는 이단의 표식이 찍히지 않았는데, ‘사도’의 지위를 가진 에일은 정예 몬스터라도 이단으로 지정하는 것이 가능했다.
즉, 녀석을 잡으면 여타 보스 몬스터를 잡는 것처럼 전용 스탯들을 올릴 수 있다는 것.
카가가각!
푸른빛의 사념체가 휘두른 손톱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나무껍질을 튀기며 기둥에 강렬한 흔적을 남겼다.
에일은 그 순간 녀석의 빈틈을 찌르려 했지만, 사념체의 몸이 한 차례 꿈틀거리며 요동치더니 순식간에 바라보던 방향이 틀어졌다.
그 탓에 옆구리를 노리던 에일의 장검은 간단히 막혀 버렸고, 녀석은 연달아 팔을 뻗으며 압박해 왔다.
변칙적이고 재빠른 연격.
하지만 에일이 벨루그의 공격을 흘려가며 뒤로 차분히 물러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역극 스킬을 발동했다.
순식간에 뒤를 돈 에일은 힘껏 검을 뻗어 녀석의 등에 일격을 먹였다.
콰악!
사념체의 등에 꽂힌 에일의 장검이 반대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키이이이익!”
하얀 불꽃에 휩싸인 사념체가 발광하며 몸을 비틀었다.
물리 공격에 대해 20퍼센트가량의 내성은 지니고 있었지만, 정통으로 들어간 일격인 데다가 검에 부여된 성화는 내성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거기에 부여된 속성에 따른 추가 데미지를 받았고, 몸에 붙은 화염으로 인해 지속적인 화상 데미지는 덤이었다.
성화로 인한 ‘화상’ 상태가 유지되는 시간은 불과 5초.
분명 엘리트 몬스터쯤 되는 녀석에게 치명적일 만큼 긴 시간은 아니었다.
녀석의 살갗을 한차례 태운 불꽃은 시간이 지나자 사그라졌지만, 그럼에도 놈의 체력은 아직 넉넉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불꽃이 사그라들자마자 또다시 에일의 공격이 녀석에게 적중했고, 화상 상태는 다시 한번 이어졌다.
“키에에엑!”
썩은 살점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또다시 불꽃에 휩싸인 벨루그는 분노를 터트리며 불이 붙어 있는 팔을 마구 휘둘렀지만, 에일은 훌쩍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벨루그를 화상 상태로 만들어 놓고, 막상 적극적으로 붙어서 싸우지는 않는 모습.
녀석이 가진 특수 패턴의 발동 조건이 녀석과 가까이 오래 붙어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까다로운 패턴이 있다면 아예 발동시키지 않으면 그만. 이제 천천히 요리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