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1)
쌀쌀한 새벽 공기가 가라앉아 있는 공원, 후드를 뒤집어쓴 우진이 가쁜 숨을 내쉬며 그사이를 달리고 있었다.
찬바람을 맞아가며 조깅 중인 우진은 게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며 시작한 새벽 운동을 하루도 빠짐없이 하고 있었고, 오늘도 언제나처럼 일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아직 젊다고는 해도 며칠 밤을 새도 팔팔하던 어릴 때만큼은 아니었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다간 몸 상하기 딱 좋았으니 기본적인 체력을 기르기 위함이었다.
물론 정말 딱 건강을 유지할 기본적인 체력을 기를 뿐, 운동에 그 이상을 더 투자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현실에서 운동을 잘한다고 가상현실 속에서도 몸을 잘 쓰게 될 리는 없었고, 선수로 뛸 게 아닌 이상 필요 없는 일이었다.
간혹 떠도는 헛소문 같은 걸 믿고 각종 무술을 배우고 다니는 플레이어도 종종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하나같이 아무 소득도 없는 희대의 뻘짓이었다.
어차피 가상현실게임에서는 모든 플레이어가 시스템으로 보정을 받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실제 운동 능력은 아무런 차이를 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몸을 쓰는 약간의 감각 정도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 정도야 전투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초보자 딱지를 뗄 정도만 되더라도 의미가 없어지는 부분이었다.
만약 강해지는 것이 목적이라면 현실에서 검도 같은 걸 배울 시간에 게임 속에서 몬스터에게 검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르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읏차……!”
정해 놨던 루트를 모두 돈 우진이 벤치에 앉았다.
원래 가지고 있던 그의 기준에서는 그리 오래 뛴 것도 아니었는데,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정말 전보다 체력이 많이 죽었구나.”
고개를 저은 우진이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과거 돈이 급해 한창 건설 현장과 상하차를 전전할 때보단 확실히 체력이 줄은 게 느껴졌다.
몇 달 전부터는 편의점 알바 외에는 다른 일을 하지 않았고, 따로 운동을 병행한 것도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예전엔 미세먼지가 그렇게 심했다는데 어떻게 살았을까 정말.”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던 우진이 중얼거렸다.
그가 태어났을 적만 해도 미세먼지 때문에 사람들이 굉장히 고생했다는데, 보이지도 않는 먼지가 둥둥 떠다니며 시뿌연 하늘이 자리 잡고 있었을 걸 생각하자니,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지금이야 가상현실도 뚝딱 만들어 내는 세상이라 다행이지, 만약 여태 해결책이 안 나왔다면 일일이 마스크를 챙겨 가며 외출하거나 그것조차도 무서워 집안에 꽁꽁 틀어박혀 있어야 했을 것이다.
“정말 생각만 해도 화가… 음, 내가 갑자기 이 생각을 왜 했지?”
머리를 긁적인 우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왼팔에 차여진 손목시계를 확인하자 어느새 게임에 접속해야 할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턱걸이 5세트만 치고 들어가자.”
* * *
촤아아악!
접속기에 들어선 우진, 아니 에일의 눈앞에 세상이 재구성되어 펼쳐졌다.
게임 입장한 에일은 잠시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로의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있는 모습.
어제 퀘스트를 마무리 짓고서 안전지대에 들어선 뒤 로그아웃을 했었는데, 별다른 문제없이 그 위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블랑쉬 고원에 위치한 소규모 도시, 켐벨.
에일이 파고들었던 지하 유적지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조그만 도시였는데, 워로드 내에서 작은 편에 속하는 퀸즈 블론드의 삼분의 일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있을 건 모두 있기에 엄연한 ‘도시’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었고, 에일이 향하는 경매장 역시 도시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었다.
[‘켐벨’의 아이템 거래소에 진입하셨습니다.]
- 거래소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 현재 켐벨 도시는 ‘나이트메어’ 길드의 관할에 있습니다.
- 일반 수수료 10%와 길드 세율 5%가 부과됩니다.
경매장 내부로 들어가자 어김없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북적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에일은 거래소 창을 띄웠고, 등록해 두었던 자신의 거래 물품을 확인했다.
경매장에 올려 둔 상급 약초재는 모두 설정해 둔 가격에 팔려 있었고, 제법 짭짤한 액수의 금액이 에일의 손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수중에 들어온 돈을 합쳐 에일의 소지금은 총 6골드 50실링이었다.
레벨이 고작 18밖에 되지 않는 데다가 부수적으로 수입이 나올 생활 컨텐츠에 일절 손을 대지 않은 걸 생각하면 굉장한 금액이었다.
제법 넉넉하게 장비를 맞출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상황.
하지만 에일은 더 이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을 휘저어 거래소 창을 닫았다.
지금은 쇼핑할 때가 아니라, 일단 20레벨까지 올리는 게 급선무였다.
상위 등급 스킬의 존재는 플레이어의 전력을 첨예하게 달라지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였으니, 두 개나 얻은 보랏빛 스킬북을 사용할 수 있게끔 스킬 개수 제한을 푸는 데 집중해야 했다.
‘이 시점에 잘만 나와 주면 정말 앞날이 창창할 텐데…….’
스킬북에 대해 떠올리자 에일은 또다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치 못하며 기대에 부풀었다.
하얀색, 주홍색, 붉은색, 보라색, 검은색, 황금색 순으로 등급이 정해지는 스킬북 체계에서 무려 네 번째 단계를 차지하고 있는 스킬북이었으니 많은 기대를 품는 것도 당연했다.
대개 일반 등급의 스킬을 채워 넣는 것도 힘든 초반 단계에서부터 희귀급 스킬만큼 높은 등급의 스킬들을 주르륵 깔아 놓고 간다면 이미 육성은 반쯤 성공한 상태나 다름없었다.
‘20레벨 때 잘 나와 주길 기도하는 수밖에…….’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에일은 곧장 발걸음을 재촉했다.
스킬북 오픈이야 어차피 나중의 일이고, 지금은 서둘러 레벨을 올릴 궁리를 할 때였다.
경험치를 쌓고 레벨을 올리기 위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방법은 당연히 사냥.
하지만 아무래도 단순히 사냥만 주구장창 파고드는 것보단, 효율성 있게 퀘스트와 병행하는 편이 좋았다.
다만 그 효율 좋은 퀘스트라는 게 찾기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과거의 평범한 온라인 게임에서라면 좋은 퀘스트가 없는지 공략집을 찾아보면 다 나와 있었고, 그중에 마음에 드는 의뢰로 골라잡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퀘스트가 한 번 완료되면 사라지는 워로드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을 이야기였다.
세베라에게서 받을 수 있었던 최고효율의 퀘스트는 일단락되었고, 현재 에일과 연관된 퀘스트는 없는 상황.
켐벨에 존재하는 NPC와 그들이 주는 반복 퀘스트에 대해서는 대부분 알고 있었지만, 그중에 주목할 만큼 쓸모 있는 퀘스트는 없었다.
대부분의 평범한 반복 퀘스트가 주는 건 소소한 경험치와 용돈 벌이 수준의 사례금이 다였다.
‘역시 그것밖에 없나…….’
두리번거리며 길을 걷던 에일은 마음을 굳혔고, 즉시 방향을 틀어 한쪽 길목으로 움직였다.
굳이 에일만이 아니더라도 당장 눈에 띄는 의뢰가 없다면 대부분의 유저들이 향하는 곳이 있었다.
바로 도시마다 하나씩은 존재하는 모험가 조합.
에일은 깔끔한 간판이 걸려 있는 모험가 조합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시끌벅적한 광경과 마주할 수 있었다.
직업의 경계 없이 모여 있는 수많은 유저와 NPC가 북적거리며 술을 마시거나 다음 모험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모든 모험가를 위해 마련되어 있는 공간이니 만큼, 소속이 있든 없든 상관없었고 에일이 들어오는 데에도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보통 모험가 조합에 처음 발을 디딘 초보자라면 조합원이 서 있는 카운터에 다가가 이런저런 걸 물으며 시작하겠지만, 에일은 곧장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디 보자…….’
한쪽 벽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의뢰 게시판.
기다란 게시판엔 수많은 전단지가 꽂혀 있었는데, 범죄자 수배와 현상금 사냥, 몬스터 퇴치, 그 밖의 온갖 개인 의뢰들까지 모험가 조합이 제공하는 수많은 의뢰들이 붙어 있는 것이었다.
굳이 도시뿐 아니라 웬만한 거점 지역엔 크던 작던 모험가 조합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조합에서 제공하는 의뢰들은 적당한 퀘스트를 찾지 못한 많은 유저들에게 굉장히 유용한 기회를 주는 창구였다.
다양한 레벨 대와 난이도에 맞춰 의뢰들이 배분되어 있었고, 보상 또한 일반 반복 퀘스트보다는 좋은 편이었으니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어디… 할 만한 의뢰가…….’
에일 역시 그 앞에 서서 어떤 의뢰를 선택할지 차분히 고민했다.
조합에서 누구에게나 제공하는 공개 퀘스트인 만큼, 무엇을 선택하든 대박을 노리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제대로 생각해서 선택을 해야 했다.
의뢰 수행 장소로부터 거리가 너무 멀다거나 효율이 안 좋은 사냥터와 엮이는 의뢰를 받아들였다간 다른 선택지에 비해 손해를 보는 것이었다.
거기다 전용 스킬 ‘성화’를 가진 에일은 성속성과 화속성이 유용하게 쓰일 만한 사냥터를 골라 가는 편이 유리하니, 아무 의뢰나 병행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거다!’
의뢰 하나가 번뜩 눈에 들어온 에일이 의뢰서를 낚아챘다.
여러 장이 겹쳐 꽂혀 있던 의뢰서 한 장을 북 찢었고, 그와 동시에 퀘스트 목록이 갱신되며 에일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보스 몬스터 ‘사념의 덩어리, 바토라’를 처치하십시오. (0/1)]
[현상금: 23실링 45쿠퍼]
[제한 기간: 3일]
잉골 숲에 서식하는 19레벨의 필드 보스 몬스터, 바토라를 사냥해야 하는 현상금 퀘스트.
사냥터의 환경이나 이동 거리, 수행 난이도까지 모두 조건이 괜찮았다.
거기다 바토라라면 쓸 만한 아이템들을 주는 것으로 꽤나 알려져 있었다.
선택한 의뢰에 만족한 에일은 곧장 퀘스트를 완수하러 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하지만 바로 그때, 뒤에서 그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한 남자가 에일에게 말을 걸어왔다.
“혹시 님도 바토라 잡으러 가세요?”
“네, 맞습니다.”
“그거 잘됐네요! 저희도 이 녀석 잡으러 가는데 초행이라 한 명은 더 끼워서 가려고 하거든요. 저희랑 같이 가시죠! 미리 말해 두지만 저희 파티 중에 민폐 끼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남자가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뒤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벽에 기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두 명의 동료가 있었다.
에일은 재빨리 그들을 스캔했고, 세 명 모두 장비 상태를 보아 초짜는 아닌 듯 보였다.
거기에 더해 바토라는 최소 3인 파티 권장의 보스 몬스터였고, 초행임을 감안해 안전하게 4인으로 시도해 본다는 것은 상당히 현명한 선택이었다.
여러모로 타당한 파티 제안.
하지만 에일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아… 이미 일행이 있으세요?”
남자가 아쉬운 듯 물었다.
함께 공략을 시도할 동료가 있다면 제의를 거절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정작 돌아온 에일의 대답은 그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아니요, 저는 혼자 잡으러 갈 거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