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이단심판관-37화 (37/227)

37화 유적지 (6)

“여기가 210대의 던전이라고요?”

깜짝 놀란 알리사가 믿기지 않는 듯이 되물었다.

레벨 대가 210이라면 공식 랭킹에 들어가기 위해 최상위권에서 경쟁 중인 하드 플레이어, 준랭커들의 기준에서도 거의 최상급에 해당하는 고레벨 던전이었다.

랭커들을 대상으로 한 던전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

그만한 던전은 월드에 얼마 되지 않을 뿐더러, 전략적인 가치 탓에 대부분은 거대 길드들이 직접 관리해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통행료를 내야 하던지, 아니면 아예 입장이 금지되던지, 경우에 따라 달랐지만, 평범한 유저들은 구경 차원에서조차 쉽게 발을 들일 수 없다는 것은 똑같았다.

그런데 그들이 들어와 있는 낡은 유적이 그런 장소였다니,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이 사실을 빠르게 납득한 에일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 그랬던 거였어.’

어쩐지 여러모로 이상한 점이 많던 유적이었는데, 이제야 상황들이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입구 바깥쪽에 있던 녀석들 역시 210레벨까지는 아니더라도 과거엔 상당한 고레벨 몬스터였을 테고, 그들과 마주했을 때 20레벨 대에 불과했던 것은 이미 낡고 부서져 약화된 녀석이었기에 발생했던 일인 것이다.

‘아마 레벨 자체는 떨어졌지만, 원래 가지고 있던 특성 같이 커다란 줄기들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것이겠지.’

고레벨 몬스터나 지니고 있는 감지 특성을 거인 석상이 가지고 있던 것.

그리고 저레벨 몬스터답지 않게 마주하자마자 힐러부터 노리는 지능과 천장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흉악한 패턴도 같은 맥락으로 모두 설명이 되었다.

“유적이 갑자기 활성화된 것도 당신이 손을 쓴 거겠지?”“이곳 꼭대기에 잠들어 있던 물건이 필요해서 말이야.”

세베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녀가 숨겨져 있던 이 구역에 처음으로 발을 디딤으로써 석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쯤이야 쉽게 추측 가능했다.

“세상에…….”

알리사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번 의뢰의 진가는 선금으로 받은 골드도, 굉장한 가치의 스킬북도 아니었다.

진짜 보상은 바로 이곳 그 자체였다.

철저히 숨겨져 있던 210레벨 대의 거대 던전.

NPC인 세베라를 제외하고, 워로드를 플레이하는 유저들 사이에서는 오직 그들만이 알고 있을 정보였다.

이번 일로 지역락이 풀린 이상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야 넘쳐났다.

일반적인 유저라면 레벨 대가 맞지 않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활용법조차 모르고서 그저 약간의 정보료 정도를 받아 챙기는 게 전부겠지만, 게임 이해도가 높은 랭커 출신인 그들에겐 이 정보의 가치를 모를 수가 없었다.

당장 이곳에서 사냥이나 탐색으로 아이템과 경험치를 독식하는 건 절대 무리겠지만

귀중한 패가 하나 늘어난 것이다.

‘정말 여러모로 놀라게 하는데…….’

침착한 표정의 에일은 겉으로는 동요를 숨겼지만, 마음속에선 연달아 감탄사를 내뱉고 있는 것을 숨기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굳이 자신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여 이만한 정보를 넘겨준 이유.

분명 세베라는 강력한 세력에 속해 있는 데다가, 본인의 무력조차 월등해 원한다면 혼자서 독식도 가능한 위치였다.

하지만 아직 던전 전체를 차지했다기엔 그녀에게 주어졌던 시간도 얼마 없었고, 어째서 이런 선택을 한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이건 다음 의뢰의 선금. 뭣보다 필요한 물건은 이미 챙겼으니 뒤처리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세베라가 에일이 묻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다음 의뢰라면…….”

“한번 의뢰를 받아들이면 뺄 수 없다고 했지? 지금 당장 너희에게 뭔가를 맡기려는 건 아니지만 똑똑히 기억해 둬. 본격적으로 발을 들인 이상, 결코 물릴 수 없다는 걸. 지금 이 순간에도 판이 짜여 가고 있으니 말이야.”

* * *

[꾸준한 기도로 신앙심이 깊어집니다!]

[신앙심 스탯이 상승하였습니다! (현재 (22.9)]

모닥불 앞에서 가만히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있던 에일의 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는 여전히 잊지 않고 시간마다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고, 약간씩이지만 쏠쏠한 보너스 스탯을 챙겨 나갔다.

그들에게 의미심장한 말들을 남긴 세베라는 먼저 자리를 떠났고, 남겨진 에일과 알리사는 몬스터가 나타날 걱정 없는 피라미드의 입구 바깥에 모닥불을 피운 뒤 간단한 식사를 마쳤다.

달그락!

알리사가 깔끔하게 비워진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정말 예상외였어요. 설마 우연히 받아들였던 게 월드 퀘스트와 관련된 의뢰였을 줄이야.”

그녀의 말에 동의한 에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판이 짜이고 있다는 세베라의 말은 그들과는 별개로 완전히 다른 곳에서도 관련된 퀘스트 혹은 이벤트들이 진행 중이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세베라가 이후에 남겨 놓은 마지막 말들.

그를 통해 한 가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번에 그들이 맡은 의뢰는 세계관 전체에 변동을 주는 ‘월드 퀘스트’의 한 갈래로, 워로드 전체를 움직이는 거대한 줄기에 조금이나마 발을 걸치게 것이다

비록 낮은 레벨 탓에 주역은 되지 못하겠지만, 이만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수확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처음 퀘스트를 받았을 때만 해도 설마 이만한 일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걸 떠올리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던전에 관한 걸 정말 제가 사용해도 괜찮겠어요?”

에일이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이 거대한 지하 던전의 정보는 두 개로 나눌 수 있는 아이템 같은 게 아니었고, 당연히 한 명이 혜택을 누리면 다른 한 명은 아무런 이득도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 관한 문제에 대해 알리사는 선뜻 그에게 결정권을 넘겼고, 비밀은 지키겠다며 먼저 약속까지 해 왔다.

“애초에 에일 님이 주웠던 퀘스트 아이템에서 시작된 거잖아요? 거기다 랭커를 노리신다면 앞으로 부딪힐 일도 많을 텐데, 에일 님한테는 반드시 필요할 거고 반대로 저는 아무 쓸모도 없죠.”

알리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랭커의 자리를 노리는 에일과 다르게, 알리사는 그쪽 방면에 뜻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즉, 중요한 패를 쥐고 있어야 하는 쪽은 당연히 에일이라는 그녀의 뜻이었다.

“그러면 저희는 여기서 작별이네요.”

“일단은… 그렇죠.”

그들이 맡았던 퀘스트는 일단락된 데다가, 세베라조차 쉽지 않았다는 210레벨 대의 던전이었으니 당연히 여기서 더 안으로 진입할 수는 없었고, 이제 전에 에일이 언급했던 대로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갈 때였다.

시스템상 한데 묶여 있던 파티는 이미 해제한 상황.

“그래도 때가 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텐데요.”

에일이 말했다.

이미 함께 선행 퀘스트를 수행한 이상, 언젠가 다시 그들을 부를 게 뻔했고 특별한 일이 없다면 만나게 될 것이다.

“그렇겠죠? 흐음, 저는 여기서 조금만 더 구경하다 갈게요. 여러모로 신비한 곳이라 조금 더 구경하고 싶네요.”

“그렇다고 무리는 하지 마세요.”

“하하, 제가 설마 죽으려고 저길 들어가겠어요?”

알리사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잠시 마지막 인사를 주고받았고, 에일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갑작스러운 퀘스트의 마무리에 마음 한편엔 아쉬운 감정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사냥에 나서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분명 힐러면서 거뜬히 2인분 이상을 해내는 탁월한 그녀의 능력들은 레이드와 퀘스트를 진행하는 동안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알리사는 캐릭터 육성에 큰 욕심이 없는 듯했고, 굳이 그런 그녀를 끌고 다니면서 험난하게 굴리는 것은 민폐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타인에게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킬 수야 없었다.

게임은 어디까지나 즐겁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 그의 철칙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그녀의 쪽에서 먼저 뜻밖의 제안을 해 왔다.

[‘알리사’ 님이 친구 요청을 보내왔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

“이건……?”

갑자기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에 에일이 머뭇거렸다.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난 알리사는 성큼 다가오더니 그의 앞에 섰다.

“서로 친구 등록해 두는 건 어때요?”

온라인 게임에서 서로를 친구 목록에 추가한다는 것은 간단했다.

같은 파티나 길드원이 아니더라도 원한다면 메신저로 다시 연락이 가능했고,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서로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언제든 뜻만 맞는다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친구… 인맥이라…….’

에일은 잠시 알리사와 시스템 창을 번갈아 바라보며 사념에 빠졌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친구 요청에 옛날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워낙 가난하던 탓에 사회생활을 버거워하던 과거의 우진도 온라인 게임에서만큼은 달랐다.

게임이라는 커다란 공통점이 함께 있는 이들과의 관계는 쉽게 친밀해질 수 있었고, 속물적인 고민이나 갈등 없이 즐겁게 함께할 수 있었다.

인성이 부족하거나 발목을 잡으며 빌붙으려는 민폐 유저는 당연히 사양이었지만, 뜻이 맞고 이만한 실력자라면 환영이었다.

타고난 그녀의 게임 센스와 실력, 그리고 연금술과 요리를 비롯한 높은 랭크의 생활계열 기술들은 도움이 필요할 때 굉장히 유용할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길드에 들지 않기로 한 이상, 앞으로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닥쳤을 때 가장 도움이 되는 게 인맥이었다.

어쩌다 악연을 쌓은 파티의 네다섯 명 정도라면 모를까, 혹시나 길드 단위로 견제가 들어오게 된다면 아무리 실력이 있더라도 감당하기 버거운 상대였다.

‘다시 시작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에일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음을 정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흐흠, 저도요.”

알리사가 베시시 웃었다.

[요청이 수락되었습니다!]

* * *

에일이 먼저 떠난 뒤, 알리사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잠시 모닥불 앞에 앉아 있었다.

얼마 안 남은 장작을 태우고 있는 불길은 타닥거리며 일렁였다.

“후후, 재미있었지…….”

여정을 떠올린 알리사가 옅은 미소를 띄웠다.

믿을 만한 동료와 합을 맞추며 던전을 공략해나가는 것, 퀘스트를 위해 머리를 한데 모아 고민하고, 숨겨진 장소를 찾아 여행을 떠나며 웃으며 대화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분명 워로드를 시작하기 전만 하더라도 레벨업이나 스펙을 올리는 일에는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 했다.

실제로 게임을 시작한 뒤 오로지 생활 컨텐츠에 전념하던 그녀는 전투 부문에 손꼽히는 실력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사냥터에는 거의 나서지 않았다.

금지된 폐허에서 좀비들을 사냥하던 것 역시 연금술과 관련된 퀘스트 아이템을 구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 레벨을 올릴 목적으로 향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에일을 만나 다음을 기약한 지금은 마음이 흔들렸다.

생활 컨텐츠 위주의 초식 유저로 지내는 것도 충분히 즐거웠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모두 충족되지는 못했다.

“사냥이라…….”

알리사가 자신의 스태프를 만지작거리며 내려다봤다.

“이 정도쯤은 괜찮겠지……?”

오랜 고민을 끝낸 알리사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그녀에게 쥐여 진 것은 보랏빛으로 빛나는 두 개의 스킬북.

뻗어진 손이 책장 위에 올려졌고, 찬란한 빛이 뻗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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